卽非 논리로 깨달음 세계 접근 지성·상식 타파하는 부정에서 출발 주관배제‘있는 그대로의 진여’가르쳐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 불린다.”금강경은 비교적 짧은 경전이면서도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그리 용이하지 않다. 우리가 금강경을 읽으면서 어려움을 느끼는 점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어법이 종종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금강경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는 말이 등장한다. 이러한 어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금강경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불교용어들이 대개 이러한 문장의 틀 속에서 언급되고 있다. 금강경 사상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러한 문장 형식에 담겨 있는 의미를 파악할 때 비로소 금강경의 메시지가 근본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상식 또는 합리적 이성에 배치된다는 점에 이해의 어려움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위에서 인용된 문장을 기호화하여 분석해 보면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①A는 A라고 하지만, ②A는 A가 아니다, ③그러므로 A는 A이다 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①에 대해서는 이견을 갖지 않는다. 우리의 합리적 이성에 합치될 뿐만 아니라 상식에도 일치하는 것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②에 대해 의아하게 여긴다. 논리학의 기본원칙인 모순율 즉 ‘A는 비(非)A가 아니다’는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A는 비A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A가 곧 A가 아니다’ 라고 하는가. 그러나 반야사상은 ②에서와 같이 우리의 지성과 상식의 울타리를 돌파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①은 우리에게 상식을 가르쳐주지만, ②는 우리에게 상식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근본적으로 반성해 볼 수 있는 부정의 정신을 심어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딜렘마,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지게 된다. 하나의 주장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상식에 따르자니 엄연히 반성이 존재하고, 반성을 따르자니 상식이 저항하는 꼴이다. 선종에서의 화두·공안은 바로 이와 같은 기능을 갖는다. 화두는 우리를 상식에 어긋나는 상황으로 인도한다. 심지어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부처님의 말씀에 대립되는 것을 제시하기도 한다. 유명한 조주(趙州, 778-897)스님의 무자(無字) 화두가 그것이다. ‘모든 중생에 불성이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익히 알고 있던 조주 문하의 한 스님이 비루먹은 개를 보고 저렇게 천한 것에도 과연 불성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조주스님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제기했을 때 스님의 답변은 의외로 ‘없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의문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부처님은 있다고 하시는데, 우리 큰스님은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관념에서 벗어나 삶의 세계, 사실의 세계로 돌아옴으로써만 해결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는 바와 같이 세계는 끊임없이 변한다. 변화라는 것은 차이성과 동일성이 공존함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삶도 생과 사가 겹쳐 있다. 살아가는 과정이 곧 죽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도 세계도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적극적으로 말하여 모순이야말로 세계의 실상이다. 관념에서의 모순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세계를 대립과 갈등의 구조로 파악한다. 그러나 삶의 세계에서는 모순이 공존하며 나아가 서로서로 스며들어 하나를 이룬다. A는 A이면서 동시에 비A인 것이다. ③에서 A가 다시 긍정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반성을 경유하여 확인되고 있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인식이다. 이것은 주관의 왜곡됨이 없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으로서 깨달음의 세계, 진여(眞如, tathat )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금강경의 이러한 사상은 즉비(卽非)의 논리로 불리기도 한다. 즉비의 논리는 금강경의 핵심사상이면서 반야사상의 근간을 이룬다. 나아가 선사상에도 깊이 침투하여 화두의 형식으로 귀결되고 있다. 우리는 송나라 청원유신(靑原惟信) 스님의 말씀 속에서도 이러한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스님의 말씀은 ‘30년전 참선 공부를 하기 전에는 산은 산, 물은 물이더니 여러 선지식을 참견하고 조금 깨친 바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게 온전히 깨치고 보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이해함으로써 이 유신스님의 수행과정, 깨달음의 세계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정호영<충북대 철학과 교수> 卽非 논리로 깨달음 세계 접근 지성·상식 타파하는 부정에서 출발 주관배제‘있는 그대로의 진여’가르쳐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 불린다.”금강경은 비교적 짧은 경전이면서도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그리 용이하지 않다. 우리가 금강경을 읽으면서 어려움을 느끼는 점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어법이 종종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금강경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는 말이 등장한다. 이러한 어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금강경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불교용어들이 대개 이러한 문장의 틀 속에서 언급되고 있다. 금강경 사상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러한 문장 형식에 담겨 있는 의미를 파악할 때 비로소 금강경의 메시지가 근본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상식 또는 합리적 이성에 배치된다는 점에 이해의 어려움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위에서 인용된 문장을 기호화하여 분석해 보면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①A는 A라고 하지만, ②A는 A가 아니다, ③그러므로 A는 A이다 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①에 대해서는 이견을 갖지 않는다. 