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격려하고 칭찬하라 그리고 공양하라

격려하고 칭찬하라 그리고 공양하라

-지광스님-

우리의 현실은 불완전하다.

모두가 불성을 지녔다 하지만 나도 남도 모두 부족하다.

말도 부족하고 생각도 행동도 모두 부족하다.

내가 남에게 하는 말을 생각해 보라.

남을 위한 쓸만한 말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남을 비난하고 비방하고 비판하는 데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우리는 좀 더 어른스러워져야 한다.

부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부처님과 가까워지고 부처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배우면 점차 완전에 가까워진다.

말과 생각과 행동이 법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 주변이 온통 부족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에 그들로부터 듣는 말, 그들이 나에 대해 하는 생각 행동 등이 모두 고통이다.

온통 비난이고 이기심에 가득 찬 악행과 그릇된 생각들 투성이다.

내가 성장하면 할수록 그들의 비방은 커지고 나의 능력이 자라면 자랄수록 시기와 질투도 커진다.

흔히들 도가 높으면 마가 성하다는 얘기처럼 정진하면 정진할수록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주변의 저격병들로 인해 고통이 더해진다.

부처님은 어떠하셨는가? 바라문들과 수많은 어리석은 무리들의 비방과 공격을 감내하시면서 중생제도의 길을 가셨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강조하시면서, 무명의 어리석은 무리들을 깨우치시면서 고행의 길을 가셨다.

우리들 역시 자신을 끝없이 승화시키는 길이 결국 부처의 길이요 결국 그 길이 무량중생들의 제도를 위한 길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부처의 길이 깊은 곳에서 나 혼자만 갈고 닦는다고 되는 길인가? 나 자신 갈고 닦는 길이 결국 보살의 길이요 부처의 길이다.

나를 갈고 닦는 길이 따로 있고 중생들을 제도하는 길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의 길을 가신 것도 중생을 위한 버림의 길이요 무량중생의 제도를 위해 전법의 길을 떠나신 것도 버림의 길이었다.

결국 모든 수행의 길은 버림을 통해있으며 나 홀로 있을 때는 명상 속에 참선 속에 기도 속에 번뇌를 버리고, 대중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 닦은 마음을 실천을 통해 베푸는 것이다.

모든 불행은 이기심 때문이기에 우리의 삶은 내가 남을 대할 때나 남이 내개 향할 때 한결 같이 아상을 내려놓는 삶이어야 한다.

남을 대할 때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질책하기보다는 그들을 부추겨주고 칭찬하고 공양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또 남들이 나에게 비난과 질책과 악행을 가하더라도 그를 선물로 알고 나의 이기심을 녹이는 경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상대방과 하나가 되고 무아심이 되는 길은 그 어떤 비난도 웃어넘기고 어떠한 모함에도 감사하는 것이다.

타인의 좁은 마음에 개의치 않는 길, ‘항상 내 잘못이다’, ‘내 책임이다’ 스스로 수용하는 길이 참수행의 길이다.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많은 비판을 감수해야만 하는 정신적 심리적 거인은 모두를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인다.

참다운 수행자는 심리적 도피구를 만들지 않는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임을 잘 알기에 그들을 제도하지 못한 나 자신을 책망할지언정 그들의 싸움을 거부한다.

참수행자는 어떤 비난에 대해서도 웃으며 답하는 사람들이며 스스로의 부족함으로 나에게 원한을 지닌 영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영가들에게도 용서와 참회를 구한다.

어떠한 영가들도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려들지 않기에 ‘나의 무지와 이기심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음을 참회 한다’고 기도드리며 용서를 구한다.

참수행자들이여! 우리들은 하루 종일 타인과 살고 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이기심이란 악마를 녹여라.

상대방을 위해 모두를 위해 친절을 더하라.

칭찬을 아끼지 말라.

베풀어라.

그들을 부추겨라.

모두를 존경하고 나로 인해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라.

