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대중교화는 그의 학문적 성과나 사상적 깊이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황량하고 거친 세상이라는 들판에서 삶에 지친 사람들의 묵정밭을 일구고 가꾸는 일이란 보살행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원효가 만난 사람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밭가는 노인과 산골의 몽매한 사람, 그리고 광대, 백정, 술장사 등 시중사람들과도 어울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리의 아이들이나 부인들까지도 원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의 익살과 웃음, 노래와 춤 등은 삶에 지친 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신나는 일이었고,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웠을 것입니다.
원효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성이 있음을 믿었고, 비록 지금은 번뇌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의 경우도 그 번뇌의 구름 걷힐 날 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대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대들은 모두 다 부처가 될 수 있기에.” 『법화경』의 이 구절을 원효는 주목한 바 있습니다. 골품제 사회에서의 이와 같은 발언은 예사로운 것이 아닙니다. 원효는 “날개 작은 새는 산기슭에 의지하여 형을 기르고, 작은 고기는 여울물에 엎드려 본성을 편안히 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소승적인 범부의 삶 또한 소중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원효는 ‘보경(普敬)’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두루 공경한다는 것은 자기를 던져 중생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고, 여기에는 보살정신이 보입니다. 원효의 대중교화는 수순중생(隨順衆生)이었고, 동사섭(同事攝)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따랐고 자신도 모르게 감화되었을 것입니다.
민중들에게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원효는 “둔하거나 재간이 적은 사람에게는 하나의 게송을 외워서 항상 생각하게 한다면 마침내 일체의 불법을 두루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간단한 염불을 권했습니다. 원효는 정토신앙이 범부에게 유익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을 따르기만 해도 반드시 그 나라에 왕생해 있으리라”고. 맑은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는 깨끗한 나라에 이르러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원효는 교화를 위해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무애가(無碍歌), 미타징성가(彌陀證性歌)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애가의 가사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정토신앙을 노래한 미타증성가는 그 일부가 지금도 전합니다. 원효는 어느 날 광대들이 특이한 모양의 조롱박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도 조롱박 모양의 도구를 만들어 무애라고 이름하고는 이를 두드리며 춤추었습니다. 원효로부터 비롯된 무애무는 신라사회에 두루 퍼졌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전승되었습니다. 진실한 마음에 토대하지 않은 무애행은 방종이 됩니다. 그러나 원효의 무애행은 일찍부터 대중교화를 위한 화광동진(和光同塵)으로 이해되었으니 의천이 ‘티끌과 어울렸으나 그 진심을 더럽히지 않았고, 빛을 섞었으나 그 본체는 변화지 않았다.’라고 했던 것 등이 그 예입니다. 세속에 발붙이고 살면서도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처염상정(處染常淨)하는 연꽃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효의 말처럼 연꽃은 진흙물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원만히 향기롭고 조촐하여 온갖 아름다움을 두루 갖추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원효의 도력에 얽힌 설화는 여러 가지가 전합니다. 당나라의 성선사에 화재가 난 것을 신라 고선사에 있던 원효가 알고 서쪽을 향해 물을 뿜어서 불을 껐다는 설화는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효가 소반을 던져 당나라의 천명 대중을 구했다는 척반구중(擲盤救衆) 설화는 묘향산의 척반대, 경주의 단석산, 양산의 척판암, 천성산의 화엄벌 등 여러 곳에 전합니다. 원효가 불을 꺼준 절도 당나라에 있었고, 소반을 던져 구해준 천명 대중도 당나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원효의 교화와 영향이 멀리 당나라에까지 미쳤음을 설화는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신통에 얽힌 많은 설화가 유포된 것은, 그의 위대함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오랜 세월 찬양되고 윤색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효의 교학은 신라의 경흥(憬興), 도륜(道倫), 현융(玄隆), 태현(太賢), 견등(見登), 표원(表員) 등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현융은 분황사의 승려였고, 견등은 원효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자랑할 정도로 원효를 존경했습니다. 분황사, 고선사, 흥륜사 등에는 원효의 소상이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분황사의 상은 설총이 조성해 모신 것이었고, 고선사의 것은 거사 모습의 상이었습니다. 고선사에 원효의 행적을 기리는 서당화상비가 세워진 것은 9세기 초였고, 성도한 곳인 직산의 옛 무덤은 9세기 중엽에 기념할만한 유적지로 인식되었습니다. 10세기 초에는 원효가 머물렀던 향성산 내의 한 절터도 성적(聖跡)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낙산에 있었던 관음송과 냉천 또한 원효와 관련된 유적으로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신라에서는 원효를 구룡대사(丘龍大師), 진나후신(陳那後身), 만인지적(萬人之敵) 등으로 존칭하기도 했습니다.