우리의 합리적 이성에 합치될 뿐만 아니라 상식에도 일치하는 것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②에 대해 의아하게 여긴다. 논리학의 기본원칙인 모순율 즉 ‘A는 비(非)A가 아니다’는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A는 비A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A가 곧 A가 아니다’ 라고 하는가. 그러나 반야사상은 ②에서와 같이 우리의 지성과 상식의 울타리를 돌파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①은 우리에게 상식을 가르쳐주지만, ②는 우리에게 상식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근본적으로 반성해 볼 수 있는 부정의 정신을 심어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딜렘마,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지게 된다. 하나의 주장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상식에 따르자니 엄연히 반성이 존재하고, 반성을 따르자니 상식이 저항하는 꼴이다. 선종에서의 화두·공안은 바로 이와 같은 기능을 갖는다. 화두는 우리를 상식에 어긋나는 상황으로 인도한다. 심지어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부처님의 말씀에 대립되는 것을 제시하기도 한다. 유명한 조주(趙州, 778-897)스님의 무자(無字) 화두가 그것이다. ‘모든 중생에 불성이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익히 알고 있던 조주 문하의 한 스님이 비루먹은 개를 보고 저렇게 천한 것에도 과연 불성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조주스님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제기했을 때 스님의 답변은 의외로 ‘없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의문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부처님은 있다고 하시는데, 우리 큰스님은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관념에서 벗어나 삶의 세계, 사실의 세계로 돌아옴으로써만 해결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는 바와 같이 세계는 끊임없이 변한다. 변화라는 것은 차이성과 동일성이 공존함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삶도 생과 사가 겹쳐 있다. 살아가는 과정이 곧 죽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도 세계도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적극적으로 말하여 모순이야말로 세계의 실상이다. 관념에서의 모순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세계를 대립과 갈등의 구조로 파악한다. 그러나 삶의 세계에서는 모순이 공존하며 나아가 서로서로 스며들어 하나를 이룬다. A는 A이면서 동시에 비A인 것이다. ③에서 A가 다시 긍정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반성을 경유하여 확인되고 있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인식이다. 이것은 주관의 왜곡됨이 없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으로서 깨달음의 세계, 진여(眞如, tathat )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금강경의 이러한 사상은 즉비(卽非)의 논리로 불리기도 한다. 즉비의 논리는 금강경의 핵심사상이면서 반야사상의 근간을 이룬다. 나아가 선사상에도 깊이 침투하여 화두의 형식으로 귀결되고 있다. 우리는 송나라 청원유신(靑原惟信) 스님의 말씀 속에서도 이러한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스님의 말씀은 ‘30년전 참선 공부를 하기 전에는 산은 산, 물은 물이더니 여러 선지식을 참견하고 조금 깨친 바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게 온전히 깨치고 보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이해함으로써 이 유신스님의 수행과정, 깨달음의 세계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정호영<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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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상)
선정 통해 부처님 설법 확인 보살은 어떤 相에도 집착 말아라 금강경은 대승 최초기에 성립된 반야경들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잠시 반야가 무엇이며, 반야경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그리고 금강경은 그러한 반야경 가운데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반야는 일상적인 용어로는 지혜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지혜라고 바꾸어 말한다고 하여 그 의미가 명료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삶의 지혜’라고 할 때 이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누적된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면, 그 지혜는 단순히 세간적 지식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반야는 세간적 지식이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그러한 지식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반야는 세간적인 사유방법을 뛰어 넘은 새로운 인식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를 담고 있다. 상식의 잣대로는 반야경의 말씀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러 반야경에는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며, 머무는 것 또한 아니다”(不來不去 亦不住)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전의 말씀은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니 머무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경전은 머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반야는 이러한 사실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의 앎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 선다. 그러면 이러한 반야는 어떻게 하여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깊은 명상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다. 한 때 대승비불설 즉 대승경전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여 반야경을 포함한 대승경전의 가치를 부정하는 주장이 있었다. 