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파불교의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교리이론에 치중된 경향이 끝내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부파간에 때로는 교리적 논쟁이 일어나고 자파의 주장만 내세우는 우월주의가 생기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 집단에서 반목과 질시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이러한 폐단을 불식하고 부처님 가르침의 참 뜻을 훼손하지 않고 바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불교 실천운동을 펴기에 이르렀다. 우선 부파의 주장보다 교조 석가모니를 흠모하면서 부처님에 대한 예경을 지극히 하고 탑을 세우는 등 부처님을 가까이 느끼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불교를 손쉬운 방법으로 몸소 실천하고여러 사람들과 공동으로 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기에서 불탑신앙이 생기고 더 나아가 보살사상이 형성되었다. 세속적인 현실을 다분히 초월하여 자리적이고 독선적인 수행을 위주로 하던 방법을 지양하고 이타행을 베푸는 방법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에 보살이라는 말이 새로 등장하였다.
보살(菩薩)이란 보리살타의 준말로 범어 보디사트바(bodhi sattava)를 음사한 말이다. 보디는 ‘각(覺), 깨달음’, 사트바는 ‘중생(衆生) 혹은 유정(有情)’이라 번역한다. 그러니까 깨달은 중생이라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다소 포괄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깨달으려 하는 중생, 곧 각을 추구하는 사람, 또 남을 깨닫게 해 주는 사람이라는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마하살(摩訶薩)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도 보살을 호칭하는 말이다. 마하는 ‘크다’는 대(大)의 뜻이고 살은 역시 살타이다. 그러니까 큰 중생이라는 말인데 이는 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을 위하여 자기의 뜻을 크게 가지는 사람, 많은 사람들을 태워 즐거운 곳으로 데려다 주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보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 보살들의 정신을 대승(大乘:mahayana)이라 하였다. 이는 글자 그대로 많은 사람들을 태워 주는 큰 수레라는 뜻이며, 이 대승이 일어나기 이전의 불교를 대승의 반대인 소승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만 이 대승이 부파불교의 대중부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이라고 사상 전개면에서는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대승에서는 부처님을 소승의 아라한의 수행을 완성한 자로 보지 않고 그 이상의 초능력의 소유자로 격상시켜 보게 되었다. 이미 과거의 수많은 생을 거쳐오면서 많은 수행의 경력을 갖추어 그 능력이 탁월하여 단순히 번뇌를 끊고 해탈을 얻은 아라한들과는 다르게 보게 되었다. 특히 부처님의 전생의 이야기를 담은 경전들이 나왔고 이를 본생담(本生譚:Jataka)라 하였으며, 이 경 속에는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내용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모두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지만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정신을 상징적으로 극대화하여 표현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을 보살정신이라 하였으며, 보살정신을 바탕으로 한 이타행 위주의 수행을 보살도라 하였다. 그리고 보살도는 대승을 실천하는 전형적인 상징이 되었고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수행자상을 보살로 보게 된 것이다. 보살상이 등장하면서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들, 소위 이승(二乘)들을 평가절하하여 완전한 수행자 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오직 보살들이라야 완전한 수행자 상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물론 대승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보살이라는 말은 경전 속에서 쓰여졌다. 많은 선행을 닦아 미래의 성불이 보장된 보살들의 이야기가 경전 속에 자주 나온다. 그러나 대승의 보살들은 불전의 보살들과 다른 특징이 있다. 이들은 성불은 약속 받는 보살이 아니라 큰 서원을 발하여 어디까지나 보살도 실천으로 중생교화에만 전념하는 자들로 자신의 성불을 보장받는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점이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5월 (제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