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자비는 집착도 동정도 아닙니다_

자비는 집착도 동정도 아닙니다.

-달라이라마-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비로우며, 자비심은 필수 불가결한 것인 동시에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려는 것이 제 의도입니다.

자비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학파나 종파들마다 사랑과 자비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어떤 기독교도 친구는 신의 은총이 없이는 사랑을 발전시킬 수가 없다고 믿습니다.

즉, 사랑과 자비를 기르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불교도들의…

해석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행복하기를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명백히 인정하는 데서 진정한 자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내 자신의 이익에 개의치 않고, 남들의 행복을 가져오는 일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것이 자비입니다.

우리 자신의 친구들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사실은 집착입니다.

그런 감정은 모든 중생들이 행복해지고 고통을 피할 권리를 똑같이 갖고 있다는 인식에 의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인식이 없이, 무엇인가 ‘나의 것’이고, ‘나의 친구’이고, ‘나’를 위해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집착입니다.

내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면, 그에 대한 친밀감이 즉시 사라집니다.

그것과는 다르게,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남들을 염려하는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동료인간들이고 고통을 피할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무관심하든, 적이든 간에, 우리는 여전히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행복하고 고통을 피할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집착과 자비의 주요 차이입니다.

진정한 자비가 훨씬 건강하고, 편견이 없고, 합리적입니다.

반대로, 집착은 좁은 소견과 편견입니다.

사실상, 진정한 자비와 집착은 모순됩니다.

불교 수행에 의하면, 진정한 자비를 기르려면, 우선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평등심과 평정심에 대해 명상을 해야 합니다.

모든 중생들을 동등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서서히 모든 중생들을 향해 진정한 자비를 기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비는 동정심을 갖거나 남들을 나보다 열등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자비심이 일어나면 남들을 우리 자신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달라이 라마의 아름답게 사는 지혜 中 에서-

혜민스님─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만났을 때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만났을 때

-혜민스님-

우리는 살다 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미움과 분노를 가슴속에 담고 사는 것보다 용서하는 편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그건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현실은 또 그게 아니다.

어떻게 나를 심하게 비방하고 상처와 모욕감을 준 사람을 그리 쉽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온갖 거짓말을 하고도 저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극을 하는 그 사람을 볼 때마다, 혹은 자신의 위치를 남용해서 내가 힘없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무시하고 짓밟았던 그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우리의 상처는 너무도 깊어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이럴 때 상처 준 그 사람을 섣불리 용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용서하려는 마음이 올라오지도 않겠지만 마음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첫걸음은 치솟는 분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처가 깊을 때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한 분노와 미움은 손상된 자아가 그 사람과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긋고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일으키는 지혜로운 감정이다.

분노는 일종의 보호 장벽과도 같아서 깨지고 부서진 자아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회복될 때까지 나름의 역할을 한다.

그 분노를 빨리 내려놓으라고 옆에서 자꾸 종용하는 것은 잘못하면 그 사람을 다시 상처로 내모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상처를 입은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을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떠올리며 자기 스스로를 희생자라는 틀 안에 가두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상처의 기억을 되살릴수록 힘없이 바보처럼 당하기만 했던 본인 스스로가 싫어지고, 마음은 지금 현재를 놓치고 우울한 과거 속에서 분노와 함께 허우적거리기 때문이다.

이럴 때 머리로는 용서하고 털어내자고 결심을 해도 우리의 가슴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또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용서를 할 수 있는지 어디에서도 배운 바가 없기 때문에 머리와 가슴은 완전히 따로 놀아 더 괴로워지기만 한다.

일단 용서에 대한 오해부터 푸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용서는 과거의 기억을 없었던 일로 한다거나, 그 사람의 잘못을 지워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과거 상처에 얽매여 힘든 내 감정의 족쇄를 스스로 풀어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즉, 상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내가 내 안의 비통함과 응어리로부터 자유로워지자고 하는 것이다.

용서가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사람의 잘못에 내가 면죄부까지 주어야 하나 하고 오해를 하기 때문이다.

용서를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에게 한 일들이 괜찮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용서하겠다는 머릿속의 결심을 가슴으로 이끌어주는 중요한 통로는 다름 아닌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다.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일어나는 분노와 미움을 부정하거나, 혹은 자각 없이 그 감정 안에 빠져 지내는 것이 아니고, 자비한 마음의 눈으로 그 감정을 허락하고 지켜보는 것이다.

내 안의 분노와 미움을 따뜻하게 지켜보다 보면 양파가 껍질을 한 겹씩 벗듯 더 깊은 곳에 자리한 감정의 속 모양이 드러난다.

나 같은 경우엔 분노 바로 아래에 슬픔과 비통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더 따뜻하게 지켜보니 또 그 아래에는 불안과 외로움이 더 깊은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아닌 나를 향한 자비의 눈길로 먼저 내 감정들을 지켜보다 보면 신기하게도 굳었던 마음이 점점 녹으면서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고 난 후 그 자비의 눈길을 이번에는 내게 상처 준 상대에게 향해보는 것이다.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아픔이 있었기에 나에게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는지 보는 것이다.