타인을 격려하고 모두를 위해 나를 불태우는 등불이 되라.

광명이 되라.

그 길 가운데 영원한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 하시리라.

월호스님─’해주세요’ 말고 ‘하겠습니다’ 기도해야 이뤄진다

‘해주세요’ 말고 ‘하겠습니다’ 기도해야 이뤄진다

-월호스님-

쌍계사 승가대학 강사 월호 스님(행불선원장)은 7월 7일 통도사 극락암 분원 원오사에서 ‘삶은 판타지다’를 주제로 법문을 진행했다.

스님은 보시공양으로 복덕을 쌓는 바른 수행을 실천해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는 참된 불자의 길을 걷자고 설했다.

#부처님 ‘가장 높은 절대적 깨달음’ 얻은 분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받을 만한 분이시며, 바르게 모두 아시는 분이시며, 지혜와 실천을 구족하는 분이시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이시며, 세상을 잘 아는 분이시며, 가장 높은 분이시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이시며, 신과 인간의 스승이시며, 깨달으신 분이시며, 가장 존귀한 분이시다.” (법구경) 삼보에 대한 명상 초기경전인 (법구경) 중 삼보에 대한 명상 가운데 부처님을 칭송하는 열 가지 이름에 관한 부분입니다.

여래십호란 부처님을 일컫는 10가지 이름으로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邊知), 명행족(明行足 ),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세존(佛世尊) 이상 10가지입니다.

‘응공’은 응수공양(應受供養)에서 온 말로 깨달음을 얻었기에 마땅히 공양을 받아야 될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응공은 산스크리트어로 ‘아르하뜨(Arhat)’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아라한이나 나한이라는 말과 뜻을 같이 합니다.

‘정변지’는 우주 만물의 모든 이치를 완전하고 바르게 깨달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명행족’은 깨달음의 지혜와 그 실천을 함께 갖추신 분, ‘선서’는 고통스런 생사윤회의 강을 건너가신 분을 뜻합니다.

‘세간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완전하게 이해하신 분이며, ‘무상사’는 그 어떤 것보다 위에 계시는 분입니다.

‘조어장부’는 대자대비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신 분, ‘천인사’는 하늘의 신과 중생의 스승을 의미하고, ‘불세존’은 불은 깨달은 사람, 세존은 중생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결국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반야심경) 중 ‘아뇩다라삼막삼보리’는 부처님의 두 가지 이름인 무상사와 정변지를 뜻하는 것으로 부처님이 얻으신 최상의 절대적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부처님을 아뇩다라 삼막삼보리 따타가타, 즉 무상정등각 여래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역시 최상의 절대적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쓰이는 등 부처님에 대한 최상의 존경을 나타내는 여러 표현입니다.

삼보란 무엇일까요.

‘불법승’은 진정한 보배입니다.

세속의 보물인 다이아몬드, 루비, 진주 등이 보배가 아니라, 붓다(Buddha, 부처님), 달마(Dharma, 가르침), 상가(Sangha, 스님)가 최상의 다이아몬드 귀걸이이며 루비 목걸이이고 진주 반지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받드는 불자라면 부처님이라는 목걸이를 하고, 가르침의 귀걸이를 걸고, 부처님의 십대제자를 손에 지니고 다니는 셈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한 번이라도 부처님이라는 말을 듣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입니다.

지구상에는 65억의 인구가 사는데 그 중에는 평생을 살아도 부처님 이름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지요.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종교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을 섬기는 종교이고, 또 하나는 신이 섬기는 종교입니다.

전자는 종을 만드는 종교이고, 후자는 주인을 만드는 종교겠지요.

세상에 신을 믿는 사람은 많지만 신들의 스승인 부 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종교는 단 하나 불교 뿐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신을 섬기지만, 불교는 신들이 섬기는 종교라는 설명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법당에서 불보살과 부처님의 제자 아라한은 상단에 모셔져 있고, 신은 중단, 영가는 하단에 모시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생전에 마음공부를 잘해 번뇌에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신들보다 더 높은 상단에 오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영가단에서 신중단, 그리고 신중단에서 상단으로 오를 수 있을까요.

