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스님─ 가까이 있는 분들을 소중히 여겨야

가까이 있는 분들을 소중히 여겨야 – 현성 스님 –

청담스님께서 도선사에 주석하실 때의 이야기를 한 토막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번은 도선사에 지식수준이 높고 교양있는 신도들이 찾아와 법문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법문을 청하면서 한 신도가 자기들은 이런저런 사람들이니 법문을 고급스럽게 해주십사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큰 스님께 ‘절에 이만저만한 분들이 왔으니 법문을 좀 신경써주셔야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스님께서 한번 씩 웃으시더니 ‘알았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법문시간에 스님이 법상에 올라 하시는 말씀은 ‘오늘 아침 밥 먹고 왔습니까.

아버지 어머님께 밥상은 잘 차려드렸습니까’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마치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말하듯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오늘 너희들이 여기 와 앉아있지만 너희들이 진정으로 법문을 들으러 왔느냐’고 덧붙이셨습니다.

삼복더위에 2시간가량 일상에서 매일 듣는 소리를 들으니 끝내 신도 몇이 졸다가 제게 메모로 ‘큰 스님 체면도 있으니 이쯤에서…’라고 알려왔습니다.

메모를 스님께 전했는데도 스님은 여전히 1시간 동안 부모님의 소중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법회가 끝난 후 도반 스님들에게 질책을 받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의 행동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제가 그때의 스님 같은 나이가 되고 보니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스님께서 어른을 잘 받들라고 하시던 말씀은 지식인들의 ‘아상’에 젖은 먹물근성을 꾸짖으면서도 만고의 진리인 효(孝)를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아상에 젖어 남의 말을 곡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늘 가까이에 있는 분들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여기 젊은이와 노인 분들이 같이 계시지만 사실 젊고 늙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젊음이 천년만년 갈 것 같지만 금새 40, 50이 되고 노인이 됩니다.

노인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백행의 으뜸은 누가 뭐라 해도 ‘효’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선(善)은 부모님께 지극정성으로 효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부자는 부모님이 집에 잘 계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악은 부모님께 불효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가난은 부모님이 집에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모는 자식의 효를 원한다면 분별심을 갖고 대해서는 안됩니다.

부모가 분별심을 갖고 대하고 차별하는데 어느 자식이 부모에게 효를 다하겠습니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에게 정성을 다하고 또 내 부모에게 효를 다해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불가(佛家)에서는 간화선이 제일입니다.

의심을 일으키는 화두도 1700가지가 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효’를 화두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부모의 몸을 받기 이전에 어디에 있었는가’ ‘나의 복이 누구와의 인연 때문인가’ ‘무엇이 부모를 즐겁게 하는 것인가’ ‘내가 과연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가’ 청담스님과의 일화를 또 하나 소개합니다.

한번은 스님이 몸이 편찮으셔서 들것에 실려 산행을 하시다가 도선사 초입의 ‘깔딱고개’라는 오솔길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때 스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불교정화 한다고 내 이웃에게 원한을 많이 맺었구나.

만약 그 사람 중에 하나가 이 자리에 나타나 나를 구타한다면 현성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때 저는 갓 군대를 다녀와 젊을 때여서 “은사스님이 눈앞에서 폭행을 당하는데 가만히 있을 제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방에 끝내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저에게 “아서라, 폭력은 깡패나 휘두르는 것이다.

너는 네 옆에서 합장하고 나무아미타불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님은 또 “맞는 순간은 괴롭고 고통스럽겠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맞는 네가 승리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에게 남들이 생활신조가 뭐냐고 물으면 불교의 팔만사천가지 법문이 있지만 청담스님께서 제게 들려주신 ‘남에게 지고 살라’는 법문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부모님께, 남편에게, 자식들에게 화가 나더라도 그 자리에서 버럭 화를 낼 것이 아니라 화두를 잡고 나를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계는 고통의 세계로 부처님께서는 이를 ‘사바세계’로 표현했습니다.

인간이기에 마음자리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며 두껍기도 하지만 얇기도 합니다.

