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근본교리 (14)업과 과보

윤회설에서는 업에 의해서 그 과보를 받는 상태가 윤회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업이 윤회의 주체라고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얼핏 생각하면 업이 바로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법무아설(諸法無我說)을 내세우는 근본 교리의 입장에서, 윤회의 주체가 있다고 한다면 서로 상충되는 이론이 되고 만다. 결론은 윤회를 거듭하되 윤회하는 주체는 없다는 것이다. 업 이론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인과(因果)의 법칙을 밝히는 이야기다. 동시에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윤리적 측면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과성과 윤리성의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업 이론이다. 여기서 인과의 성질은 자연법칙과 같은 것으로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논리와 같은 것이다. 다만 선악의 도덕적 기준은 인간의 윤리적 의식에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사고다. 업 자체는 선악이 없는 것이지만 인간의 윤리의식에서 볼 때 선악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다.

업이 행해지는 하나의 행위가 끝나면 행위자체는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행한 존재 안에 어떤 흔적이나 세력을 남겨 놓는다. 마치 향을 태우면 향 자체는 타서 없어지지만 향의 냄새가 옷이나 천 같은데 배여 남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업이 남긴 세력을 업력(業力)이라 하는데, 이것이 잠재적인 에너지로 남아서 때를 기다려 업력의 성질과 일치성이 있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존재들은 업력을 싣고 다니는 활동체다. 모든 존재가 살아가는 동력이 모두 업력이다. 이것이 죽은 뒤에는 미래를 만드는 에너지가 된다.

업은 존재하는 자의 현재 운명이나 미래의 운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뿐만 아니라 업으로 인해 모든 존재가 만들어진다. 가령 사람으로 태어날 업을 지었으면 사람으로 태어나고 짐승으로 태어날 업을 지었으면 짐승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업이 지어지고 나서 그 과보가 나타날 때까지 경과되는 시간은 일정하지가 않다. 마치 식물의 종자가 발아하여 뿌리를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종자마다 다르듯, 업이 결과를 초래하는 과보를 받는 때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3가지로 구분하여 삼시업(三時業)이라 하는데 금생에 지어서 금생에 과보를 받는 업은 순현업(順現業)이라 하고 내생에 받는 것은 순생업(順生業), 그 다음 생에 가서 받는 업은 순후업(順後業)이라 한다. 또 과보를 받게 되는 때가 정해져 있는 업을 정업(定業)이라 하는 반면 정해지지 않는 업은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업은 지으면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되지만 그 결과가 항상 똑같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업을 지으면 어떤 과보를 받느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대체로 선업은 선도에 태어나고 악업은 악도에 태어난다고 말한다. 천상세계나 인간은 선도이고, 지옥, 아귀, 축생은 악도이다. 또 지극히 상식적인 견해로서 도덕율에 입각하여 과보를 예측해서 말하기도 한다. 가령 살생(殺生)업을 많이 지으면 병에 잘 걸리거나 수명이 짧아지며 투도(偸盜)업을 많이 지으면 가난하게 태어난다. 그리고 사음(邪淫)을 일삼으면 올바른 가정을 이루지 못한다는 등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윤회를 한다면 바로 이 영혼의 존재가 다시 다른 몸을 받아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도의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는 어떤 존재가 죽어 육체가 없어지면 영혼과 같은 존재인 아뜨만(atman)이라는 자아(自我)나 지바(jiva)라는 생명원리가 있어 윤회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무아(anatman)를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윤회를 한다해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영혼과 같은 어떤 것이 일정하게 옮겨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옮아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통해서 계속하는 것이므로 고정된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난다 할 때 죽은 자와 태어난 자 사이에 불가분리의 관계는 있으나, 죽은 자가 바로 태어난 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천년 전에 땅에 심어졌던 밀 알이 천년 후의 밀 알로 이어질 수는 있지만, 천년 전에 밀밭에 심어졌던 밀 알이 천년 후의 밀밭에서 수확한 밀 알과 동일하지는 않으며, 없어지고 생겨나는 현상의 반복이 있다 하더라도 고정 불변의 실체가 이어지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없어지고 생겨나는 것은 변화의 과정이며 이 변화의 과정을 이어주는 것이 업력이다. <밀린다 팡하>에서 나가세나 존자가 이런 말을 하였다. “다시 태어나는 자와 죽은 자는 다르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는 자는 죽은 자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난 자는 죽은 자가 지은 업의 과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3월 ((제16호)

