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에서 맨 먼저 나오는, 입으로 지은 업을 깨끗이 하는 진언이 바로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입니다. 여기서 <수리>는 ‘길상존(吉祥尊)’이란 뜻입니다. <마하수리>에서 <마하>는 ‘크다’는 뜻이어서 <마하수리>는 ‘대길상존’이 됩니다. 또 <수수리>의 <수>는 ‘지극하다’는 뜻이어서 <수수리>는 ‘극길상존’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의 <사바하>는 앞의 내용을 결론 짓는 종결의미로 사용되는 정형구로써 그 뜻은 ‘구경, 원만, 성취, 억념, 산거.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를 풀이해서 읽어보면 ‘길상존이시여, 길상존이시여, 대길상존이시오, 극길상존이시여, 그 길상이 원만히 성취도소서’가 됩니다. 여기에서 ‘길상’은 다시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축원과 찬탄입니다. 남을 위해 축원해 주고 찬탄을 하는 것은 길상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상대방의 좋은 점을 칭찬해 주고, 또 그의 근본적인 인간성을 찬탄해 주면서 축복해 주는 것이 <수리>의 진언 속에 숨어 있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수리>의 구체적인 표현은 어느 것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칭찬하고 축원하는 말이라면 모두 <수리>의 뜻이 됩니다. 예를 들어, ‘행복하십시오, 훌륭하십니다, 장하십니다, 성공할 것입니다, 잘 될 것입니다’등의 칭찬과 찬탄과 상대방을 향한 긍정적인 표현은 <수리> 속에 모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를 ‘행복하십시오’로 바꾸어 보면, ‘행복하십시오, 행복하십시오, 크게 행복하십시오, 지극히 행복하십시오, 그 행복이 영원하십시오’라는 뜻이 됩니다. 또 ‘훌륭하십니다’로 바꾸어 보면,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진언은 그것이 함축하고있는 뜻이 깊고 넓기 때문에 잘못 해석하면 그 본래의 뜻과는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엄청난 구업을 짓게 됩니다. 그렇게 지은 구업을 참회하고 깨끗이 하려면 남을 칭찬해 주고, 찬탄해 주고, 축복해 주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칭찬하고 찬탄하는 일은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이유를 막론하고 해야 합니다.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속에는 입으로 지은 모든 업을 소멸하는 뜻도 있지만 그와 아울러 공덕을 쌓는 일도 이 진언 속에 들어 있습니다. 마치 그릇 속에 금덩어리를 담으려면 그릇에 담겨 있는 쌀이 귀중하지만 그것을 버려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진언을 외우는 일은 업장을 비우는 일도 되지만 공덕을 담는 일도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언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성취시켜 주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업장소멸과 공덕을 동시에 이루는 일은 결국 남을 칭찬하고 찬탄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정구업진언> 속에는 남을 찬탄하고 칭찬해 주는 <수리>가 다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것은 건성으로, 입에 발린 말로 칭찬하고 축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나타내주며, 그것은 곧 부처님의 자비와 위대함이 엿보이는 대목인 것입니다. 남을 칭찬해 주고, 찬탄하는 일 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습니다. 남을 향한 칭찬과 축원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근본적으로 하나입니다. 기도란 바로 부처님과 자기 자신이 하나가 되는 길인 것입니다. 남을 비난하고 헐뜯고 욕하는 일은 둘이 되는 길입니다. 오랫동안 서로 칭찬해 주며 일심동체로 하나이던 부부가 서로 안 좋은 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둘로 갈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로 나누어지는 것은 진리의 원칙에서 어긋나는 일입니다. 둘로 나누어지는 원인의 첫째가 바로 구업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정구업진언>을 『천수경』의 맨 첫 머리에 둔 것입니다. 절에서 받는 보살계에도 열 가지 크고 무서운 죄 가운데 다섯 가지가 거듭 반복해서 남을 비난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에 의해서 짓는 업에 대해 경전 곳곳에서 강조하셨습니다. 『아함경』에서는 “어떤 경우라도 남을 절대 비난하지 말라. 비난하는 것은 마치 피를 물고 남을 향해 뿌리는 것과 똑같다”고 했습니다. 남을 향해 피를 뿌릴 때 남에게 피가 닿기 전에 먼저 자기의 입 속에 피를 머금게 되는 것입니다. 말의 위력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어서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정구업진언>의 교훈은 바로 하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되고, 그래서 하나인 진리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구업진언>의 뜻은 참으로 엄청난 교훈이고 어떤 닫혔던 문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아무리 두터운 장벽으로 막혀 있다고 해도 서로 칭찬해 주고 찬탄해 버리면 모든 갈등이 사라져 버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많은 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이 『천수경』입니다. 그 『천수경』의 첫 머리가 <정구업진언>으로 되어 있으며 그 뜻이 남을 칭찬해 주고, 축복해 주고, 찬탄해 주는 말로 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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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수경의 사상
