11. 채식(菜食)은 지계(持戒)와 자비(慈悲) 수행의 밑바탕 1

천지의 큰 덕(德)은 만물(萬物)을 낳아 기르는 생명력이고, 여래(如來)의 큰 도(道)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제도하는 자비심(滋悲心)이지요.

사람과 만물이 비록 모습은 다를지라도 심성은 한 가지라오. 무릇 보살·벽지불·성문의 성현 삼승(三乘)과 천상·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의 평범한 육도 중생은 여래가 보기에는 누구나 똑같은 한 자식에 불과하오.

왜냐하면 그들 모두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으며 또 모두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성현의 삼승은 그만 두고라도, 육도 중생만 해도 겉보기에는 비록 그들이 처한 신분지위와 그들이 각자 받는 고통과 쾌락이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차이나지만, 그들 모두 미혹과 업장을 다 끊지는 못하여 아직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했기는 매일반이라 천상 세계로 복이 다하면 아래로 내려오고, 지옥 중생도 죄가 소멸되면 다시 위로 올라오는 법이오.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며 위 아래가 서로 번갈아 뒤바뀌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우리가 지금 다행히 인간의 몸을 받았으니 이리저리 궁리하고 갖은 방법을 다해 우리만 못한 중생의 생명을 보호하고 아껴주어야 마땅한 도리요. 천지가 만물을 낳아 기르는 덕을 몸소 느껴보고 우리가 타고난 측은지심의 어진 천성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오. 만물이 모두 우리처럼 천지간에 생겨나고 똑같이 천지의 보살핌으로 자라면서, 우리와 똑같이 삶에 탐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

어진 사람은 해골까지 흙속에 묻어 가려 주고, 막 자라나는 풀과 나무는 가지도 꺾지 않는다오. 하물며 우리의 입과 뱃속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뭇 생명들을 칼로 자르고 가르며 불에 굽거나 물에 삶고 기름에 지지고 볶는 고통을 당하도록 요구한단 말이오? 이러한 중생들도 시작도 없는 때(無始)부터 일찍이 아주 높고 귀한 지위에서 대단한 위엄과 권세를 누려 왔을텐데 그러한 위엄과 권위를 잘 이용하여 공덕을 쌓을 줄은 모르고 도리어 그를 빙자하여 악업만 지었을 것이오. 또 하늘(자연)이 낳아 기르는 생명을 잔인하게 해치면 하늘(자연)이 장차 내 복과 수명을 빼앗을 것은 두렵지 않단 말이오?

사람들은 오직 자기 가족끼리만 모여 몸과 마음 안락하며 만사가 뜻대로 순조롭게 장수하기만 바라지요. 정말 그러고 싶거든 마땅히 대자비심을 발하여 다른 생명을 살려주는[放生] 착한 일에 힘써야 해요. 그러면 천지신명이 모두 우리가 만물을 사랑하는 정성에 감동하여 우리를 보우하게 되고 우리가 바라는 바가 저절로 얻어지게 된다오.

만약 우리가 재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고 해서 갖은 방법을 동원하며 온갖 생명을 잡아, 그들의 고통은 생각지도 않은 채 우리 자신의 입과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다면, 과연 하늘 및 땅과 더불어 우주의 세 근본 존재[三才]가 된다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리고 우리와 만물은 함께 생사고해(生死苦海)를 윤회(輪廻)하면서 시작도 없는 때부터 지금까지 때로는 그들이 우리 부모형제 처자가 되기도 하고 거꾸로 우리가 그들의 부모형제 처자가 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그들이 사람이나 다른 짐승으로 우리에게 살해당하기도 하고 거꾸로 우리가 그들의 손에 살해되기도 하였을 것이오. 친척이 되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살해한 은혜와 원한을 차분히 생각해본다면 부끄러워 살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서둘러 참회하고 고쳐도 오히려 때늦을 것이오.

