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상)

선정 통해 부처님 설법 확인 보살은 어떤 相에도 집착 말아라 금강경은 대승 최초기에 성립된 반야경들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잠시 반야가 무엇이며, 반야경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그리고 금강경은 그러한 반야경 가운데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반야는 일상적인 용어로는 지혜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지혜라고 바꾸어 말한다고 하여 그 의미가 명료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삶의 지혜’라고 할 때 이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누적된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면, 그 지혜는 단순히 세간적 지식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반야는 세간적 지식이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그러한 지식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반야는 세간적인 사유방법을 뛰어 넘은 새로운 인식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를 담고 있다. 상식의 잣대로는 반야경의 말씀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러 반야경에는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며, 머무는 것 또한 아니다”(不來不去 亦不住)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전의 말씀은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니 머무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경전은 머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반야는 이러한 사실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의 앎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 선다. 그러면 이러한 반야는 어떻게 하여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깊은 명상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다. 한 때 대승비불설 즉 대승경전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여 반야경을 포함한 대승경전의 가치를 부정하는 주장이 있었다. 확실히 대승경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성의 말씀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깊은 종교체험의 의의를 간과하는 것이다. 반주삼매(般舟三昧)라는 것이 있다. 번역하여 관불(觀佛)삼매라고도 한다. 깊은 선정에 잠겨 있는 동안 부처님을 친견하는 체험을 말한다. 반야경은 이러한 관불삼매의 경험을 통해 확인한 부처님의 설법을 기록한 문헌이다. 다시 말하면 반야경 그 자체가 선적 체험의 결과라는 것이다. 금강경, 정확히 말하여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은 반야경들 가운데 가장 일찍 성립된 경전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금강경에는 다른 반야경들에 빈번히 등장하는 공이라는 말이 없으며, 산스크리트본에는 대승(mah y na)이라는 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의 형식도 지극히 간결하며, 부처님의 설법 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설명하는 대목도 매우 간단하다. 그러면서도 금강경은 반야사상을 매우 명료하게 담고 있다.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의 형식을 취한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보살의 길로 나아가는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실천하고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 보살의 생활과 수행과 마음가짐에 대해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 말씀은 무집착으로 요약된다. 무주상(無住相)보시도 그 한 예이다. 어떠한 상(相)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철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되기도 한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에게는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중생’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생명’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개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수보리여, 이들 보살마하살에게는 물건(法)이라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물건이 아니라(非法)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수보리여, 그들에게는 생각하는 일도 생각하지 않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요약하면 보살은 아(我), 인(人), 중생(衆生), 수자(壽者)의 네 가지 생각과 법·비법의 두 가지 생각 그리고 상(想)·비상(非想)의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앞의 네 가지는 인아(人我)를, 중간의 두 가지는 법아(法我)를, 그리고 마지막의 두 가지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금강경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무아·법무아를 설하고 나아가서는 생각과 생각하지 않음을 가르는 미혹된 생각조차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금강경은 여래가 수많은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지만, 실은 열반으로 인도하는 여래도 열반으로 인도된 중생도 없다고 한다. 금강경은 금강경이 성립된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에도 많은 사본을 남길 정도로 매우 대중적인 경전이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여러차례 번역이 되면서 당나라 때에 이미 800여종의 주석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선종의 6조 혜능 스님의 깨달음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되면서 금강경은 선종의 주된 소의경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정호영<충북대 철학과 교수> 선정 통해 부처님 설법 확인 보살은 어떤 相에도 집착 말아라 금강경은 대승 최초기에 성립된 반야경들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잠시 반야가 무엇이며, 반야경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그리고 금강경은 그러한 반야경 가운데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반야는 일상적인 용어로는 지혜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지혜라고 바꾸어 말한다고 하여 그 의미가 명료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삶의 지혜’라고 할 때 이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누적된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면, 그 지혜는 단순히 세간적 지식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반야는 세간적 지식이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그러한 지식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반야는 세간적인 사유방법을 뛰어 넘은 새로운 인식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를 담고 있다. 상식의 잣대로는 반야경의 말씀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러 반야경에는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며, 머무는 것 또한 아니다”(不來不去 亦不住)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전의 말씀은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니 머무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경전은 머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반야는 이러한 사실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의 앎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 선다. 그러면 이러한 반야는 어떻게 하여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깊은 명상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다. 한 때 대승비불설 즉 대승경전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여 반야경을 포함한 대승경전의 가치를 부정하는 주장이 있었다. 확실히 대승경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성의 말씀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깊은 종교체험의 의의를 간과하는 것이다. 반주삼매(般舟三昧)라는 것이 있다. 번역하여 관불(觀佛)삼매라고도 한다. 깊은 선정에 잠겨 있는 동안 부처님을 친견하는 체험을 말한다. 반야경은 이러한 관불삼매의 경험을 통해 확인한 부처님의 설법을 기록한 문헌이다. 다시 말하면 반야경 그 자체가 선적 체험의 결과라는 것이다. 금강경, 정확히 말하여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은 반야경들 가운데 가장 일찍 성립된 경전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금강경에는 다른 반야경들에 빈번히 등장하는 공이라는 말이 없으며, 산스크리트본에는 대승(mah y na)이라는 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의 형식도 지극히 간결하며, 부처님의 설법 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설명하는 대목도 매우 간단하다. 그러면서도 금강경은 반야사상을 매우 명료하게 담고 있다.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의 형식을 취한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보살의 길로 나아가는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실천하고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 보살의 생활과 수행과 마음가짐에 대해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 말씀은 무집착으로 요약된다. 무주상(無住相)보시도 그 한 예이다. 어떠한 상(相)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철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되기도 한다.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에게는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중생’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생명’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개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수보리여, 이들 보살마하살에게는 물건(法)이라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물건이 아니라(非法)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수보리여, 그들에게는 생각하는 일도 생각하지 않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요약하면 보살은 아(我), 인(人), 중생(衆生), 수자(壽者)의 네 가지 생각과 법·비법의 두 가지 생각 그리고 상(想)·비상(非想)의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앞의 네 가지는 인아(人我)를, 중간의 두 가지는 법아(法我)를, 그리고 마지막의 두 가지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금강경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무아·법무아를 설하고 나아가서는 생각과 생각하지 않음을 가르는 미혹된 생각조차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금강경은 여래가 수많은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지만, 실은 열반으로 인도하는 여래도 열반으로 인도된 중생도 없다고 한다. 금강경은 금강경이 성립된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에도 많은 사본을 남길 정도로 매우 대중적인 경전이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여러차례 번역이 되면서 당나라 때에 이미 800여종의 주석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선종의 6조 혜능 스님의 깨달음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되면서 금강경은 선종의 주된 소의경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정호영<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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