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강의 (1) 의상스님이 지은 법성게

불교의 심오한 철학과 우주 만유의 현상을 가장 고차원적인 이론으로 설하고 있는 경전은 『대방광불화엄경』이다. 대승경전의 최고봉으로 알려진 이 경전은 우선 경문의 서술이 호한무비(浩瀚無比)하다. 즉 부처님의 정각의 경계를 장엄하게 묘사하여 서사적으로 표현한 전체의 경문이 드라마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수많은 보살들을 등장시켜 갖가지 법문을 설한다.

또한 『잡화경(雜華經)』이라고 불리듯이 온갖 내용이 매우 복합적으로 설해져 있으며, 중생들의 근기와 상관없이, 그리고 수준의 높고 낮음에 맞추지 않고 설했다고 하여 여증이설(如證而說 : 깨달은 그대로 설함)이라고 말하여 왔다. 이 화엄경을 근본으로 한 체계화된 교법상의 이론을 화엄사상이라고 하는데, 교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화엄사상의 비중은 대단히 높았다. 화엄사상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불교의 역사적인 흐름 속에 불교 일반의 보편적인 사상으로 널리 퍼졌다.

수많은 경론 가운데 특히 화엄사상이 미친 영향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는 곳은 우리나라의 불교이다. 이처럼 한국불교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 화엄사상인 것이다. 화엄사상은 일찍이 신라시대의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에 의하여 선양됨으로써 불교의 중심사상으로 발달되어 현대불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사실 화엄불교는 모든 종파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회통시키는 통불교적인 성격을 그대로 가짐으로써 모든 사상을 융합하고 있다. 이미 원교라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이 내려졌듯이, 모든 지상의 강물을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제교(諸敎)의 사상을 원융하게 수용하고 있는 것이 화엄사상인 것이다. 그러한 화엄사상 중에서 그 핵심요체를 가장 잘 함축하여 나타내 놓은 것은 『법성게(法性偈)』이다. 법성게는 의상(義湘)스님이 중국에 들어가 화엄종의 2조(祖)인 지엄(智儼)스님 문하에서 지은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의 두 천재적인 고승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은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하고 함께 길을 떠났다. 도중에 노숙을 하다가 한 밤중에 갈증이 난 원효스님은 해골이 담긴 썩은 물을 모르고 마셨다. 이튿날 아침 그 사실을 안 뒤 속이 메스꺼워 구토증을 느끼던 순간, 원효스님은 ‘마음이 생기니 갖가지 법이 생기고 (心生卽種種法生), 마음이 없어지니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 (心滅卽種種法滅)’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를 깨닫고, 달리 법을 구할 것이 없다고 여겨 당나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오고 만다. 그리하여 의상스님 혼자 당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이 때가 서기 661년, 스님의 나이 37세의 일이다.

의상스님은 당나라에 머물며 지엄스님의 문하에서 8년간에 걸쳐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10년의 당나라 체류기간 중 8년 세월을 화엄공부에 바친 것이다. 의상스님은 47세가 되던 671년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법성게를 지은 것은 668년인 445세 때라고 한다.

법성게의 원래 이름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즉 7언 송구(頌句) 30송인 도합 210자의 글자를 도인(圖印)으로 배치하였던 것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1월 제74호

대승불교 (3)바라밀다의 실천

대승불교의 보살도는 이타행의 원력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자리위주의 소승수행과 다른 점이다. 여기에 보살수행의 덕목으로 육바라밀이 설해진다. 바라밀이란 범어 paramita의 음사로서 보통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으로 번역된다. para는 저 언덕(彼岸)이란 뜻이고 mita는 도착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은 동시에 최상의 상태가 되었다는 뜻과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뜻이 함께 갖추어진 말이다. 그런데 이 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공(空:sunya)의 이치를 터득한 반야로부터 나와서 궁극적으로 그 반야에 일치된다는 것이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누교품(累敎品)에 부처님이 아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한 대목이 있다.

