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도성제 – 팔정도 그러면 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 길은 부처님 자신이 발견하여 걸어갔던 길로서 ‘여덟가지 거룩한 길’ 팔정도입니다. 팔정도는 깨달음 이후의 부처님의 삶을 표현한 것이며 동시에 깨달음을 이루려는 사람이 따라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비밀스러운 길이 아닙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그리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지식이 많거나 적거나 그 누구나 갈 수 있는 보편적인 중도(中道)의 길입니다. 첫째,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똑바로 인식하고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의 참 모습을 보는 것은 부처님의 연기의 진리를 통해 세상을 바로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둘째, 바른 생각(正思)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진리를 통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지려면 그 진리로 항상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향하여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마음을 모으는 것을 정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연인이 서로 연모하고 사랑하듯이, 마음이 오로지 진리를 향해 모으고, 늘 진리를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에 대한 그리움이란 진리를 내 안에 품겠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그리움과 열정이 자신을 꽉 채운다면 다른 생각이 들어올 수 없게 됩니다. 셋째, 바른 말(正語)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내 안에 품게 되면 결국 그 생각은 말로 나타나게 됩니다. 늘 진리를 향해 생각하면(正思) 진리의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머리 속에 돈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면 이자율과 부동산 시세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생각에 내 생각이 집중되어 있다면 나는 진리의 말을 하게 됩니다. 넷째, 바른 행동(正業)입니다. 진리를 생각하고 진리의 올바른 말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을 정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업은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등의 계율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정업은 부처님의 진리 안에서 깨어 있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 하나 하나가 진리를 향해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대한 진리를 품고 이루어지는 행위야말로 위대한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행위는 윤회를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업으로 남지 않게 됩니다. 다섯번째, 바른 생활(正命)입니다. 진리에 비추어 이루어진 올바른 행위는 당연히 바른 생활을 하게 되며, 바른 직업을 통해서 바른 의식주를 영위하게 됩니다. 앞의 정업이 개인적인 차원의 의미가 강조된 행위라고 한다면 정명은 사회지향적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얽히고 설켜서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각자의 생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서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루에 모자를 백 개 만드는 사람이 그가 만든 모자를 자신이 모두 쓰고 다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쓰고 다닙니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모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생활 속에서 연기법을 깨닫고 사는 것을 정명이라고 합니다. 여섯 번째, 바른 노력(正精進)입니다. 병이 깊으면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한번 먹고 낫기 어려운 법입니다. 병을 완치하려면 계속 약을 잘 복용해야 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반에 이르려면 쉼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는 올바른 노력, 즉 정정진을 자신의 해탈뿐만 아니라 곧 이웃과 사회를 위한 노력과 관심까지 포함합니다. 올바르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의 해탈만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깊은 관심을 항상 지니고, 그에 맞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종교는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앞에 언급된 다섯 가지 연결고리가 열반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라 해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정정진은 쉬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일곱번째, 바른 집중(正念)입니다. ‘생각할 바에 따라서 잊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과 실천이 항상 현재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종교적 실천은 바로 이 순간에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뒤로 미루고 주저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여덟 번째, 바른 수행(正定)입니다.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움직임이 없음을 의미하는 올바른 삼매입니다. 바른 삼매는 진리와 일치된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열반은 살아 있는 동안 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진리의 체현된 모습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체현을 통한 무한한 자유이고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팔정도는 하나하나 떨어져 있는 실천 덕목이라기보다는 진리체현의 길로서 서로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팔정도를 통한 해탈은 나와 세계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커다란 자유를 얻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격을 완성하여 ‘깨달은 자’, 즉 붓다(Buddha)가 된 것처럼 인간은 스스로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을 닦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각을 통한 인격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와 신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구원이란 말보다는 해탈이나 열반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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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국불교의 특징
3. 중국불교의 특징 중국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시기는 불기 611년(서기 67) 후한(後漢)시대로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한지 500년쯤 경과한 시기입니다. 그 이후 불교가 물밀 듯 중국대륙으로 들어오는데 인도에서 발생한 원시불교ㆍ소승불교ㆍ대승불교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번역되었기 때문에 무엇이 최고의 가르침인가를 가늠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판단에 따라 경전을 체계화하여 종파를 세우게 되니 화엄종ㆍ천태종ㆍ열반종ㆍ삼론종ㆍ선종ㆍ정토종등의 수많은 종파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각자의 기준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부르며 중국불교의 특징인 종파불교가 성립하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종파 가운데 가장 중국적인 불교로는 선종과 정토종을 들 수 있습니다. 선종(禪宗)을 창시한 인물은 보리달마(菩提達磨)입니다. 달마는 숭산 소림사에 9년 동안 면벽(面壁)에 들어가 깨달음을 열고 중국대륙에 선의 깃발을 크게 휘날리게 됩니다. 선종에서는 경전이나 문자 등의 이론에만 매달려 입씨름이나 하고 있는 학문불교, 허약한 지식사회를 비판하고 주체적인 나 자신의 마음과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선은 일상생활 속에서 깨달음과 평정한 마음을 강조하는 실천불교를 내걸어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나 일본의 정신풍토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습니다. 정토종 역시 선과 더불어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실천불교입니다. 오로지 아미타부처님에 대한 염불을 강조하여 중국의 민중들에게 정토왕생이라는 염불신앙을 굳건히 해주었으며 절망에서 희망을 빛줄기를 찾게 해주었습니다.
3. 조선시대의 불교
3.조선시대의 불교 조선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불교는 조선 500년 동안 혹심한 탄압 속에 신음하게 되며 스님들은 서울인 도성으로의 출입을 금지당했습니다. 비록 태조, 세종, 세조가 궁전 내의 법당인 내불당(內佛堂)을 지어 불교를 신앙했고 세조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는 등 한글 경전을 간행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차원에 머무른 것이었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배불의 분위기는 바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불의 시기에도 조선불교의 명맥을 이어오고 발전시켜 온 스님들이 있었습니다. 함허, 보우, 휴정, 유정 스님 등이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허응당 보우는 명종5년(1550)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의 등용문인 승과를 부활시켜 불교의 중흥을 꾀하였습니다. 이 승과를 통해 배출된 유명한 인물이 서산 스님과 사명 스님입니다. 두 스님은 의승군으로 활동하여 누란에 위기에 빠진 국가를 건져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서산 스님은 꺼져가던 선맥을 살려내어 이를 계승시켜 한국 조계종풍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습니다. 스님은 선을 최고의 수행으로 내세우면서도 염불 신앙과 경전 공부를 통한 성불의 가능성도 제시하였습니다. 이런 스님들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가해진 탄압은 매우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불교는 산 속으로 스며들고 스님들은 천민 대접을 받아 양반들의 시중을 드느라 동분서주했습니다. 이에 따라 수행 풍조 또한 점점 혼미를 거듭해 무질서해졌으며 참선하는 스님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혜성 같이 나타나 한국불교의 활발발한 선풍을 다시금 일으킨 거장이 경허(鏡虛) 스님입니다. 1879년 동학사에서 스님의 오도를 계기로 한국의 선풍은 다시금 힘찬 발돋음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선원이 여기저기서 생겨나 참선하는 스님들의 오도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으며 이러한 참선 가풍은 성철 스님을 비롯한 오늘날의 청정 수행스님들에게로 면면히 계승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불교는 조선시대의 억불과 근현대의 불협화음 속에서 멍들었던 불심을 회복하고 미래 사회의 대안으로 힘차게 도약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