불교의 근본교리 (12)윤회설

천상과 지옥은 인간이 한 생애에서 지은 업이 가장 좋게 나타나고 가장 나쁘게 나타나는 것을 상징해 놓은 세상이다. 윤회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인간이 죽고 난 후에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에서이다. 또한 뭇 생명체들의 생명자체의 상호 상관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윤회설을 통해서 밝혀진다. 그런데 이 윤회설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인간의 업이다. 결국 인간의 업 카르마(karma)가 다른 도(道)의 생을 결정하므로 인간의 업에 의해서 육도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윤회 속에 여러 갈래의 세계가 있지마는 그 중심은 인간세상이라는 말이다.

인간세상이 중심이 되어 그 과보의 극선(極善), 극악(極惡)이 천상과 지옥인데 이 외에 아수라(阿修羅 asura)와 아귀(餓鬼 preta), 축생(畜生 tiryak)를 합하여 육도(六道)라 하고 아수라를 빼어 오도(五道)라 하기도 한다. 또 중국 불교에서는 신선(神仙)을 넣어 칠취(七趣)라 하기도 했다 취(趣)나 도(道 혹은 途)는 같은 뜻이다.

아수라는 싸우기를 좋아하는 무리들로 원래 악도로 취급했는데 천상과 투쟁을 벌리는 존재들로 불법을 들을 수 있는 인연이 있어 인간, 천상과 함께 선도 취급을 받기도 한다. 원래 용모가 단정하지 못하다 하여 무단(無端)이라 번역하기도 하고 천상의 인간류가 아니라 해서 비인(非人)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아수라들도 도리천에 사는데 복은 하늘 무리와 같으나 못생기고 싸움을 좋아하는 점이 하늘 무리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쁜 여자는 곁에 있으나 좋은 음식이 없고 하늘 무리들은 좋은 음식은 있으나 미인이 부족하여 서로 부족한 것을 빼앗아 채우기 위하여 싸움을 한다고 한다.

난장판이 되었다는 말은 흔히 수라장이 되었다고 하는데 수라는 아수라의 준말이다. 아귀(餓鬼)는 배고픈 귀신이란 뜻이다. 예로부터 사람이 죽은 다음에 영(靈)이 되어 귀신이 된다는 설이 있었다. 불교에서 영혼을 천도(薦度)하는 풍습이 있다. 이를 천도재(薦度齋)라 하는데 이때 죽은 사람을 영가(靈駕)라 한다. 이 영가도 중생이다.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의 영가도 중생의 범주에 속한다는 말이다. 마치 사람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어 악몽에 시달릴 때는 꿈속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처럼 죽은 이의 영가가 괴로움에 시달리는데 그 괴로움을 소멸시켜 주는 것이 천도이다.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 신통(神通)이 가장 빼어났던 목련존자가 어머니가 아귀도에 떨어진 것을 구해내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에 의하여 생긴 풍습이 우란분(盂蘭盆)절의 조상 천도 풍습이다. 우란분이란 ullambana의 음역한 말로 죽은 영혼이 거꾸로 매달려 고통받고 있는 것을 구해 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의역(意譯)할 때는 구도현(救倒懸)이라 한다. 이 아귀들은 항상 배고픈 고통에 시달리며 목이 말라 갈증을 느끼며 항상 물을 찾는데 아귀들의 눈에는 물이 불로 보인다고 한다.

축생은 짐승들의 세계를 말한다. 물론 새나 물고기 종류들도 이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제외한 지상의 모든 생명체가 축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어리석은 중생계라 이 세상의 참된 이치를 알지 못하는 세계이다.

지옥, 아귀, 축생을 삼악도(三惡道)라 한다. 악업의 과보로 태어나는 곳이다. 예로부터 수행자들을 경책(警策)한 말에 사람몸(人身)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죽은 다음에 악도에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이다. 가령 사람이 죽고 난 다음 생에 축생의 몸을 받던지 아귀의 몸 등을 받는다면 사람 몸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사람이 죽어 짐승의 몸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설화 속에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윤회설의 또 다른 상징적인 의미는 바른 길을 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는 뜻이다. 자기가 있어야 할 곳 본래의 자리(定處)를 잃어버리고 헤매고만 있다는 뜻이다. 나고 죽는 생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결국 나쁜 업을 청산하지 못하여 잘못된 갈래의 길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란 뜻이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2월 (제15호)