모든 사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모두는 귀한 인간이고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 마음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心爲法本 心尊心使 中心念善 卽言卽行 福樂自追 如影隨形 마음은 모든 법의 근본이요 마음은 모든 법의 가장 으뜸 되는 것이며 그리고 마음에 의해서 모든 것은 이루어지나니 만일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복과 즐거움이 뒤따른다 마치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듯이

혜암스님─어디가든 화합하고 즐겁게 삽시다

어디가든 화합하고 즐겁게 삽시다 혜암 선사

번뇌 망상 없는 청정한 물건이 본래 나 –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사실 평소와 다를게 뭐 있겠습니까? 인간 사는 것이 다 똑같지요.

알고보면 흥하고 망하고 하는 것이 다른데 있지 않아요.

너한테 있는 것도 나한테 있는 것도 아니에요.

순전히 우리 마음을 모르는데 있어요.

우리 마음만 알면 무엇이든 잘 됩니다.

안으로 밖으로 안될 일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 마음을 모르니까 이렇게 걱정 근심 재앙이 자꾸 생기지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마찬가지죠.

국가의 대형사고가 금년에 얼마나 많이 났어요.

알 수 없는 일은 세상사이고 뜻대로 안되는 것도 세상사인데 무얼 어떻게 잘 되길 바라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직장에 대해 충실하고 집안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고 단체의 단결, 화합만 되면 나라도 단체도 집안도 개인도 모두 잘돼요.

개인도 눈 코 귀 입이 화합만 되면 탈이 안나요.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귀는 귀대로 욕심을 부려서 병도 나고 근심도 생기는 것이지 화합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이 잘 됩니다.

나라 일이나 하늘 땅 일이나 우리 몸뚱이나 똑같아요.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자기 일 잘하는 사람은 다른 일도 다 잘 합니다.

자기 일도 못하는 사람이 남을 어떻게 가르치고 도와주겠습니까? 우리 몸뚱이가 하늘이고 땅입니다.

단결 화합하고 어디가든 기쁘고 즐겁게 살아요.

다른 사람 애먹이지 말고.

나도 해롭고 남도 해로운 짓을 뭐하려고 합니까.

짧은 시간에 남도 도우면서 멋있게 살지, 우리가 얼마 산다고 남을 해치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단결, 화합하고 즐겁게 삽시다.

남 즐겁게 해서 내가 손해날 일이 뭐 있겠습니까? 가는데 마다 그런 생각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치에 맞도록 그 법을 어기지 말고 합리적으로 삽시다.

이 몸뚱이를 이치에 맞도록 안해 주니까 배탈도 나고 병도 들고 하는 겁니다.

새해를 맞이해 작년에는 되는대로 살았지만 금년에는 아주 정신을 차려서 남을 기쁘게 도와주고 살아야겠다는 생각, 새해를 맞이할 때는 그런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작년하고 달리 살아야겠다는 생각말입니다.

작년에는 죄만 짓고 할 일도 못하고 살았으니 올해는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달라짐이 있어야 새해를 맞는 보람이 있는 것이지 항상 살던 대로 살면 나이 먹은 값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새해에는 첫째로 자기 직장에 사명감을 갖고 충실하고 둘째는 남을 위해서 단결, 화합해 남을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 주고 셋째는 합리적으로 이치에 맞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럼 다 지상낙원, 인간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선(禪)과 정(定)을 얘기하곤 합니다.

어떤 것을 禪(선)이라 하며 어떤 것을 定(정)이라 합니까.

망념이 일어나지 아니함이 선이요 앉아서 본성을 보는 것이 정입니다.

본성이란 무생심(無生心)이요, 정이란 경계를 대함에 무심하여 팔풍(八風)에 움직이지 아니함입니다.

팔풍이란 이로움과 손실 헐뜯음과 좋은 평판 칭찬함과 비난함 괴로움 즐거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정(定)을 얻은 사람은 비록 범부라고 하더라도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고 하셨으니 이와같이 얻은 사람을 해탈했다고 하며 또 피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는 육도(六度)를 뛰어넘고 삼계(三界)를 벗어난 대력보살(大力菩薩)이며 무량역존(無量力尊)이니 대장부인 것입니다.

