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생애(生涯) Ⅱ

원효는 44세이던 문무왕 원년(661년)에 다시 도당유학의 길을 나섰습니다.

물론 이 때도 의상과 함께였습니다. 그런데 원효는 남양만이 멀지 않은 직산의 어느 옛 무덤 속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송고승전』의 ‘의상전’에 전하는 원효의 오도(悟道) 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효와 의상은 중도에 심한 폭우를 만나 길 옆의 토감(土龕) 사이에 몸을 숨겨 회오리바람과 습기를 피했다. 다음날 날이 밝아서 보니, 해골이 있는 옛무덤이었다. 궂은비는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또 연도의 벽 중에 머물렀는데, 밤이 깊기도 전에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했다. 원효는 탄식하며 말했다. “전날의 잠자리는 토감이라 편안했는데, 오늘밤은 귀신의 집에 의탁하니 근심이 많구나. 알겠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감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떻게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그리고는 바랑을 챙겨 되돌아 왔다.

그런데 10세기 중국 오대 때 인물인 영명연수 선사의 『종경록』(961년)에는 무덤 속에서 시체가 썩어 고인 물을 마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효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아무튼 원효는 옛무덤 속에서 오랜 꿈을 깼습니다. 원효의 깨달음,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원효 같은 천재도 불혹(不惑)의 나이를 몇 년 더 지나고서야 인생에의 확신을 얻었던 것입니다. 원효는 40세를 전후한 시기에 요석공주를 만났고, 이를 계기로 환속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요석공주와의 만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원효는 어느 날 상례에서 벗어나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나. 나는 하늘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하노니.”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의 의미를 몰랐는데, 태종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아마도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대현(大賢)이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당시 요석궁(瑤石宮)에는 과부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칙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고 있을 때 그가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만나게 되었다.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시었다. 궁리가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니,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공주는 과연 아이를 배고 설총(薛聰)을 낳았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원효는 무열왕(654~660) 때에 공주를 만났고, 그의 나이 37세로부터 43세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공주와의 만남은 일시적인 실수나 불장난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결혼을 대부분 파계로 평가하지만, 원효 스스로 파계로 인식하고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것은 세속의 거리로 다시 돌아오는 강렬한 몸짓이었기 때문입니다.

“출세법(出世法)은 세간법(世間法)을 치유하는 법이고, 출출세법(出出世法)은 출세법을 치료하는 법이다.” 원효는 『유가론』의 이 말에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팔지(八地) 이상의 보살은 출세로부터 다시 벗어나며, 이 보살이 머무는 곳은 이미 예토가 아닌 정토다.”라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원효는 설총을 얻은 뒤에는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를 자신의 호로 정했습니다. 원효가 거사의 모습으로 살았다고 해서 불교를 떠난 것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더 열심히 교학에 정진했고, 더욱 자유롭게 교화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가 환속했다고 해서 세속에서만 살았던 것도 아니고, 대중 교화에만 전념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의 교학 연구는 만년까지 계속되었고, 절에서 머문 적이 오히려 많았습니다. 55세에 행명사에서 『판비량론』을 저술했고, 분황사에서는 『화엄경소』를 지었으며, 고향의 옛집에 지었던 초개사에서 현풍(玄風)을 드날렸고, 그리고 혈사에서 많이 살았고 또 이 절에서 입적했습니다. 혈사 곁에는 설총의 집터가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면, 원효의 가족이 왕래하며 살고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원효는 당시 신라 사회에 두루 영향을 미쳤습니다. 거리의 대중들로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던 엄장을 쟁관법(錚觀法)으로 지도했던 이야기며, 46세 때인 문무왕 2년(662)에 군사에 관한 암호문서의 의미를 해석해 줌으로써 김유신이 이끌던 신라군을 위기로부터 구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이야기며, 사복과 함께 사복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장사지낸 이야기며, 왕비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며 『금강삼매경론』을 황룡사에서 강의했던 이야기 등은 원효가 당시 신라 사회의 큰 의원 같은 존재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부정관(不淨觀)은 욕심의 병에는 좋지만, 분노의 병에는 좋지 못하고, 자비심은 분노에는 좋지만 욕심에는 좋지 않다.” 이는 원효의 가르침이다. 그는 병에 따라 약을 쓸 줄 알았던 용한 의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원효의 일생은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밤을 지새우는 교학 연구로, 거리를 누비는 교화의 길로….
원효는 70년의 빛나는 생애를 혈사(穴寺)에서 마감했습니다. 삼국간의 전쟁도 끝나고 당나라 군사를 물리쳐 낸지도 10년이 지나 평화의 기운이 온 강토에 넘쳐나던 686년(신문왕 6)때, 구룡(丘龍)은 역사의 강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면 원효는 어떤 인물일까요. 그의 모습은 다양하고, 그의 삶의 폭은 깊고도 넓어서 간단히 규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는 승려이면서 거사였고,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대중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요하나 항상 움직이는 모습을(靜而恒動威), 행동하되 언제나 고요한 덕을(動而常寂德) 잃지 않기를”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일정한 범주가 없고, 어떤 굴레도 구애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무 걸림이 없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원효는 환속한 거사이기 전에 용맹으로 정진한 수행자였습니다. “절하는 무릎이 얼음과 같아도 불(火) 생각 말고, 주린 창자 끊어지는 듯해도 먹을 것을 찾지 말라.” 수행에 몰두하는 원효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그는 원(願)이라는 갑옷을 입고 흔들림 없이 정진했습니다. 천재성만으로 원효를 미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는 쉬지 않고 정진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100여부에 이르는 그의 저서로 알 수 있습니다.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일, 수많은 독서와 끝없는 사색, 체계적인 구성과 논리적인 전개, 온 정력을 집중하는 의지력, 뜬 눈으로 지새는 정진의 날들, 또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강한 체력이 뒷받침될 때 저술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되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는 『잡보장경』의 이 구절은 원효에게 그대로 적용시켜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는 높이 나르는 봉황새의 기상을 갖고도 산기슭에 사는 작은 새의 행복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100개의 서까래가 아닌 하나의 대들보임을 자부하고, 하늘을 떠받칠 기둥으로 자처할 만큼의 자긍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의 콧대를 스스로 꺾을 줄 알았기에 소성거사의 모습을 하고서 낮은 곳으로 임했습니다. 원효는 거침없는 비판자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돌아볼 줄 아는 이였습니다. 그는 화해의 명수이면서도, 잘못에 대해서는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는 비판자였습니다. 때로 그의 발언은 불호령이었고 하늘의 북소리[天鼓]였습니다.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에는 당시 승려들에 대한 강한 비판이 보입니다. “사자 몸속의 벌레”, “보살백정”, 콩과 보리도 구분 못하는 “숙맥” 등의 표현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원효는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무뢰한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미세한 움직임을 내면적으로 관찰해 보라.” “수행자는 다만 자신의 득실(得失)을 자세히 살필 것이지 별안간 남의 덕이나 결함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원효는 스스로의 허물을 살펴보며 바른 뜻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허물과 잘못을 부끄러워하며 참회할 줄도 알았던 수행자입니다.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에는 그의 이런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김상현/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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