“보살마하살이 최후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6바라밀을 닦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아란아, 6바라밀은 보살마하살의 어머니로서 모든 보살들을 낳기 때문이니라. 아란아, 만약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닦는다면 모두 최후의 깨달음을 얻으리라. 이런 까닭에 6바라밀을 거듭 너희에게 부촉하는 것이다. 아란아, 6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진리가 담겨있는 이루 다할 수 없는 법의 창고(法藏)이니, 시방의 부처님이 지금 법을 설하는 것은 모두 6바라밀의 법의 창고로부터 나온 것이며, 과거 모든 부처님 또한 6바라밀을 닦음으로써 최후의 깨달음을 얻었으며 미래의 모든 부처님 또한 6바라밀을 닦음으로써 최후의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불자들 또한 이 6바라밀을 통해서 열반을 얻을 것이니라.”

삼승(三乘)의 교법을 비교할 때 성문(聲聞)은 4제의 이치를 알아 번뇌를 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연각(緣覺)은 12인연법을 관하여 적정(寂靜)에 든다는 점을 강조하고 보살(菩薩)은 6바라밀을 실천한다는 점을 강조해 부각시킨다.

① 보시(布施)바라밀

보시란 남을 위하여 베푸는 것을 말한다. 범어 dana를 번역한 말로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다. 은혜를 어떻게 베푸는가 하는 방법을 두고 물질로써 베푸는 것을 재물 보시(財施)라 하고 진리를 가르쳐 올바로 알게 하는 법의 보시(法施)가 있으며 두려움을 없애 주고 근심을 덜어 주는 무외시(無畏施)라는 보시가 있다. 또 보시를 행하면서 어떤 대가나 공을 바라지 않고 요컨대 비워진 마음에서 보시하는 것을 상(相)없이 보시하는 무주상(無住相)보시라 한다. 한역(漢譯)에서 보시를 자생(資生)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기도 하는데 남이 잘살도록 도와준다는 뜻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사회의 일원이 된 각자가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된다는 기본 윤리를 제시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② 지계(持戒)바라밀

지계란 계를 지킨다는 뜻이다. 범어 sila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악을 소멸하고 선을 보호 육성하는 고도의 윤리의식을 제고하는 말이다. 5계, 10계, 혹은 250계, 500계 등의 계의 조목 수를를 나타낸 구분들이 있지만 잘못된 행위 곧 악업을 사전에 예방하고 나쁜 결과가 오는 것을 미리 막자는 뜻에서 윤리적 신념을 가지고 지조 있게 살자는 것이다. 특히 대승에서는 타율적인 계율지상주의에서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이타 계행을 더욱 강조한다, 여기에 삼취정계(三聚淨戒)가 설해져 모든 중생을 거두어 보살피며(攝衆生戒) 일체 선법을 거두어 실천하며 (攝善法戒), 모든 도덕적 모범을 갖추는(攝律儀戒) 실천윤리가 있다.

③ 인욕(忍辱)바라밀

인욕이란 참고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범어 ksanti의 번역으로 내 마음속에 원망이나 미움, 시기 질투 등을 담아 두지 말라는 뜻이다. 사바세계를 고해(苦海)라 하듯이 괴로움이 많은 세상을 살려면 참고 용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법구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미움을 미움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미움은 오직 인욕으로서 극복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영원한 진리이다.”

또 일인장락(一忍長樂)이라 하여 참고 사는 것이 뒷날의 즐거움을 가져온다 하였다. 한번 참으면 길이 편안하다.

④ 정진(精進)바라밀

정진은 virya의 번역이다. 열심히 노력하는 근면성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강한 의지의 실천력이 없이는 보살행은 성취되지 않는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여러 제자들에게 이 세상 모든 것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좋은 일을 도모하여 그 공덕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세상사는 진정한 보람이 되는 것이다.

⑤ 선정(禪定)바라밀

선정은 dhyana의 번역으로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되어 들뜨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삼매(三昧:samadhi)를 말하여 정신이 한곳에 집중 통일된 상태를 이르나 원래는 사유수(思惟修) 혹은 정려(靜慮)라 번역되기도 하였다. 이 선정의 수행은 가장 중요한 깨달음의 관문이 된다. 달마스님의 말씀에 마음을 관하여 선정을 이루는 것이 모든 세상일을 거두는 일이라 하였다.(觀心一法 總攝諸行) 계율을 지키는 것도 선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며 또한 선정에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⑥ 반야(般若)바라밀

