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는 지금부터 약 26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종교입니다. 당시 인도는 사상적으로 혼란한 때였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제각기 자기들의 가르침을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이 각 종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있을 수 있는 것일까요? 또한 만약 어느 한 종교가 자기들의 가르침만이 옳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 그르다고 주장한다면, 다른 종교에 의해서 똑같이 그 가르침이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고 비판받게 되는 것은 뻔한 일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여러 종교의 서로 다른 주장이 모두 진리라고 한다면, 결국 서로 다른 종교란 있지 않게 되고 모두 하나의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어느 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가 과연 참다운 진리인지 아닌지 하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진리는 다른 어떤 것과 달리 인생의 가장 마지막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은 인생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에서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어왔고 그것이 진리라고 주장되어 왔습니다만, 실제로는 평평하지 않고 공처럼 둥근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천체는 지구의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이 수 천년동안 진리라고 믿어져왔습니다만 사실은 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이처럼 단순히 오랜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 믿음이나 신념들이 무조건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점이 과학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당시의 많은 종교들도 자기들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속에는 그 가르침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다는 이유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믿어온 신이나 성인의 가르침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다고 해서 그 가르침이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입니다. 깨달음의 진리(法) 그래서 부처님은 당시의 종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 때까지 진리라고 믿어 왔던 것들이 대부분 고정된 관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아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정말 어느 한편의 입장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편견과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현상들을 설명해낼 수 있는 완전한 진리를 찾게 되었고 드디어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깨달음의 진리를 다르마(Dharma), 즉 법(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변치 않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그 깨달음의 법이 고쳐지고 또 보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법이 인도의 종교전통에서 사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서 깨달은 것이니까 인도에서는 잘 맞을지 몰라도, 미국이나 유럽처럼 관습이나 문화적 배경이 인도와 다른 곳에서는 맞지 않는 점이 조금 있다거나, 아프리카처럼 문화나 역사적 전통이 전혀 다른 곳에서는 그 법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깨달음의 법이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올바른 진리인 것입니다. 불성(佛性) 부처님은 인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시작입니다. 불교는 우리 모두가 깨닫기만 하면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깨달은 사람, 즉 부처님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능력과 부처님의 성품, 즉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부처님의 성품(佛性)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다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는 달리 몇 가지의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절대자로서 신을 믿고 그 신에 의지하여 구원을 받으려 합니다. 모든 현상과 사물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신의 의지에 의해 유지되고 관리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든 가르침이 절대적 존재인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는 오늘날의 대표적인 종교로는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에서는 인간의 구원이 스스로의 의지나 노력보다는, 오로지 신의 뜻에 달려있다고 믿기 때문에 인간의 신에 대한 태도는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적입니다. 연기(緣起) 그러나 불교는 신의 존재와 같이 증명할 수 없거나, 혹은 검증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무명, 즉 무지에서 생긴다고 보았으며, 깨달음은 무지에서 벗어나 커다란 자유를 얻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해탈이라고도 합니다. 결국 불교에 있어서 궁극적 구원이란 이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즉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과 법칙이 신의 섭리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기(緣起)’ 또는 ‘인연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평등하다는 지혜를 깨닫게 되면, 모든 존재들을 향해 무한한 자비를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각을 통한 인격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와 신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삼장(三藏)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전은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꾸준히 편찬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들었던 팔만 사천 법문이라는 것은 바로 불교에 많은 경전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 놓은 것을 경장(經藏)이라고 하고 교단의 규율을 적어놓은 것을 율장(律藏), 그리고 경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붙인 것을 논장(論藏)이라고 합니다. 이 셋을 삼장(三藏)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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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생애
부처님의 생애 불교의 시작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과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석가모니라는 명칭은 ‘석가족 출신의 성자(聖者)’라는 의미이며,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래 부처님의 성은 고타마이며 이름은 싯달타였는데 진리를 깨달은 이후부터 부처님(Buddha)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소리를 따서 ‘불타(佛陀)’로 적거나 혹은 뜻을 옮겨서 ‘각자(覺者)’라고 합니다만 한국에서는 ‘부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밖에도 부처님은 여러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데, 전통적으로는 여래십호(如來十號)라 하여 10가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B.C. 624에 탄생하셔서 544년에 열반하셨습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불기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해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석가족이 세운 카필라 왕국의 정반왕(淨飯王)과 마야(摩耶) 왕비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카필라 왕국은 지금의 인도 북부 네팔 땅에 위치한 작은 왕국으로 벼농사를 주된 산업으로 하는 농업국이었습니다. 