하물며 여전히 구태의연한 인습에 얽매여 미혹된 편견을 고집하고, 하늘이 만물을 낳아 기르는 것은 본디부터 인간의 먹거리로 주시기 위함이라고 강변한단 말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미혹과 업장이 두터워 정말 윤회 고해를 벗어날 길이 없게 되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저들의 죄업이 모두 소멸하여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나고 착한 뿌리[善根]가 뻗어나, 정법을 듣고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마침내 불도(佛道)를 이룬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아직도 타락해 있다면 마땅히 그들이 자비와 연민을 베풀어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 불성을 깨닫도록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것이오. 그러니 어찌 한 때의 강한 힘과 재주만 믿고 오랜 세월토록 구원받지 못할 죄업을 저지를 수 있겠소?

우리는 이러한 업보(業報) 윤회의 이치를 모르지만 여래는 훤히 들여다 보고 있지요. 이러한 진실을 몰랐을 때야 그만이었지만 이제 여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 알게 된 이상 부끄러움과 자비연민을 이기지 못해야 마땅할 것이오. 우리가 숙세의 착한 복덕으로 다행히 인간 세상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저들과 전생에 맺고 맺힌 원한 감정을 풀어버리도록 살상을 피하고 방생을 실행하여 모든 생명이 각각 자기 자리를 얻도록 해 주어야 하오.

나아가 염불 독경의 공덕으로 그들이 악도(惡道)를 벗어나 극락정토에 왕생하도록 회향기도해 줄 필요가 있어요. 설령 그들은 업장이 너무 무거워 곧장 왕생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자신은 이러한 자선공덕으로 서방정토에 결단코 왕생하기를 간절히 기원해야 마땅하지요. 그렇게 왕생하기만 한다면 곧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의 경지에 들고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 점차 부처의 과보를 증득해갈 것이오.

옛날 불교가 동방에 전래되지 않았을 때는 유교의 성현들이 세간의 윤리도덕으로 교화를 폈다오. 그래서 우리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육도 윤회를 반복하는 사실이나, 미혹을 끊어 진리를 증득하고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이 되는 수행의 이치 등은 아직 뚜렷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까지 세우지는 않았소.

그렇지만 우리 중국의 옛 성현들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만물을 사랑하고 생명을 놓아준 가르침이 수없이 많다오. 아주 확실하게 역사기록으로 후세에 전해지는 행적만도 적지 않소. 서경(書經)에는 짐승, 물고기, 초목까지 모두 기뻐 춤추었다는 기록이 있고 문왕(文王)의 덕택은 해골까지 덮어주었다고 전해지오. 논어에는 낚시질은 하더라도 줄낚시나 그물질은 안 하며 주살을 쏘더라도 밤에 잠자는 짐승을 사냥하지는 않는다는 공자의 말씀이 적혀 있소. 맹자는 산 목숨을 보면 그것이 죽는 것은 차마 볼 수 없기 때문에, 짐승이 도살 당하면서 지르는 비명 소리만 들어도 그 고기를 차마 먹지 못 한다는 측은지심을 인정(仁政)과 왕도정치의 출발점으로 강조하였소.

또 주(周) 나라 예법에 따르면 제후는 정당한 이유(중요한 일) 없이 소를 잡지 않으며 대부는 정당한 이유없이 양을 잡지 않고 선비는 정당한 이유없이 개, 돼지를 잡지 않으며 서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진기한 음식, 곧 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오. 그런가 하면, 간자(簡子)가 비둘기를 놓아 주고 자산(子産)이 물고기를 물에 넣어 기르며 수후(隨侯)가 뱀을 살려 보옥을 얻고 양보(楊寶)가 참새를 구해준 일과 같은 방생의 행적도 수없이 전해지오.

이러한 문헌 기록만 보더라도 살생의 악업은 유가의 성현들도 결코 금하지 않은 게 아님이 분명하오. 다만 세간의 중생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임기응변의 방편 도덕을 따른 결과 완전히 끊도록 요구하지 못한 것일 따름이지요. 무릇 당시 상황으로 보아 정당한 이유(중요한 일)로 목숨을 죽인다면 그 살생은 정말 적었을 것이오. 더구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일은 일 년에 며칠도 채 안 되었겠지요.