관세음보살의 무한한 자비심을 본받아야 『천수경』의 본래 이름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인데 그것을 줄여서 그냥 『천수경』이라고 부릅니다. 경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천수경』은 관세음보살의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수경』의 주인공은 관세음보살이며, 그 내용은 관세음보살의 자비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은 자비스럽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감싸 주시고, 보살펴 주시고,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천 개의 손과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찌 천 개의 손과 눈뿐이겠습니까? 천만 억 손과 눈으로도 오히려 부족한 것입니다. 결국 천 개의 손과 눈은 관세음보살의 무한한 자비심의 한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온갖 소리를 굽어 관철하시며 그 소리를 헤아려 주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인간에게 고통이 있고 문제가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어려움과 문제를 통해서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고, 그런 것을 통해서 지혜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의 눈을 뜸으로써 인생의 참다운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며 자신이 성취하고자 했던 것을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고통과 어려움과 문제들을 모두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원력을 세운 분입니다. 앞으로 공부하게 될 『천수경』을 통해서 바로 이러한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심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수용해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자비하신 어머니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천수경』은 외우기 좋도록 재구성된 것인데 반해 팔만대장경 안에 있는 원래의 『천수경』은 그 양이 훨씬 많습니다. 본래의 『천수경』에서 열 가지 원(願)과 여섯 가지 향(向)과 대다리니를 발췌하여 의식을 집행할 때 독송하는데 적합하도록 재구성하고 재편집한 것이 바로 우리가 자주 접하는 『천수경』입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신앙심 또한 깊습니다. 『천수경』은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심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경전입니다. 또한 『천수경』 공부를 통해 교리적인 면보다 관세음보살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가지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당나라 때 소동파의 누이동생으로 소소매(蘇小妹)라는 보살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지은 글 중에 『관음예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관세음보살을 찬탄하고 자비를 표현한 매우 아름답고 간절한 마음을 담은 글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의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천수경』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여기에 지한스님이 번역한 것을 몇 편 인용하면서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회로 삼을까 합니다. 지심정례공양 중생의 세상 백천억 국토마다 자재하신 몸 달같이 나투시니 짝할 바 없네 무령한 저 자비여 관세음 관세음 자비하신 어머니여 원하옵나니 자시시여 이 도량에도 밝아오사 저희들의 작은 공양을 받아 주소서 <관세음보살 5> 중에서 지심정례공양 메아리 응답하듯 부르는 소리 낱낱이 찾아 고통 구해 주시고 천강에 밝은 달 비치듯 소원 발하는 이미다 큰 안락 주시는 이여 가없는 중생의 아픔 끝없는 중생의 소원 얼마나 애달팠으면 천의 손이 되셨을까 얼마나 사랑하였기에 천의 눈을 하셨을까 한 중생에 팔만의 병고요 한 중생에 팔만의 번뇌인데 항하사 중생의 고통 모두 씻어 주시는 관세음 관세음 자비하신 어머니여 원하옵나니 자비시여 이 도량에도 밝아오사 저희들의 작은 공양을 받아 주소서 <관세음보살 6> 중에서 『천수경』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지혜를 통하여 바람직한 삶을 제시해 주는 경전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심과 관련 지워 기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잠깐 언급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관세음보살에 대해 기도를 할 때도 간절한 마음가짐으로 무심히 기도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하는 마음속에 온갖 번뇌가 가득 찬 경우가 많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찾을 때는 오직 관세음보살만 찾으면 그뿐입니다. 기도할 때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면 관세음보살이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방송을 들으려면 듣고자 하는 곳의 채널에 맞추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영험을 받으려면 관세음보살과 하나가 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수경』이 비록 짧은 경전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얕거나 짧은 것이 아닙니다. 『천수경』은 앞으로도 우리가 늘 가까이 대할 경전이며, 그 속에 담긴 관세음보살의 사상은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심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져서 일상생활 속에서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지혜가 실천되어야 하겠습니다.