반야 prajna는 지혜을 말한다. 객관 대상을 인식하는 사유분별의 망상을 떠난 지혜를 말한다. 중생이 주관과 객관을 상대적으로 놓고 분별하는 지식은 지구상에 밤과 낮의 시간대의 구별이 있는 것과 같다면 반야의 지혜는 밤낮의 분별이 없는 태양과 같은 것이다. 이를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한다. 반야심경에서 반야바라밀을 의지하여 마음에 장애가 없고, 마음에 장애가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으며, 전도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하였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6월 (제19호)

대승불교 (2)보살도의 등장

부파불교의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교리이론에 치중된 경향이 끝내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부파간에 때로는 교리적 논쟁이 일어나고 자파의 주장만 내세우는 우월주의가 생기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 집단에서 반목과 질시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이러한 폐단을 불식하고 부처님 가르침의 참 뜻을 훼손하지 않고 바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불교 실천운동을 펴기에 이르렀다. 우선 부파의 주장보다 교조 석가모니를 흠모하면서 부처님에 대한 예경을 지극히 하고 탑을 세우는 등 부처님을 가까이 느끼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불교를 손쉬운 방법으로 몸소 실천하고여러 사람들과 공동으로 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기에서 불탑신앙이 생기고 더 나아가 보살사상이 형성되었다. 세속적인 현실을 다분히 초월하여 자리적이고 독선적인 수행을 위주로 하던 방법을 지양하고 이타행을 베푸는 방법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에 보살이라는 말이 새로 등장하였다.

보살(菩薩)이란 보리살타의 준말로 범어 보디사트바(bodhi sattava)를 음사한 말이다. 보디는 ‘각(覺), 깨달음’, 사트바는 ‘중생(衆生) 혹은 유정(有情)’이라 번역한다. 그러니까 깨달은 중생이라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다소 포괄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깨달으려 하는 중생, 곧 각을 추구하는 사람, 또 남을 깨닫게 해 주는 사람이라는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마하살(摩訶薩)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도 보살을 호칭하는 말이다. 마하는 ‘크다’는 대(大)의 뜻이고 살은 역시 살타이다. 그러니까 큰 중생이라는 말인데 이는 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을 위하여 자기의 뜻을 크게 가지는 사람, 많은 사람들을 태워 즐거운 곳으로 데려다 주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보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 보살들의 정신을 대승(大乘:mahayana)이라 하였다. 이는 글자 그대로 많은 사람들을 태워 주는 큰 수레라는 뜻이며, 이 대승이 일어나기 이전의 불교를 대승의 반대인 소승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만 이 대승이 부파불교의 대중부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이라고 사상 전개면에서는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대승에서는 부처님을 소승의 아라한의 수행을 완성한 자로 보지 않고 그 이상의 초능력의 소유자로 격상시켜 보게 되었다. 이미 과거의 수많은 생을 거쳐오면서 많은 수행의 경력을 갖추어 그 능력이 탁월하여 단순히 번뇌를 끊고 해탈을 얻은 아라한들과는 다르게 보게 되었다. 특히 부처님의 전생의 이야기를 담은 경전들이 나왔고 이를 본생담(本生譚:Jataka)라 하였으며, 이 경 속에는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내용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모두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지만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정신을 상징적으로 극대화하여 표현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을 보살정신이라 하였으며, 보살정신을 바탕으로 한 이타행 위주의 수행을 보살도라 하였다. 그리고 보살도는 대승을 실천하는 전형적인 상징이 되었고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수행자상을 보살로 보게 된 것이다. 보살상이 등장하면서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들, 소위 이승(二乘)들을 평가절하하여 완전한 수행자 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오직 보살들이라야 완전한 수행자 상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물론 대승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보살이라는 말은 경전 속에서 쓰여졌다. 많은 선행을 닦아 미래의 성불이 보장된 보살들의 이야기가 경전 속에 자주 나온다. 그러나 대승의 보살들은 불전의 보살들과 다른 특징이 있다. 이들은 성불은 약속 받는 보살이 아니라 큰 서원을 발하여 어디까지나 보살도 실천으로 중생교화에만 전념하는 자들로 자신의 성불을 보장받는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점이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5월 (제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