그런데 후세에 성현의 도가 스러지고 교화가 쇠퇴하면서 사람들 심성이 갈수록 잔인해지고 마침내 너나 할 것 없이 육식을 집안의 다반사로 습관들이게 되었구료. 자기 한 입만 챙기느라 다른 생명의 고통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도 않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다행히 불교가 전래된 이후,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모르면 생사윤회가 그칠 날 없고 이를 깨달으면 열반을 증득하여 영겁토록 상주한다는 진실한 원리와 사실이 철저하게 밝혀졌소. 그래서 고물고물한 모든 중생이 과거에 우리 부모였고 미래에 부처가 될 것임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니 감히 잡아 먹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들 모두가 각자 자기 자리를 얻도록 해주어야 마땅하지요. 아니나 다를까. 역대로 거룩한 임금과 현명한 신하, 지혜로운 선비와 뛰어난 유생들은 대부분 부처님의 가르침을 높이 받들어 따르면서 인자한 덕성을 함양하였소. 더러는 육식을 끊고 채식을 하며 더러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을 널리 행하였소. 그토록 훌륭한 덕행과 아름다운 말씀들이 역사책에 수없이 실려 전해지는 것은 후세 사람들도 이들을 본받아 함께 자비심을 수양하고 만생명을 사랑하도록 권장하는 가르침이 아니겠소?

사람과 다른 동물은 모두 똑같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을 받았으며, 또한 똑같이 지각과 의식 있는 영혼과 심성을 지니고 같은 천지 사이에 살아가고 있소. 다만 숙세의 죄업과 복덕이 서로 달라 지금처럼 각기 다른 형체와 의식 수준으로 나뉘었을 뿐이오. 내가 강하고 저들이 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 살코기로 내 뱃속을 채우면서 쾌락과 만족을 누리는 일이 바로 전생 복덕의 보답이라고 내세울 수 있겠소? 그 복덕이 한 번 다하고 나면 죄업의 과보가 눈 앞에 닥쳐 다른 동물로 떨어지고, 마침내 사람들의 부림을 받다가 살육을 당하는 줄 누가 알리요? 그 때 몸으로 대적할 수도 없고 입으로는 말도 못하며 마음 속에 차오르는 근심과 두려움과 고통에 휩싸인 자신을 돌아보면서 고기를 먹은 게 큰 죄악이었고 고기를 먹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나찰임을 알게 될 것이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를 잡아 먹지 못하도록 막고 싶어도 그 때는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궁지일 뿐이요. 한때 입맛을 위해 미래 오랜 겁토록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니 이는 자살에 비해 만 배나 더 참혹하고 끔찍스러운 짓이 분명하오. 어찌하여 이런 짓으로 그처럼 엄청난 재앙을 스스로 불러들인단 말이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어찌 그리도 어리석고 미혹되었단 말이오.

그래서 『능엄경』에 “사람이 양을 잡아 먹으면 양은 죽어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죽어 양이 된다.”하였소. 또 『입능가경』에도 세존께서 고기 먹는 것을 갖가지로 질책하시면서, 모든 중생이 시작도 없는 때부터 생사윤회를 끊임없이 반복해오면서 서로 부모, 형제, 처자, 친구의 인연을 맺어왔는데 지금 생명을 바꾸어 짐승으로 태어났다 해서 어찌 그들을 함부로 잡아 먹을 수 있느냐고 탄식한 내용이 나오지요. 다른 생명을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면 티끌처럼 무한한 영겁의 세월토록 서로 죽이고 잡아 먹기를 반복하는데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며 위 아래가 끊임없이 뒤바뀌듯 윤회 보복이 계속된다는 거지요.

사마타(奢摩他:禪定)와 부처님 출현을 기다려야만 비로소 그 복수의 사슬이 끊길 수 있다는데 사마타의 도를 어디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으며 더구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는 때는 어디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것이오? 그러하거늘 우리가 가까이는 앞선 성현들의 언행을 본받고 멀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가 감히 있겠소? 우리가 죽기 싫어하는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여 지금 잡혀 요리되기를 기다리는 목숨들을 건져준다면 숙세의 업장을 덜어 내고 착한 복덕의 뿌리를 심어 기를 수 있으며, 나아가 살해의 원인을 영원히 끊어버려 함께 무궁토록 장수하는 과보를 얻을 수 있으리이다.

印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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