그러면 놀랍게도 전에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상처를 준 사람도 사실 어렸을 때부터 상처가 많았던 사람이라는 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나를 무시하고 으스대던 그 모습 바로 아래에는 그도 역시 남들로부터 외모나 학력, 가난 때문에 과거에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영혼이라는 점이 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나와 똑같이 삶이 외로워서, 아니면 나이 드는 것이 서럽고 불안해서 저러는구나 하는 것이 보인다.

이러한 깊은 진실과 마주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좀 누그러지고 편안해진다.

그 상태에서 불안하고 외로운 다른 세상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내 아픔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면서, 내 안의 비통함은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한 자비함으로 전환되게 된다.

우리 안에는 불안과 외로움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감정을 따뜻하게 지켜보는 마음의 눈이 있다.

삶이 너무 힘들다고 느낄 때, 부디 그 자비한 눈빛과 마주하시길 소망한다.

지광스님─격려하고 칭찬하라 그리고 공양하라

격려하고 칭찬하라 그리고 공양하라

-지광스님-

우리의 현실은 불완전하다.

모두가 불성을 지녔다 하지만 나도 남도 모두 부족하다.

말도 부족하고 생각도 행동도 모두 부족하다.

내가 남에게 하는 말을 생각해 보라.

남을 위한 쓸만한 말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남을 비난하고 비방하고 비판하는 데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우리는 좀 더 어른스러워져야 한다.

부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부처님과 가까워지고 부처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배우면 점차 완전에 가까워진다.

말과 생각과 행동이 법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 주변이 온통 부족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에 그들로부터 듣는 말, 그들이 나에 대해 하는 생각 행동 등이 모두 고통이다.

온통 비난이고 이기심에 가득 찬 악행과 그릇된 생각들 투성이다.

내가 성장하면 할수록 그들의 비방은 커지고 나의 능력이 자라면 자랄수록 시기와 질투도 커진다.

흔히들 도가 높으면 마가 성하다는 얘기처럼 정진하면 정진할수록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주변의 저격병들로 인해 고통이 더해진다.

부처님은 어떠하셨는가? 바라문들과 수많은 어리석은 무리들의 비방과 공격을 감내하시면서 중생제도의 길을 가셨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강조하시면서, 무명의 어리석은 무리들을 깨우치시면서 고행의 길을 가셨다.

우리들 역시 자신을 끝없이 승화시키는 길이 결국 부처의 길이요 결국 그 길이 무량중생들의 제도를 위한 길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부처의 길이 깊은 곳에서 나 혼자만 갈고 닦는다고 되는 길인가? 나 자신 갈고 닦는 길이 결국 보살의 길이요 부처의 길이다.

나를 갈고 닦는 길이 따로 있고 중생들을 제도하는 길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의 길을 가신 것도 중생을 위한 버림의 길이요 무량중생의 제도를 위해 전법의 길을 떠나신 것도 버림의 길이었다.

결국 모든 수행의 길은 버림을 통해있으며 나 홀로 있을 때는 명상 속에 참선 속에 기도 속에 번뇌를 버리고, 대중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 닦은 마음을 실천을 통해 베푸는 것이다.

모든 불행은 이기심 때문이기에 우리의 삶은 내가 남을 대할 때나 남이 내개 향할 때 한결 같이 아상을 내려놓는 삶이어야 한다.

남을 대할 때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질책하기보다는 그들을 부추겨주고 칭찬하고 공양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또 남들이 나에게 비난과 질책과 악행을 가하더라도 그를 선물로 알고 나의 이기심을 녹이는 경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상대방과 하나가 되고 무아심이 되는 길은 그 어떤 비난도 웃어넘기고 어떠한 모함에도 감사하는 것이다.

타인의 좁은 마음에 개의치 않는 길, ‘항상 내 잘못이다’, ‘내 책임이다’ 스스로 수용하는 길이 참수행의 길이다.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많은 비판을 감수해야만 하는 정신적 심리적 거인은 모두를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인다.

참다운 수행자는 심리적 도피구를 만들지 않는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임을 잘 알기에 그들을 제도하지 못한 나 자신을 책망할지언정 그들의 싸움을 거부한다.

참수행자는 어떤 비난에 대해서도 웃으며 답하는 사람들이며 스스로의 부족함으로 나에게 원한을 지닌 영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영가들에게도 용서와 참회를 구한다.

어떠한 영가들도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려들지 않기에 ‘나의 무지와 이기심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음을 참회 한다’고 기도드리며 용서를 구한다.

참수행자들이여! 우리들은 하루 종일 타인과 살고 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이기심이란 악마를 녹여라.

상대방을 위해 모두를 위해 친절을 더하라.

칭찬을 아끼지 말라.

베풀어라.

그들을 부추겨라.

모두를 존경하고 나로 인해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라.

타인을 격려하고 모두를 위해 나를 불태우는 등불이 되라.

광명이 되라.

그 길 가운데 영원한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 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