마야왕비는 당시의 풍속에 따라 출산하기 위해 친정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싯달타를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마야 왕비는 아기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 싯달타는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비록 일찍 어머니를 잃은 싯달타였지만 왕자로서 모자람 없는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자 싯달타는 날이 갈수록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생각보다는 인생의 근본문제인 삶과 죽음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왕인 정반왕은 태자 싯달타의 번민을 알고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삼시전(三時殿)이란 세 개의 궁전을 지어 철마다 옮겨다니면서 호화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궁의 호화로운 생활도 싯달타 태자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 했습니다. ‘사람은 왜 늙어야 하며, 또 병들고 아파야 하며, 결국은 죽어야 하는 것인가? 또한 현실은 너무나도 괴로움이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러한 괴로움은 왜 생기는 것이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세상의 많은 가르침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가르침만이 옳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가르침이 옳은 것인가?’하는 의문들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대한 사색과 번민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19세에는 같은 석가족의 콜리성주의 야쇼다라공주와 결혼하였고, 아들 라훌라가 태어납니다만, 싯달타 태자의 머리 속에는 어떻게 해야 생로병사를 벗어나 해탈을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로 늘 가득 찼습니다. 드디어 싯달타 태자는 출가를 결행하니 그의 나이 29세였을 때입니다. 출가를 한 싯달타는 스승을 찾아 나섰습니다. 당시 가장 훌륭하다고 소문난 두 명의 수행자로부터 선정(禪定)에 이르는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즉 정신통일을 하여 고요한 경지에 도달하여 해탈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정(禪定)도 깨어나면 전과 똑같은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괴로움이 없는 편안한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정신통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정신작용의 완전한 정지는 죽음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싯달타는 두 스승을 떠나게 됩니다. 전통적인 수행자들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음을 안 싯달타는 혼자의 힘으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가야의 네란자라 강가 숲 속에 자리잡고 정신적인 자유를 얻기 위한 고행을 극심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육체적 고행으로 싯달타의 몸은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을 뿐 깨달음은 얻지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는 네란자라 강에서 몸을 씻고 고행을 그만두었습니다. 그 때 마침 지나가던 수자타라는 소녀로부터 우유로 발효시킨 죽을 받아 마시고 기운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건강해진 몸과 상쾌한 정신으로 싯달타는 보리수 그늘 아래에 앉아 참선수행에 몰입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난 새벽에 그는 드디어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왕궁을 떠나 출가하여 수행의 길을 걸은 지 6년만이었고 그의 나이는 35세 때였습니다. 깨달은 사람 부처님이 된 것입니다. 그의 깨달음의 주요 내용은 ‘모든 것은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있는 것이며, 모든 것은 그 어느 것도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은 신이나 운명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스스로가 지은 원인에 의해서 받는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여행을 떠났습니다. 부처님은 부다가야의 보리수를 떠나 처음으로 향한 곳은 바라나시의 녹야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부처님은 최초로 다섯 수행자들에게 수행의 바른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수행자는 지나친 향락에 빠져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극단적인 고행을 하는 것도 옳지 않으므로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의 길을 가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어서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를 가르쳐 다섯 수행자들을 깨우치게 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최초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후 왕사성(王舍城)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퍼져나가 수많은 제자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국왕과 대신, 부호, 평민, 천민 할 것 없이 각계 각층의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큰 감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 평등한 것입니다. 온 생애를 오로지 모든 사람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데에 바치신 부처님께서도 죽음을 맞이하셨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 진리에 의지하고, 진리를 스승으로 삼아라. 진리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라.” 라는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장엄한 황혼처럼 부처님은 80세의 위대한 생애를 마치십니다. 35세에 깨달음 얻은 후, 녹야원에서의 첫 설법을 시작으로 하여, 쿠시나가라에서 80세에 열반에 들기까지 부처님은 45년 간 쉬지 않고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길에서 태어나시어, 길에서 고뇌를 하시고, 길에서 수행하며, 길에서 깨달음을 이루시고, 길에서 사람의 갈 길을 가르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길에서 주무시며, 길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부처님은 바로 길에서 길을 인도하신 도사(導師)였던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도(求道)와 성도(成道) 그리고 교화(敎化)와 입멸(入滅)의 길을 걸으신 부처님의 생애는 참으로 위대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정신적인 깊이와 도덕적 위대성을 지니시고, 지혜와 자비를 갖추신 분으로서 인류에게 인간의 위대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종교를 초월하여 부처님을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4. 사찰 예절
4. 사찰 예절 절은 수행공간이자 전법공간이며 부처님과 보살님이 모셔져 있는 성스러운 공간입니다. 이런 곳인 만큼 불자들은 각별하게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우선 절에 갈 때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노출이 심한 옷을 피해야 합니다. 절의 진입 공간인 산문을 들어설 때마다 불자들은 각 문 앞에서 반배로서 예를 표하여 마음가짐을 맑고 깨끗하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탑 앞에 섰을 때는 그곳에 부처님의 진신이 살아 계심을 명심하고 반배로서 세 번 절하거나 합장한 채 오른쪽으로 탑돌이를 합니다. 절에 와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중앙 불전인 큰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참배해야 합니다. 법당에 올라가는 계단은 일반적으로 중앙과 좌우에 있는데, 불자들은 좌우계단을 이용해야 합니다. 사찰에 따라 중앙 계단만 있을 경우에는 그 계단의 양측면을 이용하면 됩니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러 개가 있습니다. 법당 정면에 중앙문이 있고 그 양옆에 각기 하나씩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당 좌우 측면에 하나씩 문이 있지요. 법당 안 정 중앙 뒤쪽으로 불보살님 모셔져 있으며, 이 불보살님이 모셔진 곳을 기준으로 가운데 통로를 어간(御間)이라 하고, 이곳으로 나 있는 정중앙의 문을 어간문이라고 부릅니다. 법당에 출입할 때 일반 불자는 어간문을 이용해서는 안 되며 측면으로 난 문이나 좌 우측의 문을 이용해야 합니다. 법당에 들어갈 때는 문을 조용히 열고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고 반배를 한 후 들어섭니다. 법당 안에 들어선 이후에는 합장한 자세로 조용히 걸어가 부처님을 향해서 삼배를 올려야 합니다. 이때 다른 불자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몸을 조심하며 가운데 통로인 어간은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어간을 지날 때는 합장한 자세로 허리를 굽히고 경건하게 통과해야 됩니다. 부처님께 향을 올릴 때는 두 손으로 받들어 지극한 마음으로 올리며 향에 붙은 불은 입으로 불어 끄지 말고 손이나 다른 도구를 이용합니다. 법당을 나올 때도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