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학문적(學問的) 성과(成果)

원효의 여러 모습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것은 그가 뛰어난 학승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비문에는 “그가 일체의 도리를 모두 다 통달하려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은밀하고 미묘한 이치를 연구하고 분석했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송고승전』의 저자 찬녕(贊寧)은 학승으로서의 원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원효는 진리의 성을 용감하게 공격하고, 문진(文陣)에서 종횡무진 당당히 분투해서, 나아갈 뿐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삼학(三學)에 두루 통하여 그 나라에서는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고 했다. 도리에 정통하고 입신(入神)의 경지에 도달함이 이와 같았다.

혼자서 수많은 적군과 대항할 만한 지혜와 용기를 갖춘 장수에 학승으로서의 원효를 비견하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원효성사 오른쪽에 가는 선철(先哲)은 없다”고 하면서, “오직 용수(龍樹)와 마명(馬鳴)만이 원효에 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원효의 학문적 업적에 대한 의천의 평가는 정당합니다. 교장(敎藏)을 간행했던 의천의 교학에 대한 평가는 연구사적 안목을 토대로 한 것으로 원효의 학문과 사상은 한국불교사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불교사에도 여전히 우뚝 솟은 봉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신라 사람들이 원효를 ‘만인의 적’이라고 불렀던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원효의 학문과 사상은 1700년 한국불교사 중에서도 가장 높은 정상에 위치하기에 그렇습니다. 원효 이전에 그처럼 높은 봉우리는 없었고, 또한 그 이후에도 그 정상에 올라 본 고승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원효의 학문은 공허한 이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구원론적인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대승기신론별기』를 저술한 것이 ‘자신을 위한 기록일 뿐, 감히 세상에 유통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또 『보살계본지범요기』를 쓰게 된 의도가 ‘천박한 짓을 버리고, 깊고 원대한 일을 완전하게 하며, 또한 사이비 행동일랑 버리고 진실한 것만을 따르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다짐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에 있다’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원효의 학문적 관심은 자신의 문제, 그것도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학문적인 노력은 곧 하나의 등불을 밝히는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고, 그 등불이 두루 전해져 세상의 어둠을 밝힐 수 있기를 염원하기도 했습니다.

원효의 학문은 책상 앞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의 저술에는 많은 인생의 경험이 녹아 있습니다. 그의 학문이 현학적으로나 훈고학적으로 기울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고, 간략하고 명쾌한 문장 속에 풍부한 의미를 담으려던 노력이 보이는 것도 이런 까닭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원효의 학문은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입장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문(敎門)이나 계율에 제약받지 않고 능히 자신의 마음으로써 도리를 결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문에 제약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전공이나 종파에 따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학문은 남의 주장에 맹종해도, 자신의 선입관에 빠져도, 언어의 그물에 걸려도 안 됩니다. 허심탄회한 입장에 설 때, 긍정과 부정, 수용과 비판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생각이나 기준으로 타인의 사상을 이해하려 듭니다. 그 결과 그가 가진 잣대를 벗어나 있는 더 넓고 깊은 생각은 재지도 못합니다. 원효의 허심탄회한 입장은 마치 아무 잣대도 없는 것 같지만 옹색한 기준이나 잣대를 갖지 않았기에 오히려 잣대 밖의 더 큰 것을 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념(無念)을 얻으면 상대방과 더불어 평등하다.’ 이또한 원효가 유의했던 말입니다. 자기중심의 이기심을 벗어나지 않고서 상대방과 평등해 질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과 평등하지 않은 채 상대방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객관적인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을 비우는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이처럼 원효가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입장에 섰을 때, 그는 긍정과 부정, 수용과 비판에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원효는 ‘긍정과 부정에 구애받지 않아서 긍정해도 얻는 것이 없고 부정해도 잃을 것이 없다. 이는 곧 마명의 묘술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묘술은 마명만의 것이 아니라 원효가 지향했던 바이며 또한 체득했던 묘술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는 예리한 비판자인 동시에 화쟁의 대가였기에 그렇습니다.

