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 1>
선남자여! 널리 공양을 닦으라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 국토에 있는 작은 티끌 수만큼 많은 세계에 각각 일체세계의 작은 티끌 수만큼 많은 부처님이 계시며, 한 분 한 분 부처님 계신 곳마다 수 없는 보살들이 둘러싸고 계심에 내가 보현의 행원으로써 깊은 믿음을 일으켜 눈앞에 마주한 듯 알아보는 마음으로, 모두 최상의 미묘한 온갖 공양거리로 공양하는 것이니라. 이른바 꽃과 꽃타래, 가장 좋은 음악, 가장 좋은 산개, 가장 좋은 의복, 가장 좋은 여러 가지 향들, 바르는 향, 태우는 향, 가루 향이니, 이와 같은 낱낱의 양이 수미산 만하고, 가지가지 등을 켜되 우유등, 기름등, 향유등의 심지는 수미산 같고 낱낱의 등기름은 큰 바닷물과 같으니, 이러한 것들의 온갖 공양거리로써 언제나 한결같이 공양하는 것이니라.
<풀이>
세 번째 행원인 ꡐ광수공양원ꡑ은 부처님에 대한 예경과 찬탄의 정신을 일상의 생활 속에서 정성스러운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부처님의 무한한 공덕을 계발하는 중생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탐심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정성과 기쁨으로 부처님이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것이 공양이다. ꡐ공양ꡑ이라는 말은 원래 범어 ꡐ푸자나(pujana)ꡑ를 번역한 말로 ꡐ공시(供施)ꡑ, ꡐ공급'(供給)ꡑ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음식물이나 의복 등을 ꡐ불․법․승의 삼보와 부모, 스승, 또는 돌아간 이들에게 바친다ꡑ는 뜻이다. 이 공양을 공양물의 종류와 공양하는 방법, 그리고 공양하는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는데, 대체로 몸으로 하는 신체적 행위의 공양을 신분 공양(身分供養)이라 하고, 정신적인 마음의 공양을 심분 공양(心分供養)이라 하기도 한다.
또한 이 공양 정신은 육바라밀 중의 보시 정신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단지 용어를 달리 쓰고 있을 뿐이다. 이 공양의 본질은 인간의 마음이 무한한 공덕장을 가진 것으로 그것을 활동적으로 전개 응용하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은 공양을 주고받는 교환에서 무한한 생명 공간의 순환이 이루어져 생명 자체가 활성화된다. 따라서 공양의 연속으로 인간과 세상이 번영되고 아울러 진리의 세계가 인간 자체 속에 체험된다.
불교 신도들이 부처님을 모신 법당에 들어가 불단에 공양물을 올리는 의례적인 불교 풍습을 통해, 공양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실천해 나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물론 이것은 공양의 정신을 습득하는 단초요 그 시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자면 우선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여 탐욕과 증오의 마음이 사라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중생의 죄악에 물든 마음으로는 부처님께 공양이 바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정한 마음 반야지혜의 눈을 가져야 부처님을 뵈올 수 있다. 이 반야지혜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부처님이요 부처님의 세계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불보살이며, 내 형제, 내 가족, 내 이웃을 위시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공양의 대상인 부처님이 된다. 연기의 이법으로 살아가는 세상 만물은 인간뿐만 아니라, 산하대지의 무정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로서로 은혜를 베풀고 있는 존재들이다. 공양은 또한 은혜를 갚는 보은의 정신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세상, 온 국토에 충만해 있는 부처님께 공양한다는 서원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나온 것이다. 원 경문에서 말한 천상의 공양물은 가장 좋은 물품을 상징하는 것으로 곧 정성의 지극함을 드러내는 말이다.
또 공양을 한다는 것은 재물을 헌납하는 물질 제공에 앞서 나를 바친다는 고도의 윤리 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법화문구에서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삼업 공양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배와 공경은 신업공양, 칭찬은 구업 공양, 부처님의 상호를 생각하는 것은 의업 공양이다. 몸과 말과 뜻을 통해 부처님을 섬기는 정신이 공양으로, 내가 할 일은 부처님을 위하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부처님이 특정한 개체가 아닌 온 세상 전부가 부처님 속에 들어 있으므로, 부처님을 통해 일체 모든 것에 공양한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보현행원에서 실천되는 공양은 내가 얼마만큼 공양을 하였다든지, 공양한 공덕이 얼마만큼 될 것이라든지 하는 생각 없이, 오직 받들어 이바지하는 순수한 마음뿐인 상태이다.『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무주상보시를 말씀하셨다. 보시를 하되 보시를 하였다는 생각이 없으면 그 공덕은 온 우주 허공을 헤아릴 수 없듯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 공덕이 무량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공양에도 공양하는 마음의 순수한 정성과 지극한 믿음 그리고 무주상만이 공양의 참된 조건이 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8월 제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