부처님 생전의 일화에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 어느 마을에 지독하게 가난해 이름마저 극빈자라 불리는 사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의 마을에 부처님께서 머물며 설법을 하고 있었는데,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도반에게도 권선한다면 복덕이 생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고을의 관리들은 모두에게 공양을 올릴 스님의 명부를 작성하는 등 보시공양을 실천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때 가난한 극빈자도 단 한명의 스님에게 내일 아침 공양을 올릴 것을 약속하고, 돈을 구하기 위해 하루 동안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평소 생계에 전전긍긍하며 일할 때와는 다르게, 덕 높으신 스님께 공양을 올리고 그 공덕으로 복을 짓을 생각에 온통 환희심으로 가득했겠지요.

다음 날 관리를 찾아가 스님의 처소를 묻자, 모든 스님에게 백성들이 이미 공양을 올렸다고 말합니다.

실망하는 극빈자에게 단 한 분이 아직 공양을 받지 않았다며, 부처님에게 안내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모든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자를 최우선으로 배려하기에 극빈자는 정성껏 지은 공양물을 부처님께 바쳤습니다.

부처님은 공양을 받은 후 극빈자에게 축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대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일들이 속히 이뤄지기를, 보름달이 가득 차듯이 그대의 바람이 가득 차기를, 그대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일들이 속이 이뤄지기를, 소원을 빌면 이뤄지는 마니보주처럼, 그대의 소원이 속히 이뤄지기를, 소원성취하소서.” 훗날 극빈자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보시의 공덕으로 나라의 고위급 관직은 물론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 설화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복덕이 생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 공양을 올릴 뿐 도반에게 권하지 않으면 재복은 있지만 인복은 얻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남에게는 시주하라고 권하면서 정작 자신은 시주하지 않는 사람은 인복은 있지만 재복은 없다고 합니다.

물론 이도 저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인복도 재복도 따를 수 없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많은 불자들은 부처님 전에 작은 공양을 올리면서 너무 많은 소원을 바라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봅시다.

행불선원에서는 부처님 전에 작은 저금통을 놓고 ‘부처님 용돈 쓰세요’라고 적어놓았습니다.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번 생에서 많은 보시를 해야 다음 생에 부자로 살 수 있고, 그저 ‘부자 되게 해주세요’라며 소원을 구걸하는 마음을 연습하면 다음 생에 극빈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노력하는 ‘인’과 부처님의 가피 ‘연’이 만나면 소원 성취 우리는 인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인연은 원인을 의미하는 말로, 인(因)은 결과를 낳지 위한 내적인 직접 원인을 뜻하고, 연(緣)은 이를 돕는 외적, 간접적인 원인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양자를 합쳐 원인의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지요.

부처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써 생겨나고 인연으로써 소멸하는 연기의 이법을 깨달으셨다고 합니다.

(아함경)에서는 인간이 미망(迷妄)과 고통의 존재임을 12인연으로써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어떠한 발원을 세웠을 때 인은 나의 노력, 연은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이 두 가지가 만나야 발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인이 충실해도 연이 부실하면 과가 부실하고, 연이 충실해도 인이 부실하면 과가 부실합니다.

인과 연이 모두 충실해야 과가 충실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인연법입니다.

부처되게 해 달라며 소원 구걸하는 연습하면 다음 생에 극빈자가 되고 만다.

신과 우리는 불법(佛法) 배우는 도반, 굳이 신에게 종노릇 할 필요 있나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할 때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부처님께 기도만 한다면 이뤄지지 않듯,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로 건강하게 지켜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연이 조화를 이루면 뜻이 이뤄집니다.