원효는 타인의 주장이나 견해를 받아들일 줄 알았습니다. 의상에게 화엄교학에 대한 의문을 묻거나 수전법(數錢法)을 배웠던 예, 불교의 신학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점 등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는 냉정한 비판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천태(天台)의 교판(敎判)을 “술잔으로 바닷물을 잔질하고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고, 현장이 세운 ‘유식무경비량(唯識無境比量)’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노력하고도 아무런 공이 없다”고 비판했었습니다. 원효의 교학은 전통적인 불교학과 새로운 학풍 모두를 호흡하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의 교학에는 신불교로부터 받은 영향이 적지 않았지만, 전통적인 교학을 등한히 하지도 않았습니다.

원효의 학문에는 중국의 불교계나 혹은 유학을 다녀왔던 승려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유학승들의 대부분은 어떤 종파나 전공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이는 종파적 성격이 강한 중국불교의 영향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원효의 학문적 관심은 어느 한 분야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원효는 좁은 견해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 “갈대 구멍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격”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봉황새가 청운(靑雲)에 날아오르면 산악의 나직함을 내려다볼 수 있듯이, 학자가 『화엄경』의 보문에 들어서면 그때서야 먼저 배운 것이 편협함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했던 원효는 높이 날아올라 더 넓은 세계를 조감했던 웅대한 안목의 학승이었습니다.

원효의 학문 활동은 젊은 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의 대부분 저술은 30대 이후에 쓰여진 것 같은데, 대개 648년에 번역된 『유가론』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648년은 원효의 나이 32세였습니다. 그의 『기신론별기』는 33세 이후에 쓴 것이고,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는 47세 이후의 저술이며, 『판비량논(判比量論)』은 59세 때의 저작입니다. 그리고 『화엄종요(華嚴宗要)』와 『금강삼매경론』은 60대 만년에 쓰여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전 생애에 걸친 끝없는 노력에 대해 의천은 “경전마다 주석이 있고, 통하지 않은 논이 없다”고 평했습니다.

원효는 100여부 240여권의 저서를 남긴 대저술가로 불린다. 약간의 혼란이 있는 저술 목록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90종에 가까운 저술을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서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저술가였습니다. 사실 한국불교사상 원효를 능가하는 저술가는 찾기 어렵습니다. 신라의 의적(義寂)이 25부, 경흥(憬興)이 40여부, 태현(太賢)이 50여부의 저술을 남겼지만 원효에 비할 바는 못 됩니다. 중국의 학승도 원효를 따르지 못했습니다. 천태지의는 30여부, 현수법장(法藏)은 50여부, 백본소주(百本疏主)로 불리는 규기(窺基)의 경우도 50여부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원효의 많은 저서, 그 대부분이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및 일본에 전해져 높이 평가되고 많은 영향을 주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십문화쟁론』를 본 이들은 모두 훌륭하다고 했고, 번역되어 인도에까지 유포되었습니다. 『금강삼매경론』은 신라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도 찬양받았던 저서입니다. 『기신론소』와 『화엄경소』는 법장을 비롯한 당나라 화엄학승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저서며, 『보살계본지범요기』는 일본의 명혜(明惠)가 강의했으며, 8세기 초의 일본 지경(智憬)은 『무량수경종요』에 대한 소를 지었습니다. 만일 『능가경』을 강의하려면 원효의 소에 의지해야한다고 의천은 평했고, 또 그는 원효소에 의하여 『금강경』을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원효의 저서 중에서 현재 완본으로 전하는 것은 13종뿐입니다. 곧, 『대혜도경종요』, 『법화경종요』, 『열반종요』, 『미륵상생경종요』, 『무량수경종요』, 『아미타경소』, 『보살계본지범요기』,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별기』, 『대승기신론소』, 『이장의』, 『대승육정참회』, 『발심수행장』 등이다. 이 밖에도 잔본(殘本)으로 전하는 『화엄경소』, 『본업경소』, 『범망경보살계본사기』, 『판비량론』, 『중변분별론소』, 등이 있고, 『십문화쟁론』 단편, 『해심밀경소서』, 『미타증성게』 등을 합하면 20여종의 저서가 불완전한 형태로 남아오고 있을 뿐입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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