불교의 근본교리 (11)윤회설

천상이 가장 좋은 복을 누리는 곳인 반면 지옥은 가장 극심한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악업을 많이 지은 중생들이 태어나는 곳으로 원래 땅 밑에 있는 감옥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범어로는 나라카(naraka) 또는 나라야(naraya)라 하며 음역(音譯)할 때는 나락가(那落迦), 나락(奈落), 그리고 니려야(泥犁耶), 니려(泥犁)라 표기합니다. 가장 나쁜 상태의 생을 받아 온통 괴로움만 당하는 곳으로 현세에 악업을 지은 자가 내세에 그 과보를 받아 이곳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분히 인과의 법칙을 설명하는 이론에서 나온 설이기도 합니다. 경론(經論)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의 지옥을 설명하고 있으나 보통 팔열(八熱)지옥 팔한(八寒)지옥 고독(孤獨)지옥 등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또 십팔니려경(十八泥犁經)에는 18개의 지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구사론(俱舍論)의 설명입니다. 팔열지옥은 여덟 곳의 뜨거운 고통이 있는 지옥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①무간(無間)지옥: 고통을 잠시도 쉬지 않고 받음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아비(阿鼻)지옥이라고도 함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이 전혀 없는 곳 ②극열(極熱)지옥: 서로의 몸에서 사나운 불길이 뿜어져 나와 서로에게 화상을 입혀 그 고통이 극심한 곳 ③염열(炎熱)지옥: 불이 몸에 닿아 돌고 그 불꽃에 몸이 타서 뜨거워 견딜 수 없는 곳 ④대규(大叫)지옥: 극심한 고통에 못 이겨 고함을 지르게 울부짖는 곳 ⑤호규(號叫)지옥: 고통에 못 이겨 누구를 부르며 비명을 지르는 곳 ⑥중합(衆合)지옥: 여러 가지 고통이 한꺼번에 몸에 와 닿음으로 붙여진 이름 ⑦흑승(黑繩)지옥: 검은 밧줄로 먼저 신체 수족을 묶어 놓고 뒤에 도려 파는 고통을 주는 지옥 ⑧등활(等活)지옥: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몸에 와 닿으나 죽지는 않고 소생하여 다시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 계속 되는 곳이 있습니다. 팔한(八寒)지옥은 추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여덟 곳의 지옥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①마하발특마(摩訶鉢特摩)지옥: 마하 발특마란 큰 붉은 연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극심한 추위 때문에 몸이 터져 찢어 벌어진 것이 큰 붉은 연꽃과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 ②발특마(鉢特摩)지옥: 추위 때문에 몸이 터지고 찢어진 것이 붉은 연꽃과 같은 지옥 ③온발마( 鉢摩)지옥: 추위 때문에 몸이 터지고 찢긴 것이 푸른 연꽃과 같은 지옥 ④호호파(虎虎婆)지옥: 추운 고통응 견디지 못하여 호호파라는 소리를 지르므로 붙여진 이름 ⑤학학파(  婆)지옥: 하하바라는 소리를 지르므로 붙혀진 이름 ⑥알석타( 析咤)지옥: 아타타라는 소리를 지름으로 붙여진 이름 ⑦니날부타(尼剌部陀)지옥: 추위가 몸에 닥쳐 수포(水 )가 찢어짐으로 붙여진 이름 ⑧알부타( 部陀)지옥: 극심한 추위가 몸에 와 닿아 물짐이 생기므로 붙여진 이름 이 있습니다. 팔한 지옥의 이름은 이성어(擬聲語)나 의태어(擬態語)로 되어 있습니다.

팔열지옥을 팔대(八大)지옥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에 부수된 증(增)지옥이 16개나 있다 합니다. 증(增)이라는 말은 고통이 늘어났다 증가되었다는 말로 지옥의 처한 환경이 처참함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예로부터 지옥 변상(變相0이라 하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나타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또 각 지옥에는 감옥을 지키는 옥졸(獄卒)이 있다 하며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이 옥졸을 거느리고 지옥을 다스린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본래 도교에서 불교로 흡수된 이야기입니다. 천상이 선업의 과보인 반면 지옥이 악업의 과보라는 것은 이미 설명했지만 결국 이러한 이야기들은 인간의 행위를 문제 삼아서 한 것입니다. 나의 행위가 남에 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간단한 원칙이 선악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천상과 지옥의 이야기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1월 (제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