그만큼 바른 신행생활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를 할 때는 그 속에 발원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 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앞서 말한 구걸형 기도이고, “~하겠습니다.”는 발원형 기도입니다.

그렇게 바르게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으로 나투신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흔히 부처님은 ‘법신불’이라고 해, 마음 깊이 참나 자리에 계셔서 색깔이나 모습, 음성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신불만 있다면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지 못해, 법당 앞에 풀의 키가 한자나 자랄 만큼 발길이 뚝 끊기겠지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나투신 부처님이 바로 ‘보신불’입니다.

바로 아미타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님이 그러한데요.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들은 ‘보신불’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심안이 열렸거나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꿈속에서도 부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나, 텅빈 마음자리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신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신이 나를 대신해서 밥을 먹어줄 수도, 잠을 잘 수도, 법문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지금 이 모습도 나의 작품일 뿐이며, 그래서 지금의 내 모습과 미래는 내가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고정불변의 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여기 법당에 앉아 저와 마주하고 있는 행위가 바로 여러분입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꾸면 여러분의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불교는 절대 숙명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 뿐 아니라 신들의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신과 우리는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도반이니, 굳이 신에게 종노릇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교훈적입니다.

그런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으로 이웃종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단적으로 비교해봅시다.

이웃종교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은 신만이 아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은 인과설에 따른 당연한 이치입니다.

즉, 고정된 나는 없기에 어떠한 나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떠한 나를 만들 것인가는 내가 만들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공(共) 사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텅 비어있기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메시지입니다.

이때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는 내가 선택해 스스로 채워나가는, 내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즉, 무아설의 핵심 이론입니다.

성불(成佛)은 행불(行佛)로부터 바로 여기에서 자신의 주인이 되십시오.

우리의 삶은 한 순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더 멋지고 아름답게 변하기에 우리의 삶은 판타지입니다.

서암스님─마음의 자리

마음의 자리

-서암스님-

옛날에는 대의삼장이라고 하는 이는 공부를 많이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훤히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나를 욕하면 나를 욕하는구나,

무슨 근심이 있으면 어떤 근심을 하는구나 하고 그 마음을

환하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혜충국사가 그 사람이 그런 소리로 모든 사람을

어지럽히니 바로 잡아주어야 되겠다싶어서 찾아와서는

‘그대가 남의 마음을 훤히 안다고 하니 내 마음도 한 번

알아봐라’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 점잖은 스님이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면,

올 때 물가에서 말, 소, 개, 당나귀 이런 것들이 어울려

노는 것을 보았으니 그곳에 생각을 던졌습니다.

그러니까 대의삼장이 확연히 마음을 알아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을 저 도리천이나 하늘세계에 던졌더니

대의삼장은 ‘아이고 스님, 참 훌륭하십니다.’하면서

그 마음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일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고향,

말하자면 희노애락 상념이 떨어진 그 마음자리에다

마음을 딱 둬 버렸습니다.

그러자 대의삼장이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으니

당황합니다.

온갖 신통력으로 저 천상세계를 다 뒤지고 지옥을 다

뒤지고 삼계육도를 다 헤매도 눈 앞에 있는 혜충국사 마음이

있는 자리를 못 찾았던 것이지요.

보통 사람은 상념(想念)의 세계에 마음을 쓰니 그것을 모두

알 수 있지만 빛도 모양도 냄새도 없는 본래 마음자리에

갖다 놓으니 아무리 신통력이 있다 해도 어떻게 상념으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슬플 때는 슬픈 생각에 마음이 가기 때문에 귀신이 보고

다 알 수 있지만 빛도 모양도 냄새도 없는 본래 자리에 딱

놓아두면 찾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요.