망념이 일어나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분별육식(分別六識)뿐만 아니라 제팔아뢰야식의 미세망념(微細妄念)까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팔식은 끊어졌으나 제팔아뢰야식이 남아 있으면 선이 아닙니다.

미세망념이 모두 끊어지면 망념의 구름이 걷히고 진여자성인 지혜의 해가 드러나서 자기 본성을 보지 않을래야 보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돈오(頓悟)이며 해탈이며 성불입니다.

본성이란 제팔아뢰야식의 무기심(無記心)의 무생심(無生心)이 아니고 제팔아뢰야식의 무기심의 무명(無明)까지 완전히 끊어진 진여본성이 본래의 구경 무생심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보는 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며 불성을 보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이 무생심이며 본성이므로 표현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똑같습니다.

정(定)이란 모든 경계를 대할 때 무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 망념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진여본성이 드러나서 대무심지(大無心地)가 현전하여 행왕좌와(行往坐臥)와 어묵동정(語默動靜)뿐만 아니라 자나 깨나 미래겁이 다하도록 경계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를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헐뜯거나 좋다거나 칭찬하거나 비난 하거나 괴롭거나 즐겁거나 하는 팔풍이 거세게 불어닥친다 해도 여기에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본성을 바로 깨쳐서 망념이 다 떨어지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해서 일체처(一切處)에 무심이 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설사 겉보기에는 범부같이 보이지만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한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범부라고 하는 것은 꼭 사람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팔세용녀가 성불하듯이 남자든 여자든 축생이든 무엇이든지간에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모두 부처인 것입니다.

그 이유로서 보살계경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보살계경에서 말하는 부처님 계라고 하는 것은 고기를 먹지 말라 술을 먹지 말라 는 등의 무엇을 하지 말라는 명상(名相)에 의지해서 계첩을 받거나 말 몇마디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자성계(眞如自性戒)를 받아서 자성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이것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중들은 이런 법문을 많이 듣고 바로 실천하여서 공부를 성취해야지 만약 그렇지 않고 말로만 듣고 귓전으로 흘려보내 버린다면 도리어 듣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니 화두를 부지런히 들어 하루빨리 깨달아 일이없는 도인이 됩시다.

삼세고금수시친(三世古今誰是親)가 담연일물본래진(湛然一物本來眞)이라.

개화낙엽근유일(開花落葉根唯一)이요 일월거래절왕환(日月去來絶往還)이로다.

삼세고금에 어떤 것이 참 나인가 청정한 한 물건이 본래 나일세.

꽃피고 잎지나 그 뿌리는 하나요 해와 달이 뜨고 져도 가고 옴이 없도다.

어떤 것이 참 나인가, 내가 누구냐? 이것은 내가 아니요, 이 세상 돌아온 세상 어떤 것이 나인가 말이요.

번뇌망상이 없는 청정한 물건이 본래 나일세.

작은 생각, 옳은 생각, 그른 생각 이런 생각은 내가 아니요, 참으로 나라는 것은 한 생각, 아무 생각도 일어나기 전에 따로 있어요.

그래서 눈깜짝할 사이라도 나를 찾다 가는 것이 사람으로서 보람있는 삶인 것입니다.

돈벌어서 재산을 쌓고, 벼슬을 해서 존경을 받으려 하고 그런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가 있느냐하면 사실은 그렇지도 않아요.

안해봐서 그렇지남한테 대접받는 것도 피곤해요.

대접받지 않을 때는 자유롭지 않습니까? 낮잠을 자든 어디가서 뒹굴든 누가 시비하겠어요.

대접받으려면 옷도 맘대로 못입고 다니고 신발도 아무거나 못신어요.

세상 일은 따지고 보면 공짜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남 부러워 할 일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단지 몰라서 그렇지 꽃피고 잎지나 그 뿌리는 하나요, 진리도 하나입니다.

사람만 이렇게 많지 우리는 한 뿌리에서 나왔거든요.

네 맘 다르고 내 맘 다르고 하지 않아요.

몸뚱이만 다르지 다 똑같은 마음이에요.

