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집] 영원(永遠)한 자유(自由)

가야산 법석(法席)을 펴며

이처럼 무더운 삼복 더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이 먼 곳을 찾아와서 이러한 수련법회를 가지는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고 또 바르게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불법(佛法)은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우리들 자성(自性)을 깨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말과 문자의 이해와 터득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학생들을
모아놓고 말과 문자로써 불교를 설명하는 까닭은, 비록 말과 문자를 아는 것만으로 바른 불법을 얻을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하여도, 불법을 알리려면 먼저 그 말과 문자를 가지고 설명하는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불법 그 자체는 결코 말과 문자에 매이지 아니한 것이나, 다만 말과 문자를 빌어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하여야 자성을 깨칠 수 있는지를 설명할 뿐인 것으로서, 지금 설법하고 있는 이 말과 문자가 실지의 불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하늘에 있는 달을 보라고 할 때에 그냥 말로만 “달을 보라” 하면 사람들은 잘 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을 듣고 곧바로 달을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달을 보라”고 말함과 동시에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주면 많은 사람들이 좀더 쉽게 고개를 들어 달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럴 때에 손가락만 쳐다보고 달은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볼 뿐 영원토록 달은 보지 못하고 만다는 것이다.

불법(佛法), 곧,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팔만사천 법문(法門)도 따지고 보면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말과 문자를 좇느라고 그에 얽매이는 일이 없이 궁극의 목표인 저 달, 곧, 불법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문자로도 나타낼 수 없는 불법(佛法)을 바로 알 수 있겠읍니까? 그것은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우리의 자성(自性)을 바로 깨침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러면 또 그 자성은 어떻게 하여야만 바로 깨칠 수 있는가? 그것은 선정(禪定)을 닦음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선정을 닦아야 하는가? 선정을 닦는 데는 화두참구(話頭參究)가 가장 빠른 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성취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화두참구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니 이 법문을 들을 때에도 화두를 잘 챙겨서 화두 가운데서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화두를 내버리고 말만 들으면 이 법회를 하는 근본 뜻과는 완전히 어긋나게 됩니다.

지금 여기 모인 대중 가운데는 화두참구를 잘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나 또 안다 하여도 마음에 간직하여 화두참구를 부지런히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모두들 고생고생하며 이 무더운 날 부처님 앞에서 삼천 배(拜)를 했읍니다. 그 고생이 헛되지 않도록 화두를 가지지 아니한 사람들을 위해서 화두를 말할 터이니 앞으로 열심히 참구해 봅시다.

여가시불(如何是佛)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마삼근(麻三斤) 삼 서근이니라.

운문종(雲門宗)의 동산(洞山) 수초(守初)선사는 크게 깨친 대 선지식이었읍니다. 그에게 어떤 스님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하니 수초 큰스님은 “삼 서근”이라고 대답하였읍니다. 이 대답이 퍽이나 엉뚱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 이것이 화두(話頭)입니다.

우리 대중은 이 법문을 들으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물었는 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하며, 의심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의심하는 것이 바로 화두참구하는 법입니다.

이 화두에서 큰스님이 ‘삼 서근’ 이라고 대답한 말씀은 말 자체에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깊숙한 곳에 그 뜻이 있읍니다. 그것을 언외현지(言外玄旨)라 하니, 곧, 말 밖에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
밖의 깊은 뜻, 곧, ‘삼 서근’이라고 대답한 그 근본 뜻을 바로 참구하여야만 불법(佛法)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 서근’이라고 한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지, 그러지 않고 이것을 그냥 놓아 둔 채로 라면 아무리 팔만 대장경을 다 외운다 하여도 그것은 외도(外道)가 될뿐입니다.

이미 화두를 가진 사람은 그 화두를 참구하고,화두를 미처 배우지 아니한 사람은 지금 일러준 이 ‘삼 서근’이라는 화두를 참구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이를 테면 법문을 들을 때나 좌선을 할 때나 밖에 나가 돌아다닐 때나 또는 다른 사람과 말할 때나 늘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했는가?’ 하고 의심하는 화두참구가 우리 생활의 생명선이 되어야 합니다. 화두참구를 마음속으로 계속하면서 법문을 들어야만 자성을 바로 깨칠 수 있읍니다. 그저 말만 따라가서는 절대로 불법을 바로 알 수 없으며 자성을 바로 깨칠수 없습니다.

화두참구를 부지런히 하면서 이 법문을 잘 들어주길 바랍니다.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

                                       불기 2512년(1968년) 8월

                                               해인사(海印寺) 대적광전(大寂光殿)

性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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