1. 천수경의 위치
※ 한국 불교의 밀교적 요소 한국 불교를 특징지워 말할 때 흔히 대승 불교, 혹은 선불교라고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불교, 가장 발달된 불교로 꽃을 피웠던 대승불교가 선불교와 함께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해지면서 그 두 가지가 함쳐져 있는 양상이 바로 한국불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 불교는 소승 불교, 대승 불교, 선불교 등 여러 가지 불교적 특성을 골고루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의 예로서 한국 불교에서 선불교는 굉장히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법문에 들어가기 전에 입정(入定)이라고 하여 참선을 하거나 전문적으로 참선 공부에 열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결국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며, 마음의 안정이 깊어지면 그것은 곧 삼매로 이어집니다. 그 삼매를 통해 바람직한 지혜가 생긴다고 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서도 정은 그 중심에 들어 있습니다. 정에 해당되는 부분이 바로 참선인데 한국 불교는 그 부분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며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 불교의 또 다른 일면으로 대승 불교를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후기 대승 불교의 특색에는 그 안에 밀교적 색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승 경전 속에서 밀교적 요소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공부하려고 하는 『천수경』도 다분히 밀교적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밀교경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흔히 대승 경전의 대표적 경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반야심경』도 따지고 보면 그 속에 밀교적 색채가 담겨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연기(緣起)의 기본이 되는 공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마지막 부분에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와 같은 주문이 바로 밀교의 한 부분에 해당합니다. 대승 경전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며, 부처님의 모든 진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화엄경』에서도 선재동자가 50선지식을 친견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안에는 밀교적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또 『능엄경』에도 ‘능엄주’라고 하는 주문이 상당히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오로지 참선에만 전념하는 선방에서도 독송하여 참선 생활의 일부로 삼고 있기에 ‘능엄주’를 외우는 일 자체는 선이 아니라 밀교의 색채를 띤 부분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한국 불교 안에는 참선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일상적인 신앙생활 속에는 밀교적 색채가 상당히 뿌리 깊게 스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비밀스러운 한 부분으로 특징지워져 그러면 대승 경전 속에는 왜 밀교적인 부분이 필요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반야심경』에서 공에 대한 도리를 모두 밝혔습니다. 그리고는 그 마지막에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고 하는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범어로 결론을 맺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 철학을 다 설명했지만 그래도 어디엔가 감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니지만 말하자면 모두 다 드러내 놓으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감추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인간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심리에서 출발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밀교라고 하는 것은 대승 불교의 마지막 꽃을 피운 한 부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서 모든 설법을 남김없이 다 마치신 후에 그것이 모두 방편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게 방편이었다고 선언하시면서도 끝에 가서는 결국 알지 못하는 진언(다라니)을 한 쪽 남겨 놓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밀교의 흔적입니다. 그 숨겨 놓은 비밀스러운 한 부분을 해석해 보아도 본문과 크게 다르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수경』에 나오는 다라니를 위시해서 『반야심경』에서 보이는 주문이나 『능엄경』의 ‘능엄주’ 등에서 보듯이 진언의 그 뜻을 해석해 놓고 보면 알아서는 안 될 그러한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제는 불교신자들도 이런 점에 눈을 떠야 합니다. 요즈음은 모든 것이 알려지는 세상입니다. 따지고 보면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 그 뜻을 모르고 외워온 진언들도 이제는 그 내용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천수경』속에는 ‘진언’ 혹은 ‘다라니’라고 하는 것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천수경』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뜻도 요즈음에는 법회 등에서 해석되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비밀스럽게 여겨왔던 다라니를 해석함으로써 그 뜻을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신심이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수경』의 뜻을 풀이해서 이해하는 일은 신앙심을 더욱 고취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 제일 중요한 경전 『천수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집대성한 것을 팔만대장경이라고 합니다. 『천수경』은 팔만대장경 속에 들어 있는 것 중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많고 많은 경전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천수경』이 왜 그토록 많이 읽히는 것일까요? 그렇게 많이 읽히는 것으로 보면 팔만대장경 속에서 제일 중요한 경전이라고 말해도 가히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천수경』은 대승 불교를 수용하고 있는 한국 불교에서 불자들의 신앙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한국 사람이 제일 많이 먹는 것이 밥과 국이 듯 『천수경』이 우리 마음에, 신앙에, 정신에 밥과 국처럼 스며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천수경』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대하게 되는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천수경』은 그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경전입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나 어느 때라도 『천수경』을 외우는 것은 『천수경』속에는 어떤 부정한 것이나 꺼림칙한 것들도 모두 청소가 되어 청정해지는 위신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수경』은 교리적인 면보다는 신앙적인 색채가 짙은 경전에 속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불교 신앙의 근간이 되어온 『천수경』을 섣불리 해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신심이 더욱 향상된다면 그것은 보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이런 기회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닦고 실천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