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7) – 광수공양원 (3)

<경문 3>

만약 모든 보살이 법공양을 행하면 곧 여래를 공양하는 것이 되며,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이 진실한 공양이기 때문이니라.

이 광대하고 가장 훌륭한 공양을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 업이 다하며,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 나의 공양도 다하지마는 허공계 내지 번뇌가 다할 수 없으므로 나의 이 공양도 또한 다함없이 해서 생각마다 계속하여 끊임없이 하여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느니라.

<풀이>

보현행원은 끝없는 실천이요 정진이다. 법공양.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공양으로, 이 공양만 잘하면 성불은 확실해진다. 때문에 법공양에 투철한 정신만 갖추어지면 사실 모든 행원이 다 성취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불교 수행의 정신을 위법망구(爲法忘軀)라고 했다. 법을 위하여 몸을 잊는다는 말은 법을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극한 구법정신에 의해 우리 사회에 부처님의 정법이 구현되는 것이다. 아노미(anomy) 현상으로 인해 부패의 증후군이 들끓고 있는 이 시대, 사회정의 구현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법을 공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지상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ꡒ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라ꡓ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부처님이 설해 놓은 법을 실천하는 것이 법을 공양하는 것이고 법을 공양하는 것이 부처님을 위하고 중생을 위하는 것이다. 결국 불국토 건설의 초석은 법공양에 있다. 범부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탐․진․치 삼독 따위의 그릇된 번뇌 미혹을 제거하고 자성청정심의 각심(覺心)을 발휘할 때 법공양은 저절로 행해지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0월 제47호

보현행원품 (6) – 광수공양원 (2)

<경문>

선남자여, 모든 공양 가운데 법공양이 가장 으뜸이니, 이른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이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공양이며, 중생을 섭수하는 공양이며, 중생의 괴로움을 대신 받는 공양이며, 부지런히 선근을 닦는 공양이며, 보살의 업을 버리지 않는 공양이며,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이니라.

선남자여, 앞에서 말한 공양의 많은 공덕을 한 생각 동안 닦는 법공양의 공덕에 비교한다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억 분과 한 털끝을 백분으로 나누었을 때의 수, 계산할 수 있는 수, 헤아릴 수 있는 수, 비유할 수 있는 수, 가장 작은 극미한 수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을 출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풀이>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불교의 목적을 나타내는 이 말은 곧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공덕 성취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보현행원의 참뜻도 들어 있다. 공양을 닦는다는 취지 역시 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는 불교의 본령에 부합되는 일이다. 모든 공양 중에서도 법공양이 으뜸이라고 강조한 이 대목은 법을 베푸는 일이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최상의 가치임을 밝혀 놓고 있다. 복이나 공덕을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로 구분하여 무루의 가치라야 불교의 참 가치임을 밝혀 놓은 법문은 반야부 경전 등에 누누이 설해져 있다. 깨진 그릇에 물이 새듯이 유루복은 결국 소모되고 만다. 샘이 없는 무루복이라야 번뇌를 극복하고 해탈을 기약할 수 있다. 이 세상에 가득한 칠보(七寶)를 남에게 보시하는 공덕보다도 경전의 사구게(四句偈)를 수지하는 공덕이 더욱 수승하다는 금강경의 말씀이나, 발심공덕을 찬탄한 화엄경의 말씀도 무루복을 성취해야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천명한 말이다.

공양 가운데서 법공양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재물 공양의 물질적 가치는 도를 깨닫는 직접적인 계기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 즉 다르마(dharma)를 알아야 깨달음을 얻어 해탈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마치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제공되어지는 음식이나 의복 등의 물질적 혜택이 고맙고 은혜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감옥을 나오도록 석방을 시켜주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우선 문제라고 할 수 있듯이, 해탈의 자유를 구하는 수행의 차원에서는 법을 공양하는 일보다 더 우선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 법공양의 내용을 총괄적으로 설명한 말이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한다는 것으로, 다시 말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지 않고는 법공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법을 존중하고 또 법이 부처님을 출생하는 모체이므로 법을 위하는 일이 최상의 공양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9월 제46호

보현행원품 (5) – 광수공양원 (1)

