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스님─왜 범부의 삶에 얽매여 있나 자신이 부처임을___

“왜 범부의 삶에 얽매여 있나 자신이 부처임을 깨달아라” “집에 있거나 어디를 갈때나 항상 근본을 사유하십시오”

월산스님

(불국사 조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보고 주장자라고 하면 이치에 어긋나고 주장자가 아니라고 하면 또 사변에 어긋납니다.

자, 대중 가운데 어느분이든지 일어나서 이것이 무엇이라고 한말씀 해 주시오.

주장자라고 하면 이치에 어긋났고 주장자가 아니라고 하면 사변에 어긋났으니 무엇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대중들이 침묵을 하니 불가불 산승이 한마디 안할 수가 없습니다.

월락철해중 영생불멸이라 (月落鐵海中 永生不滅) 달이 철해 가운데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철해란 글자 그대로 철로 만들어진 바다란 말입니다.

그 철의 바다에 달이 떨어졌다는 것인 데 그 달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대천 세계를 비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 주장자를 설명한 것입니다.

주장자하고 하면 이치에 어긋났고 아니라고 한다면 사변에 어긋난 그것을 철의 바다에 떨어진 달을 설명한 것인 데 이것을 알아야 불교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불자님들은 불교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무엇이 불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누가 명쾌히 ‘불교는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실로 어려운 대답입니다.

평생 부처님 가르침을 연구하고 또 절에 다니면서 법문을 듣고 하는 것이 다 불교인 데 막상 불교가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그럼 여기서 부처님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고해의 중생들에게 위없이 큰 법, 우주의 모든 것을 삼키는 진리를 가르치려고 이 사바세계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처음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부처님은 한손으로는 하늘을 가르키고 또 한손으로는 땅을 가르치며 눈으로는 사방을 둘러 보셨습니다.

그리고 사방으로 일곱발자국을 걸으시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 위나 땅 아래에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에는 오직 나 홀로 존귀할 뿐이라는 이 제일의 소리는 대단히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불교를 아는 첫 길이 바로 이 말씀 속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것은 곧 불교의 대의이기도 합니다.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나를 알아야 불교를 알고 불교를 알면 나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또 무엇을 설하셨습니까.

아함경을 12년간 설하셨고 방등경을 8년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21년간은 반야경을 설하셨고 나머지 8년간은 법화경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49년간을 설하신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진리를 49년간 이런 저런 경으로 설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책을 써서 설하신 것은 아니고 그 법문의 내용을 묶은 것이 경이 됐을 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출가 이전부터 사유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그 법을 가르쳤습니다.

출가후에도 설산에서 사유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유가 곧 참선입니다.

자, 이제 불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일평생 절에 다니면서 법문을 듣고 경을 배우고 했는데 불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을 못한다면 그런 창피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불법을 모르고 목숨이 떨어져 죽으면 허둥지둥 갈 곳 조차 모르게 됩니다.

죽은 후에 여러분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그 갈 곳을 아는 것.

그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도 닦으면 죽은 후에 갈 곳은 훤히 다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보입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에 집착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에 집착하지 않는 방법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사유법, 참선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유를 하면서 생노병사의 고통을 아셨고 사유를 통해 그 고통을 훌쩍 뛰어넘는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참선은 생각 하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잡스런 것을 마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단정히 하고 생각의 뿌리를 한 곳에 모으고 진리의 본체를 밝혀내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쉽지 않다면 차례차례 참선을 해 나가야죠.

집에서 부지런히 일하다가 가만히 앉아 생각하십시요.

무슨 생각이든지 하십시요.

조사들의 공안을 참구하며 화두공부를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방금 제가 여러분께 생각을 하는 것이 참선이다 했는 데 이제 그 생각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참선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단계입니다.

마음은 고요합니다.

아무런 소리도 없는 고요한 거리인데 거기서 온갖 생각을 일으키고 잡념을 일으켜 내는 것입니다.

본래 고요한 마음을 망상으로써 고통받게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 많고 고통이 많고 생각이 많은 사람은 부처님이 열번이 아니라 백번 나와도 제대로 교화받지 못합니다.

부처님은 마음을 고요히 하여 그 근본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고요히 앉아서 이렇게 쉽게 하는 공부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경을 많이 배우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바라보라니 이처럼 쉬운 공부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공부는 대단히 어려운 공부입니다.

앉아 있되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는 공부이며 고요하되 시끌벅적 마구니의 방해를 물리치는 공부입니다.

진리를 진리로 보지 않고 그 뿌리까지 뽑아 보는 공부인 데 겉에서 보는 범부의 눈에 비치듯 그렇게 쉬울 까닭이 있겠습니까.

