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집] 제1편 1장 종교(宗敎)의 목표(目標) 01. 영원(永遠)한 행복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삼대 종교의 하나라고 일컬어집니다.

이들 종교는 저마다 내세우는 교조(敎祖)가 다르므로 그 내용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읍니다. 그러나 그 교조와 내용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종교가 갖는 궁극적인 목표는 다 같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서울로 간다고 할 때에 북쪽에서 가든 남쪽에서 가든 바다에서 가든 육지에서 가든 비록 그 방향과 수단은 제각기 다르지만 서울에 간다고 하는 근본 목표는 다 같듯이, 종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어느 종교에서나 다 같습니다.

그러면 그 공통되는 종교의 목표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相對)적이고 유한(有限)한 세계에서부터 절대(絶對)적이고 무한(無限)한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같이, 태어남과 죽음이 있어 고통과 번뇌가 가득찬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에는 오히려 괴로움만 더해 줄 뿐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는 이 고통의 현실을 벗어난 자유의 세계로서 영원한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이고 무한한 이 세계 곧 생멸의 피안(此岸)에서부터 절대적이고 무한한 저 세계, 곧 해
탈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가야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근본 목표인 것입니다. 이렇듯 종교의 근본 목표인 영원한 행복은 바로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 욕망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은 이 유한한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각 종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에 들어가도록 그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불교에서는 그 궁극의 목표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에 대하여 여러 경전에서도 말씀하셨지만, 특히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離一切苦(이일체고) 모든 괴로움을 버리고
得究竟樂(득구경락) 구경의 즐거움을 얻는다.

이 말씀은 모든 괴로움을 다 버리고 구경(究竟)의 즐거움, 곧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곧 상대적이고 유한한 생멸(生滅)세계를 떠나 절대적이고 무한한 해탈(解脫)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반의 종교가 갖는 목표와 꼭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대’와 ‘유한’의 행멸세계를 버리고, ‘절대’와 ‘무한’의 자유세계에 가려고 노력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에 누가 서울에 간다고 한다면 왜 가는지 까닭부터 알고 가야지 무조건 서
울만 가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행동일 터이요, 그 사람은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터 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이고 무한한 자유세계로 가려고 한다면 먼저 왜 가려고 하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부터 아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세상에는 천지만물이 있고, 인간은 그 모든 생물과 무생물 중에서 으뜸가는 존재라 하여 만물의 영장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의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인간은 대체로 삶을 값어치있게 만들기 위하여 저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노력합니다. 더러 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사람도 있고 또 사람마다 목표하는 바가 다르기도 하지만, 인간이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뭇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현실적 삶의 모습이 얼마나 행복과 가까운지는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간이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심지어 산다는 것 조차도 짐스러울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三界火宅(삼계화택)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四生苦海(사생고해) 사생이 괴로움의 바다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삼계(三界)란 중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를 일컫는 말인데 이것을 불타는 집이라고 하고, 사생(四生)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일컫는 말인데 그 전체가 괴로움의 바다라고 하였습니다. 곧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십니다. 인생이란 이와 같이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 고생만 하다가 끝내 죽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살다가 때에 따라서는 좋은 일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것일 뿐, 인생을 전체로서 볼 때는 괴로움의 연속이랄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고, 그토록 괴로운 삶이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하여 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덜 고생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시작 된 이래로 사람들은 이 고생스러운 삶 가운데서 좀 더 행복하게 살 길을 찾아 여러가지 방법을 모색 해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고 유한하여서 모순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모순의 세계란 곧 투쟁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고 하여도 곧 종말이 오고야 맙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원한 행복을 생각하게 되고, 그 영원한 행복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을 추구하는 데에서부터 인간의 종교가 성립된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세계에서는 이룰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피안의 세계 곧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를 구상하여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종교의 근본 취지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듯이, 모든 사람이 저 먼 피안의 세계에서만 영원한 행복을 추구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추구하는 행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
면빌어 먹는 거지에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면, 때가 되어 밥 한끼 잘 얻어먹는 것이 행복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거지로서는 밥 한 끼 잘 얻어 먹으면 그것으로 다른 모든 시름은 다 잊고 만족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사람들은 때와 장소와 처지에 따라 서로 다른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대개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것은 거지가 밥 한끼 잘 얻어먹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영원한 행복이란 공연한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수천년의 인류 역사가 지나가는 동안에 세속적인 기준으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는 몇 사람의 경우를 보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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