혜충국사는 당황하는 대의삼장에게 ‘반딧불 같은 지혜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현혹하느냐’고 호령을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잘못을 깨우친 대의삼장은 이렇게 해서 바른

마음공부에 들어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꽃은 어느 누가 봐도 꽃이지만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

보는 것하고 눈뜨고 깨달은 사람이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마치 근심이 많은 사람은 꽃을 보고 눈물을 짓고,

근심이 없고 마음이 화평한 사람은 꽃을 보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러니까 꽃 자체가 뭐 슬프고 괴로운 게 아닌데,

자기의 색안경, 자기의 경계에 따라서 그렇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대의삼장은 비록 모든 중생의 마음은 다 알지만 본래 마음자리를

밝히지 못한 까닭에 본래 고향에 던져진 마음을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모태 안에 들어선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2살 3살 때도 기억 못해요.

아주 영리한 사람이 아니면 모태의 기억을 못하거든요.

그러나 딱 앉아 참선을 하다 보면 어머니 배 안에 있던 기억,

3살 4살 때 까맣게 잊었던 생각도 떠오릅니다.

그것은 보통 때는 보이지 않던 먼지가 아침에 태양빛이

비치면 바글바글하게 다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태양빛이 자석처럼 그 먼지를 끌어온 것은 아니거든요.

다만 밝은 빛이 비추니까 먼지가 보일 뿐이듯 우리가 참선을

하여 마음을 밝히면 지난 시절 까마득히 잊었던 일까지

다 떠올라 생각나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한 단계 넘어서면 생각이 가라앉으면서 영적인

능력이 생겨, 가만히 앉아서도 수천 리 밖의 일도 알고 과거

현재 미래를 훤히 알게 되지요.

그러나 그런 것을 아는 것이 참선 공부가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 단계에 집착하지 않고 넘어가면 참으로 완전히 조용하게

희노애락이 끊어지고 본래 안심입명한 자리를 발견하게

되지요.

공기를 깨끗이 하면 태양빛이 아무리 비추어도 먼지가

안 보이는 경우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태양빛이 먼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밝은

빛이 먼지를 보이게 했을 뿐이기 때문이지요.

세상을 살아가는 데 ‘내가 세상을 굴리느냐, 세상에 내가

굴림을 당하느냐’하는 그 생활 태도가 범부와 성인의

차이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든 환경의 지배를 받으면서 누가 웃기면

웃고, 누가 부아를 돋우면 부아를 내고, 이렇게 지배를

받으면서 고통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는 어떠한 경계라도 상관이 없는

물들지 않는 자기를 구사한다 그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용히 앉아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다만 10분이라도 앉아서 자기 생각을 딱 집중하고 참선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면 그 참선하는 찰나부터 자기의 안정된 마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1분 동안 하면 1분동안 하는 것만큼, 10분 하면

10분하는 것만큼, 1시간 하면 1시간 하는 것만큼 하기 전과는

자기인생이 다른것이 스스로 느껴집니다.

마치 밥을 한 숟가락 먹으면 한 숟가락 먹은 만큼 배부르고

두 숟가락 먹으면 두 숟가락 먹은 만큼 배부르다가 끝내 한

그릇 다 먹으면 배가 다 부른 것처럼 우리가 어느 단계까지

수행을 쌓아 올릴 때 큰 영향럭이 생겨 어느 순간에 이르면

잠시만 해도 그 이치를 대번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감정이 생긴다든지 무슨 생각이 극도로 달릴 때

잠시라도 가만히 앉아서 마음의 뿌리를 돌이켜 보면

그 불이 사그러집니다.

타는 불에 찬물 끼얹듯이 우리의 그 타는 열병이 시원한

참선의 물로 싹 녹아집니다.

그게 바로 법열이고 희열이지요.

그것은 해 보시면 즉각 느껴집니다.

그렇게 해서 내 인생이 차츰 차츰 달라지는 것이지요.

영리한 이들은 물론 한번에 대번 깨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오래도록 해서 자꾸 쌓으면 모두 그렇게 깨치게

됩니다.

본래 마음을 밝히고 보면 바른 정법을 알고 그것에 따라

살게 되니, 우리 모두 이 이치에 따라 생활하도록 힘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