참선은 근본을 파고 들어 가서 그 근본의 뿌리를 알아 내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어디서 왔느냐.

그 근본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알아 보는 이 공부를 참선이라고 말하고 자기를 알았다면 곧 그것을 부처의 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말해 자기가 부처임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수행의 대의요 기초입니다.

자신과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망상을 일으켜서, 자기 스스로가 모든 죄를 만들어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누가 안겨다 준 것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자신이 누구냐하는 문제는 실로 중요한 것입니다.

방금 말했듯이 부처인 자신이 왜 이 범부의 삶에 얽매여 있는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스스로가 부처임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번뇌와 망상의 쇠사슬을 묶어 범부의 삶에 얽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가 부처님을 깨닫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란 결론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는 근본을 알고 나면 모든 것이 환해 집니다.

그러니까 대중 여러분은 집에 있을 때나 차타고 어디 갈 때나 항상 고요히 근본이 무엇인가를 사유하십시요.

그러면 알아 집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는 것만 가리켰지 길가는 것은 자기가 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요.

마음을 고요히하여 자꾸자꾸 멀리멀리 가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그 길을 향해 뒤돌아 보지말고 자꾸자꾸 나아 가란 말입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데 있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받아야 합니다.

홀로 가는 길은 자칫 비뚤어진 곳으로 갈 수도 있으므로 바른 길로 인도해 줄 사람이 필요하면 그의 도움을 받아가며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 사람은 스승 일 수도 있고 도반일 수도 있고 형제 자매일 수도 있습니다.

선지식을 찾아 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선지식은 먼저 깨달아 진리를 아는 사람이니까요.

우리가 보통 친견한다고 하는 말을 쓰는 데 선지식을 찾아가 의논해 묻는 것이 친견입니다.

선지식은 어떻게 공부했으며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경지에 계시는지를 들어 나의 공부에 도움을 받는 것은 진리의 길을 빨리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마음을 닦고 또 부지런히 선지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진리의 묘체, 내가 무엇인가하는 고민이 확연히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소림굴에서 9년간 면벽좌선을 했습니다.

그것도 부처님을 등지고서 참선을 했는 데 그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달마대사가 등진 것은 부처님이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 그 가르침이었습니다.

부처님과 그 말씀을 등지는 까닭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또 달마대사는 열반에 들어 철관에 넣어져서 묻혔는 데 그는 철관을 뚫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 법력이 놀랍지요.

그런데 정작 우리가 놀라야 할 사실은 대사가 신발 한짝을 철관에 놓아두었다는 것입니다.

왜 신발 한짝은 들고 나오고 한짝은 남겨 놓았을까요.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대사가 열반한 뒤 3년후에 해체해 보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인데 시신은 없고 신짝하나만 덩그라니 놓여 있는 모습을 보고 그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달마대사의 행적은 그 자체가 무량한 설법입니다.

그 행적들의 의미를 찬찬히 들여다 보는 것도 큰 공부가 됩니다.

조사의 뜻을 알아내는 것은 간화선으로써 가능합니다.

팔만대장경을 다 공부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자신의 마음자리를 들여다 보면 달마의 행적이 갖는 의미도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발 한짝을 남겨 놓은 달마의 마음과 그 의미를 참구하는 나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 진리의 실상은 저절로 알게됩니다.

사유하는 자세 참선하는 삶을 유지해 나가며 자신이 부처임을 깨닫고 부처의 가르침을 자기화하려는 노력을 끊지 말아야 합니다.

문학가, 역사가, 또 무슨 기술자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들 딸이 많아도, 돈이 많아도, 벼슬이 높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한낱 범부의 삶을 벗어나지 못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나도 죽는다’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하십니까.

나는 안죽는다.

영원히 산다고 우겨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10년전의 내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이 다르듯이 10년후의 모습 또한 다를 것입니다.

변하고 또 변해가서 결국에는 무덤으로 가는 겁니다.

사람마다 빨리 죽고 늦게 죽는 차이가 있을 뿐 결국은 죽어가는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인간의 최대 관심사가 바로 이 문제일 것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업을 따라 갑니다.

극락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아는 분이 있습니까.

서쪽에 있지요.

동쪽이 아니라 서쪽에 극락세계 가려면 서쪽으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극락이 서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자꾸 자꾸 서쪽으로 나아갑시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부처님께서 ‘천상천하’라 하셨으니까 하늘을 쳐다볼 때는 높게 높게 보고 땅을 볼 때는 깊게 깊게 사방을 볼때는 멀리 멀리 보아야 합니다.