확실히 대승경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성의 말씀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깊은 종교체험의 의의를 간과하는 것이다. 반주삼매(般舟三昧)라는 것이 있다. 번역하여 관불(觀佛)삼매라고도 한다. 깊은 선정에 잠겨 있는 동안 부처님을 친견하는 체험을 말한다. 반야경은 이러한 관불삼매의 경험을 통해 확인한 부처님의 설법을 기록한 문헌이다. 다시 말하면 반야경 그 자체가 선적 체험의 결과라는 것이다. 금강경, 정확히 말하여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은 반야경들 가운데 가장 일찍 성립된 경전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금강경에는 다른 반야경들에 빈번히 등장하는 공이라는 말이 없으며, 산스크리트본에는 대승(mah y na)이라는 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의 형식도 지극히 간결하며, 부처님의 설법 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설명하는 대목도 매우 간단하다. 그러면서도 금강경은 반야사상을 매우 명료하게 담고 있다.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의 형식을 취한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보살의 길로 나아가는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실천하고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 보살의 생활과 수행과 마음가짐에 대해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 말씀은 무집착으로 요약된다. 무주상(無住相)보시도 그 한 예이다. 어떠한 상(相)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철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되기도 한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에게는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중생’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생명’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개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수보리여, 이들 보살마하살에게는 물건(法)이라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물건이 아니라(非法)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수보리여, 그들에게는 생각하는 일도 생각하지 않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요약하면 보살은 아(我), 인(人), 중생(衆生), 수자(壽者)의 네 가지 생각과 법·비법의 두 가지 생각 그리고 상(想)·비상(非想)의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앞의 네 가지는 인아(人我)를, 중간의 두 가지는 법아(法我)를, 그리고 마지막의 두 가지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금강경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무아·법무아를 설하고 나아가서는 생각과 생각하지 않음을 가르는 미혹된 생각조차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금강경은 여래가 수많은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지만, 실은 열반으로 인도하는 여래도 열반으로 인도된 중생도 없다고 한다. 금강경은 금강경이 성립된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에도 많은 사본을 남길 정도로 매우 대중적인 경전이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여러차례 번역이 되면서 당나라 때에 이미 800여종의 주석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선종의 6조 혜능 스님의 깨달음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되면서 금강경은 선종의 주된 소의경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정호영<충북대 철학과 교수> 선정 통해 부처님 설법 확인 보살은 어떤 相에도 집착 말아라 금강경은 대승 최초기에 성립된 반야경들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잠시 반야가 무엇이며, 반야경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그리고 금강경은 그러한 반야경 가운데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반야는 일상적인 용어로는 지혜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지혜라고 바꾸어 말한다고 하여 그 의미가 명료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삶의 지혜’라고 할 때 이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누적된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면, 그 지혜는 단순히 세간적 지식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반야는 세간적 지식이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그러한 지식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반야는 세간적인 사유방법을 뛰어 넘은 새로운 인식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를 담고 있다. 상식의 잣대로는 반야경의 말씀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러 반야경에는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며, 머무는 것 또한 아니다”(不來不去 亦不住)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전의 말씀은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니 머무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경전은 머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반야는 이러한 사실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의 앎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 선다. 그러면 이러한 반야는 어떻게 하여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깊은 명상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다. 한 때 대승비불설 즉 대승경전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여 반야경을 포함한 대승경전의 가치를 부정하는 주장이 있었다. 확실히 대승경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성의 말씀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깊은 종교체험의 의의를 간과하는 것이다. 반주삼매(般舟三昧)라는 것이 있다. 번역하여 관불(觀佛)삼매라고도 한다. 깊은 선정에 잠겨 있는 동안 부처님을 친견하는 체험을 말한다. 반야경은 이러한 관불삼매의 경험을 통해 확인한 부처님의 설법을 기록한 문헌이다. 다시 말하면 반야경 그 자체가 선적 체험의 결과라는 것이다. 