그래서 꽃피고 잎지는 그 뿌리는 하나요, 해와 달이 뜨고 져도 가고 옴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동네 어떤 사람은 공부하러 오기도 전에 죽어서 화장터에서 타버리기도 하고 땅에 묻히기도 해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없어져 버렸습니까? 원래 육신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고 허공의 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여기 육신을 부려먹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지 않아요? 나, 이 나란 것은 죽지 않아요.

반야심경 법문같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더 커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나지도 않고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주인공은 변하지 않는 내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 내 주인은 걱정, 근심하는 물건도 아니고 잘되고 안될 일도 없고 그것이 바로 성불이고 자유고 또 해탈입니다.

일체의 구속과 고통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해탈이에요.

번뇌, 망상을 나무껍데기처럼 벗어버려야 해요.

우리가 번뇌 망상 벗어버리려고 공부하는것 아닙니까? 삼세고금에 어떤 것이 참 나인가, 번뇌 망상없는 청정한 한 물건이 본래 나일세.

꽃피고 잎지나 그 뿌리는 하나요, 해와 달이 뜨고 져도 가고 옴이 없도다.

‘억!’ 이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은 말로는 불법을 설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뜻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은 그렇게 알아두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방망이를 들기도 하고 치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 것도 말로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어쨌든 날마다 들어도 말만 다르고 글자만 다르지 이치는 똑같습니다.

한 번 들으면 그만인데 한 번 듣고 못알아 듣는 사람을 위해서 하고 또 하기 마련이고 또 이런 법문을 알아 들을 수는 있지만 까마귀처럼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세속살림살이 때문이겠죠.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말도 못알아듣죠.

그렇지만 자꾸 듣다 보면 나중에는 알게 됩니다.

귀가 열리는 것이죠.

몸뚱이도 내가 아니다, 우리 맘도 내가 아니다 하니까 이걸 믿고 배우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러나 이건 거짓이 아닙니다.

진짜 헛것은 따로 있어요.

있는 이대로가 허공의 구름과 같은거지요.

구름이 있는것 같아도 저거 다 헛것이거든요.

이건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인이 따로 있어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어요.

못봐서 그렇지 참선을 해가지고 깨달음을 얻으면 알게 되는거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도 없고 귀신도 없어요.

우리 마음이 삿되면 마구니가 되고 우리 마음이 바르면 바로 부처가 되는 거지요.

손과 같다고 할까요.

엎으면 손등이 보이고 뒤집으면 손바닥이 보이는 것처럼 범부와 성인이 딱 붙어 있어요.

한치도 거리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어두운 마음이 근본 은 밝은 마음인데 부처님 마음과 손바닥처럼 딱 붙어 있습니다.

깨달으면 범부가 성인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깨닫지 못한 성인이고 부처님은 깨달은 성인이라는 그 차이만 있어요.

공부들 하세요.

성공한 유명한 사람들은 세월을 아끼기를 자기 눈동자보다 더 아끼라 합니다.

늙어서는 돈도 못벌고 공부도 못하고 살림도 못하고 재주를 배우기도 어렵습니다.

시간은 이처럼 귀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허망한 목숨보다 시간을 더 아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미련한 인간들이 돈, 돈, 돈 타령을 하는데 돈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그만 물건 잃어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세상법으로 따지더라도 남한테 실수를 범하면 명예를 잃는 것입니다.

그것은 큰 재산을 잃는 것입니다.

돈은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남에게 신용 잃으면 그것을 회복하는데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돈 잃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줄 알고 살면 됩니다.

남한테 신용을 잃으면 엄청난 재산을 잃는줄 알고 신용을 지키라는 겁니다.

신용을 지켜야 장사도 잘하고 정치도 잘하고 살림도 잘할 것 아닙니까? 신용없이 무엇 하나 잘할 수 있겠습니까.

그 신용이 돈보다도 더 큰 재산이라는 것을 명심하세요.

그런데 신용보다 더 큰 재산은 건강입니다.

몸뚱이가 없으면 돈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남한테 대접받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건강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재산인줄 알아야 합니다.

건강이 제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