<경문 1>

선남자여! 널리 공양을 닦으라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 국토에 있는 작은 티끌 수만큼 많은 세계에 각각 일체세계의 작은 티끌 수만큼 많은 부처님이 계시며, 한 분 한 분 부처님 계신 곳마다 수 없는 보살들이 둘러싸고 계심에 내가 보현의 행원으로써 깊은 믿음을 일으켜 눈앞에 마주한 듯 알아보는 마음으로, 모두 최상의 미묘한 온갖 공양거리로 공양하는 것이니라. 이른바 꽃과 꽃타래, 가장 좋은 음악, 가장 좋은 산개, 가장 좋은 의복, 가장 좋은 여러 가지 향들, 바르는 향, 태우는 향, 가루 향이니, 이와 같은 낱낱의 양이 수미산 만하고, 가지가지 등을 켜되 우유등, 기름등, 향유등의 심지는 수미산 같고 낱낱의 등기름은 큰 바닷물과 같으니, 이러한 것들의 온갖 공양거리로써 언제나 한결같이 공양하는 것이니라.

<풀이>

세 번째 행원인 ꡐ광수공양원ꡑ은 부처님에 대한 예경과 찬탄의 정신을 일상의 생활 속에서 정성스러운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부처님의 무한한 공덕을 계발하는 중생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탐심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정성과 기쁨으로 부처님이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것이 공양이다. ꡐ공양ꡑ이라는 말은 원래 범어 ꡐ푸자나(pujana)ꡑ를 번역한 말로 ꡐ공시(供施)ꡑ, ꡐ공급'(供給)ꡑ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음식물이나 의복 등을 ꡐ불․법․승의 삼보와 부모, 스승, 또는 돌아간 이들에게 바친다ꡑ는 뜻이다. 이 공양을 공양물의 종류와 공양하는 방법, 그리고 공양하는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는데, 대체로 몸으로 하는 신체적 행위의 공양을 신분 공양(身分供養)이라 하고, 정신적인 마음의 공양을 심분 공양(心分供養)이라 하기도 한다.

또한 이 공양 정신은 육바라밀 중의 보시 정신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단지 용어를 달리 쓰고 있을 뿐이다. 이 공양의 본질은 인간의 마음이 무한한 공덕장을 가진 것으로 그것을 활동적으로 전개 응용하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은 공양을 주고받는 교환에서 무한한 생명 공간의 순환이 이루어져 생명 자체가 활성화된다. 따라서 공양의 연속으로 인간과 세상이 번영되고 아울러 진리의 세계가 인간 자체 속에 체험된다.

불교 신도들이 부처님을 모신 법당에 들어가 불단에 공양물을 올리는 의례적인 불교 풍습을 통해, 공양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실천해 나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물론 이것은 공양의 정신을 습득하는 단초요 그 시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자면 우선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여 탐욕과 증오의 마음이 사라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중생의 죄악에 물든 마음으로는 부처님께 공양이 바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정한 마음 반야지혜의 눈을 가져야 부처님을 뵈올 수 있다. 이 반야지혜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부처님이요 부처님의 세계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불보살이며, 내 형제, 내 가족, 내 이웃을 위시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공양의 대상인 부처님이 된다. 연기의 이법으로 살아가는 세상 만물은 인간뿐만 아니라, 산하대지의 무정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로서로 은혜를 베풀고 있는 존재들이다. 공양은 또한 은혜를 갚는 보은의 정신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세상, 온 국토에 충만해 있는 부처님께 공양한다는 서원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나온 것이다. 원 경문에서 말한 천상의 공양물은 가장 좋은 물품을 상징하는 것으로 곧 정성의 지극함을 드러내는 말이다.

또 공양을 한다는 것은 재물을 헌납하는 물질 제공에 앞서 나를 바친다는 고도의 윤리 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법화문구에서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삼업 공양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배와 공경은 신업공양, 칭찬은 구업 공양, 부처님의 상호를 생각하는 것은 의업 공양이다. 몸과 말과 뜻을 통해 부처님을 섬기는 정신이 공양으로, 내가 할 일은 부처님을 위하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부처님이 특정한 개체가 아닌 온 세상 전부가 부처님 속에 들어 있으므로, 부처님을 통해 일체 모든 것에 공양한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보현행원에서 실천되는 공양은 내가 얼마만큼 공양을 하였다든지, 공양한 공덕이 얼마만큼 될 것이라든지 하는 생각 없이, 오직 받들어 이바지하는 순수한 마음뿐인 상태이다.『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무주상보시를 말씀하셨다. 보시를 하되 보시를 하였다는 생각이 없으면 그 공덕은 온 우주 허공을 헤아릴 수 없듯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 공덕이 무량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공양에도 공양하는 마음의 순수한 정성과 지극한 믿음 그리고 무주상만이 공양의 참된 조건이 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8월 제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