그런 큰 마음으로 ‘이 뭣꼬’하며 참선을 해야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서쪽으로 훨훨 나아가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마음을 닦으면 불법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불법을 알기위해서는 먼저 자기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 산승이 줄곧 불법이 무엇이냐를 말했으니까 이제 여러분께 불법이 뭔가를 답변해 드려야 겠군요.

자, 잘 들으시요.

내 말을 잘 들으시요.

“무엇이 불법의 고요하고 고요한 큰 바다냐 안동소주는 40도더라”

월산스님─月山禪師法語

月山禪師法語(月山門徒會)

-金佛不渡爐 금부처는 용광로를 지날 수 없고 木佛不渡火 나무부처는 불을 지날 수 없다 泥佛不渡水 또 진흙으로 지은 부처는 물을 지날 수 없다.

體露金風.

가을바람이 부니 온 천지가 그 모습을 드러내도다.

爐不鎔爐 화로는 화로를 녹이지 못하고, 火不燃火 불은 불을 태우지 못하며, 水不洗水 물은 물을 씻을 수 없느니라.

無縫塔 굴러다니는 돌을 하나 세워 이음새가 없는 탑 千江有水千江月 천강에 물이 있으니 천강에 달이 뜨고 萬里無雲萬里天 만리에 구름 걷히니 만리가 하늘이로다.

[日月은 東西에 걸리지 않는다] 부처님을 시해하려는 죄를 지은 데바달다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다.

부처님이 불쌍하게 여겨 아난존자를 보내 위로 하였다.

“그대는 지옥에서 견딜만 한가?” “나는 지옥에 있어도 즐겁다.

” 아난이 돌아와 부처님게 아뢰니 다시가 이렇게 묻도록 하였다.

“그대는 지옥에서 언제 나오겠는가?” “세존이 지옥에 올 때 내가 나갈 것이다.

” “세존은 삼계의 큰 스승인데 어찌 지옥에 들어올 이치가 있겠는가?” 이에 데바달다는 이렇게 대답하고 화탕속으로 들어갔다.

“세존이 지옥에 올 이치가 없다면 내가 어찌 지옥에서 나갈 이치가 있겠느냐?” 대중들은 이 법문을 알아듣겠는가? 극락과 지옥은 다 정토이니 법계의 성품이란 결국 마음이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무엇을 부처라 하고, 무엇을 지옥이라 하겠는가? 짚신이 곧 부처이니라.

神光不昧하니 萬古휘猷로다 入此門來인댄 莫存知解하라.

거룩한 빛이 어둡지 않아 만고에 환하구나.

이문안으로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옛날 상주 남장사에 나무하는 부목처사가 있었다.

늘 나무만 하는 것이 무료하고 고생스러워 절에 있는 노스님한테 가서 물었습니다.

“저는 도대체 전생에 무슨 업이 많아 이렇게 고생만 합니까? 어떻게 해야 노스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면 된다.

” “뭐라고요? 짚신이 곧 부처님이라고요?” 나무하는 부목처사는 짚신이 곧 부처라는 말이 화두가 되어 오매불망 그것을 참구했다.

나무를 하면서도 “짚신이 佛이라” 참외밭을 가꾸면서도 “짚신이 佛이라” 하고 일념으로 의심을 했다.

어느 날 이처사는 다 떨어진 짚신을 불에 태우다가 깨달았다.

부목은 좋아라 하면서 노 스님을 찾아가 아뢰었다.

“스님, 짚신이 시불이라 하더니 정말로 짚신이 부처이구먼요.

” “이사람아, 짚신시불이 아니라 즉심시불일세.

” “스님은 즉심시불 하세요.

저는 짚신시불입니다.

“부목처사는 그날부터 나무를 하러가거나 참외밭을 매거나 항상 콧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살았다.

[다투면 부족하고 사양하면 남느니라.

]山色古今同 저산의 푸른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人心朝夕變 시시분별에 얽힌 사람의 마음은 아침저녁이 다르도다.

운거산에서 크게 선풍을 진작키던 운거도응(雲居道膺)선사를 흠모해 한 신도가 찾아 왔다.

그 신도는 스님 문하의 수천대중을 공양하기로 하고 떡을 해왔다.

이 신도는 공양을 올리기전에 운거스님 문하에서 배울 것이 많을 것으로 기대하고 한 수행승에게 물었다.

“저희집에 솥이 하나 있는데 평소에 떡을 찌면 셋이 먹기에는 부족하나, 천 사람이 먹으면 남으니 스님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질문을 받은 스님이 우물쭈물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마침 옆으로 지나가던 운거화상이 얼른 이렇게 알려주었다.

“다투면 부족하고 사양하면 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