원효의 교학은 고려의 균여(均如), 의천(義天), 지눌(知訥), 요세(了世), 보환(普幻) 등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원효의 저서를 수집·간행하고 이를 송나라와 요나라에까지 유포하기도 했습니다. 의천은 보살(菩薩), 성사(聖師) 등의 존칭을 사용하면서까지 그 위대성을 강조했고, 불교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원효 교학의 의의를 “고금의 잘못을 바로 잡고 백가의 서로 다른 논쟁을 화합시킨 것”으로 천명했습니다. 숙종 5년(1101)에는 국가에서 원효를 동방의 성인이라고 하면서 화쟁국사(和諍國師)의 호를 추증하고 분황사에 비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흔히 원효를 대성(大聖), 성사(聖師), 효성(曉聖) 등으로 존칭했는데, 의천, 보환, 이규보, 이인로, 일연 등이 모두 이 존칭을 사용했습니다.
불교가 심하게 억압받고 쇠퇴했던 조선시대에도 원효는 잊혀 지지 않았습니다. 『동문선』에는 원효의 서문 6종을 수록했고, 김종직, 김시습, 청허휴정 등이 원효에 대한 간략한 글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원효에 대한 인식은 구전되던 설화에 의한 신이한 도승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고선사와 분황사에 전하던 원효의 비는 깨어졌고, 여러 유적지는 잊혀 져 갔으며, 많은 명저들은 읽는 이 없이 흩어지고, 겨우 한 두 편이 간행되었을 뿐입니다.
민족적 위기를 맞고 있던 식민지시대에 이르러 원효는 민족적 자존심으로까지 인식되었습니다. 장도빈은 민족적 자존을 세우기 위해 『위인원효』를 저술했고(1917년), 최남선은 조선불교라는 논설을 1930년에 발표해서 원효불교의 위대성을 제창했으며,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던 조소앙(趙素昻)은 1933년경에 「원효대사전」을 써서 원효의 탁월한 업적을 천명했었습니다. 이 외에도 1925년에는 동경불교유학생들에 의해 원효대성찬앙회가 조직되기도 했으며, 1942년 3월부터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는 원효를 통해 민족의 근본정신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집필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원효의 명성과 영향은 지속되었습니다. 의천은 원효의 명성이 중국과 인도에까지 떨쳤다고 했습니다. 당나라에 왔던 진나(陳那)의 문도들에 의해 원효의 『십문화쟁론』이 번역되어 천축에까지 전해졌습니다. 『금강삼매경론』은 중국에서 소(疏)가 논(論)으로 존칭되었다는 설이 있고, 『화엄경소』는 당나라 화엄학자들의 주목을 크게 받았으며, 『기신론소』는 해동소(海東疏)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당나라 학자들의 저서에는 원효의 학설을 인증(引證)한 예가 많은데, 법장(法藏), 혜소(慧沼), 이통현(李通玄), 담연(湛然), 혜원(慧苑), 징관(澄觀), 정빈(定賓) 등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중국에서의 원효의 영향은 송대에까지 계속되어 연수(延壽), 지례(智禮), 자선(子璿) 등이 원효의 설을 인용했고, 정원(淨源)과 원소(元炤)는 의천으로부터 원효의 저서를 전해 받기도 했습니다.
일본 불교에 끼친 원효의 영향은 8세기 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8세기 일본에서 서사된 원효의 저서는 47종이나 되고, 심상(審詳,?~742)의 『경소록』에는 원효의 저술 32종이 보입니다. 실재로 원효의 모든 저서가 일본에 전해져 유포되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선주(善珠:723~797), 원효(願曉:728~798), 상등(常騰:740~815), 수영(壽靈:757~791), 장준(藏俊:1104~1140), 응연(凝然:1240~1321), 양충(良忠:1199~1287), 요혜(了慧:1203~1290) 등의 저술에는 원효의 학설을 많이 인용돼 있습니다. 원효의 저서를 읽고 그 설을 인증한 경우는 18세기에 이르기까지 40여명이나 더 확인됩니다. 12~13세기경 일본에는 원효의 전기류인 『원효화상연기(元曉和上緣起)』와 『원효사초(元曉事抄)』가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원효사초』는 장편의 전기였고, 원효보살이라는 존칭을 사용해 주목됩니다. 8세기 중반 이후부터 일본에서는 원효를 구룡(丘龍), 혹은 구룡대사로 존칭한 예가 적지 않습니다. 명혜(明惠:1173~1232)는 원효와 의상을 무척 흠모했으며 46세 때에는 원효의 『보살계본지범요기』를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가 성인(成忍)에게 부탁하여 그린 『화엄연기(華嚴緣起)』 6권은 원효와 의상의 생애를 그 전체 내용으로 한 것으로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돼 있을 정도입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