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는 여래장에 의지한다.
“세존이시여,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래장이기 때문에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本際]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생사를 설하는 것은 잘 설하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세존이시여,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모든 감각 기관이 사라지고[諸受根沒] 이어서 일어나지 않았던 감각 기관이 일어나는 것[次第不受根起]을 생사라고 이름합니다. 세존이시여, 죽음과 태어남의 이 두 법은 여래장입니다. 세간의 언어로 설하기에 죽음이 있고 태어남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감각 기관이 부서지는 것이며[死者謂根壞], 태어남은 새로 감각 기관이 일어나는 것[生者新諸根起]입니다.
여래장은 태어남이 있으며 죽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래장은 함이 있는 현실[有爲相]을 떠나 있습니다. 여래장은 상주하여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래장은 의지하는 바[是依]가 되며, 지니는 바[是持]가 되며, 건립하는 바[是建立]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불법에 떠남도 없으며 끊어짐도 없고, 벗어남도 없고 다름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끊어지고, 벗어나며, 달라지고, 외화(外化)되는 함이 있는 법이 의지하고 건립하는 것은 여래장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여래장이 없다면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이 열반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여섯 가지 의식[六識]과 의식 작용 그 자체로서의 마음[心法] -이 일곱 가지- 은 찰나적인 존재여서 머무르지 않으며, 갖가지 괴로움을 심지 못하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이 열반을 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아(娥)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며, 생명도 아니며, 다른 사람도 아닙니다. 여래장은 몸이 있다고 보는 견해에 떨어진 중생, 전도된 중생, 공으로 말미암아 혼돈에 빠진 중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