금강경, 정확히 말하여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은 반야경들 가운데 가장 일찍 성립된 경전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금강경에는 다른 반야경들에 빈번히 등장하는 공이라는 말이 없으며, 산스크리트본에는 대승(mah y na)이라는 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의 형식도 지극히 간결하며, 부처님의 설법 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설명하는 대목도 매우 간단하다. 그러면서도 금강경은 반야사상을 매우 명료하게 담고 있다.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의 형식을 취한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보살의 길로 나아가는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실천하고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 보살의 생활과 수행과 마음가짐에 대해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 말씀은 무집착으로 요약된다. 무주상(無住相)보시도 그 한 예이다. 어떠한 상(相)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철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되기도 한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에게는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중생’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생명’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개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수보리여, 이들 보살마하살에게는 물건(法)이라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물건이 아니라(非法)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수보리여, 그들에게는 생각하는 일도 생각하지 않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요약하면 보살은 아(我), 인(人), 중생(衆生), 수자(壽者)의 네 가지 생각과 법·비법의 두 가지 생각 그리고 상(想)·비상(非想)의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앞의 네 가지는 인아(人我)를, 중간의 두 가지는 법아(法我)를, 그리고 마지막의 두 가지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금강경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무아·법무아를 설하고 나아가서는 생각과 생각하지 않음을 가르는 미혹된 생각조차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금강경은 여래가 수많은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지만, 실은 열반으로 인도하는 여래도 열반으로 인도된 중생도 없다고 한다. 금강경은 금강경이 성립된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에도 많은 사본을 남길 정도로 매우 대중적인 경전이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여러차례 번역이 되면서 당나라 때에 이미 800여종의 주석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선종의 6조 혜능 스님의 깨달음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되면서 금강경은 선종의 주된 소의경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정호영<충북대 철학과 교수>
공부하는 아버지, 공부하는 어머니
앞에서 잠깐 올바른 불교 지식의 습득은 공부하는 불자상을 확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기회에 그와 연관지어 교육이란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계속 배우고 갈고 닦는 일로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종교를 가지는 일도 결국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교육이란 흉내나 모방에서 시작합니다. 절에 와서 공부하는 것을 흉내냄으로써 그것이 가정에 까지 연결되어 공부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공부하는 모습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엄청난 것입니다. 부모는 공부하지 않으면서 자식들에게만 자꾸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것은 올바른 교육방법이 못 됩니다. 공부란 학생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에는 전인교육이니 평생교육이니 해서 누구나 평생을 통해서 배워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부모가 공부하는 모습을 계속 보인다면 그 가정의 분위기가 자녀들에게 미치는 교육효과는 참으로 지대할 것입니다. 유태인들이 자랑하는 근래의 인물로, 외교관으로서 명성이 높은 키신저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글자도 모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 아버지가 공부하는 옆에 앉아 항상 아버지의 공부 흉내를 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책장을 한 장 넘기면 어린 키신저도 그 모습을 모고 역시 한 장을 넘겼습니다. 또 한 장을 넘기면 역시 따라서 그 한 장을 넘기며 공부하는 흉내를 내었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교육 문제가 너무 심각하여 때때로 빗나가는 경우도 있는데, 유태인의 교육은 무서울 정도로 대단하다고 합니다. 유태인들은 입학식 날 아이들에게 꿀을 바른 과자 모양의 성경 구절이 적힌 공책을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혀로 핥도록 합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하는 첫 마디가, 공부란 그렇게 달콤한 것이라고 아이들의 의식 속에 심어줍니다. 그래서 공부는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아주 재미있고, 먹으면 자기 몸에 이로운 것이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유태인이 오랜 세월 동안 나라 없이 떠돌아다녔지만 세계에서 자랑할 만한 인물이 많은 것은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항상 강조해 왔으며, 또 그것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부모의 공부에 대한 열성적이고 진지한 태도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큰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불자들만이라도 자녀들에게 실질적으로 모범을 보이는 태도를 몸소 실천해야 합니다. 승가에서는 배우는 일을 가리켜, 옥도 다듬지 않으면 아름다운 물건이 되지 않듯이 사람도 평생을 통해서 배우지 않으면 인생의 참다운 길을 모른다고 하여 ‘옥불탁불성기玉不啄不成器 인불학부지도人不學不知道’라는 비유를 자주 인용합니다. 아주 작은 기계라도 그것을 조작하려면 배워야 합니다. 하물며 인생이라고 하는 거대한 기계를 운영하는 데 올바른 지혜의 배움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란 바로 인생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