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산과 같고 물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산심수심(山心水心)이 될 때 내 마음 그대로가 자연에 순응된 가장 편안한 마음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산수 속에서 계절을 느끼고 살다 보면 산과 물이 그렇게도 고마우며 절친해짐을 느낀다. 산수는 이 세상의 가장 순수한 예술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다.
또 산이 있으면 계곡이 있고 계곡엔 언제나 물이 흐른다. 그리고 철따라 꽃이 핀다. 무릉도원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셋이 잘 어울려지면 자연이 빚어내는 최고의 예술인 무릉도원이지 싶다. 물 흐르고 꽃이 피는 미묘한 작용을 산은 끊임없이 나타내 준다. 특히 우리나라의 산은 사계의 정서가 뚜렷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철마다 수많은 회포를 자아내게 한다. 우리 같은 스님들이 출가를 하여 절에 와 사는 것을 산에 들어갔다 하여 입산(入山)이라 말하는 것처럼 산은 또한 수도처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산에 와서 살면 누구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도인처럼 살아진다.
세속의 복잡한 경계를 떠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도인풍이 몸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산에 오래 살면 자기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사고방식도 달라지고 인생을 음미하는 맛도 세속과는 달라진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산은 자연의 무한한 깊이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무한한 삶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해 주는 부처와 같은 진리의 교육자이기도 하다. 산을 의지해 살면 인생의 영욕이 쉬어지며 세상의 시비가 쉬어진다. 애증도 사라지고 욕망과 분노도 사라져 산처럼 아무 할 말이 없어진 자신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산은 세상에 대한 불만을 말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라 하고 서운하고 못마땅한 일에 대한 것들을 어서 체념하라고 가르친다. 항상 은인자중의 미덕을 암시해 주는 산은 그러나 물의 순리를 가지고 물처럼 살라고 가르쳐 주기도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여 “가장 좋은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아래로 흘러가면서 순리에 따라 만물을 적셔 주는 물의 공덕이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본받을 만한 것이라는 말이다. 또 솟아나는 샘물처럼 마음을 쓰라는 말도 있다. 지혜로운 생각, 자비로운 생각이 샘물처럼 솟아나 남에게 적셔주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생의 진선진미(盡善盡美)한 최상의 공덕이요 정신적 가치일 것이다.
어떤 때는 계곡에 들어가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면서 하염없는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물을 통한 사색도 수분이 되어 내 마음 곳곳을 적셔준다는 감상을 자주 느낀다. 청산리 벽계수의 맑은 이미지에 순수를 향한 간절한 소망 같은 것이 정연기(淨緣起)가 되어 일어날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의식보다는 관조자의 눈이 되어 세상을 무심히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골짜기의 물이 그냥 흐를 뿐이듯이 생각도 그냥 흘러 가다가 무심의 둑을 만나 이런 저런 사념을 빠져나오면 물은 절로, 절로, 그렇게, 그렇게,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 산은 가만히 있고 물은 흘러가듯이 세상은 자연의 이법에 의해 저절로 되어가는 것이다. 조선조 중기 문신 김인후의 시조처럼 산절로 수절로의 여운을 생각해 본다.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그 중에 절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절로 절로 하리라.”
생각해 보면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시간의 진행을 따라 부표처럼 떠서 움직이는 것이 인생사의 사연이 아니겠는가? 숱한 애환과 때로는 분노로 점철된 생애를 미련 없이 던져버려야 할 숙명 아닌 숙명 앞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도를 향한 무심을 품고 산을 보고 물을 들을 뿐이다.
“청산은 티끌 밖의 모습이요(靑山塵外相)
밝은 달은 선정 속의 마음이네(明月定中心)
꽃을 보고 색의 공함을 깨닫고(看火悟色空)
새소리를 들으며 듣는 성품을 밝힌다.(聽鳥明聞性)
어느 노스님으로부터 들은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무심(無心)으로써 유심(有心)을 대하고 무정(無情)으로써 유정(有情)을 대하라.”
그리고 유명한 선시의 한 구절을 다시 한 번 중얼거려 본다.
落花有意隨流水 떨어진 꽃잎은 뜻이 있어 흐르는 물을 따라가는데
流水無心送落花 흘러가는 물은 아무 생각 없이 꽃잎을 보내 주누나.
산골짜기 계곡물에 떨어진 꽃잎이 떠 흘러가는 것을 보고 지은 시구이다.
인생이 꽃잎이라면 이 세상은 흐르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4월 제1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