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스님─괴로움의 근원삼독

◆괴로움의 근원,삼독(三毒)/보광 큰스님(전 해인사 주지)◆ 우리는 어떻게 태어나게 된 것일까요?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진 것입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일까요?아니면 이른바 과학적이라는 명분 아래 발표되는 것처럼 부모의 유전자에 여러 가지 물질이 결합되어 비로소 생성된 것일까요? 우리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 것을 업보(業報)의 소생으로 봅니다.

부모는 다만 그 연(緣)이 되어 주고, 전생에 자기가 지은 업의 종자가 금생에 마치 밭에 뿌려진 씨앗에서 움이 트듯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 업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축복해 주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기원해 주지요? 또 누구나 청춘시절에는 장밋빛 인생에 대한 꿈에 마음이 부풀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인생이, 또 사람 사는 이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곳인가요? 어느 가수가 절규하는 목소리로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고 노래했듯이, “누가 인생을 아름답다 했는가!”하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제 상황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세요.

부처님처럼 그렇게 자상하고 자비스러운 웃음을 짓다가도 자신에게 해가 될 것 같으면 돌연 나찰 같은 표정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왜 그런가요? 중생은 필연적으로 삼독에 이끌려 살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삼독의 업에 이끌린 중생들이 살아가는 이 세계가 과연 어떻겠습니까? 말 그대로 ‘아수라장’에 ‘아귀다툼’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억지로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하여 스스로를 속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루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생존경쟁 속에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그런데도 중생계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은 자신이 이런 처지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업에 이끌려 그렇게 사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주체적인 의지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또 그 속에서 나름대로 승자의 자리에 선 자들은 인생에 성공을 하고 대단한 것을 성취했노라고 기쁨에 들뜹니다.

하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람이 부는 시절이 다가온 후에 병 앞에서,죽음 앞에서, 그렇게 자부하던 재산과 명예가 과연 소용이 있던가요? 그렇게 기고만장하던 모습들은 처량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변해 버립니다.

이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코앞에 닥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탐욕에 가려서 어리석기 때문에 한치 앞도 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을까 이익을 찾아 두 눈을 번들거리고, 이빨을 곤두세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돌아볼 줄을 모르지요.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진정한 즐거움과 편안함은 저절로 찾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의 이치입니다.

불법은 결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일까요? 범부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수없이 많은 고통을 크게 정리해 보면, 바로 ‘여덟 가지 괴로움(팔고(八苦))’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생(生)) 늙고(노(老)) 병들어(병(病)) 죽는 것(사(死))은 피할 수 없는 괴로움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사랑하는 사람과는 반드시 헤어지며(애별리고(愛別離苦)),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고(원증회고(怨憎會苦),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없으며(구불득고(求不得苦)), 왕성하게 활동하며 각기 만족을 구하는 오음(五陰)의 욕구(오음성고(五陰盛苦))는 채울 방도가 없습니다.

사람이 겪어야 하는 필연적 고통 가운데 근본적인 괴로움은 생사(生死)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불법을 공부한다는 것도 바로 생사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참선을 할 때나 기도할 때나 염불할 때, 생사라는 두 글자를 분명히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불법을 배워도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왕궁의 화려한 생활과 왕위라는 보좌를 버리고 출가하신 것은 이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삶과 죽음은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갖가지 괴로움의 원인이라 할 만한 것이 ‘오음성고(五陰盛苦)’입니다.

중생은 인연화합(因緣和合)으로 생겼습니다.

그 인연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음(五陰)·오온(五蘊)이라고도 하고,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이라고도 하는데, 설명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그 뜻은 같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눈은 아름다운 빛깔을 쫓고, 귀는 맑고 고운 소리를 쫓고, 코를 향기로운 냄새를 쫓고, 혀는 달콤한 맛을 쫓고, 몸은 부드럽고 편안한 감촉을 쫓고, 생각을 자기 뜻에 합당한 것을 쫓아 제각기 치달립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서로 뜻이 맞으면 좋을 테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로간에 마찰이 일어나고 괴로움을 초래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서로 다른 습성을 가진 여섯 동물을 함께 묶어 놓은 것에 비유했습니다.

만일 악어와 뱀과 새와 개와 여우와 원숭이를 같이 묶어 놓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어는 늪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뱀은 땅속으로, 새는 하늘로, 개는 집으로, 여우는 들판으로, 원숭이는 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죽을힘을 다할 겁니다.

결국에 자기가 편한 곳으로 달아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묶인 다리만 더욱 아프게 될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육근이 각각 자기의 만족만을 끊임없이 추구하므로 편안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식구 안 되는 집안에서도 다툼과 소란이 끊이질 않는 것은 서로 뜻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툼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은 누가 받게 됩니까? 가족 구성원들이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눈썹·눈·코·입이 서로 다투게 되었답니다.

그 중에 입이 “나는 왜 항상 아래쪽에만 있고, 눈썹은 아무 하는 일도 없으면서 높은 곳에 있느냐? 하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자리를 바꾸기로 했답니다.

얼굴에서 눈썹과 입의 위치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구나무를 서야 하겠지요.

물구나무를 서서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니 눈썹이야 아무 탈 없겠지만 눈은 튀어나오게 아프고, 코는 코대로 숨쉬기가 힘들고, 입은 목이 막히고 혀가 타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입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본래대로 돌아가자”고 소리쳤다는군요.

세상의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분수에 맞추어 살고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도’이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면 결국 자기 자신만 고통스럽게 됩니다.

진리,법,질서,덕,등등으로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만 따지고 보면 간단한 원리입니다.

내가 먼저 욕심을 줄이고 양보하고 남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면 우유가 물에 섞이듯 화합은 저절로 이루어지고 다툼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중생이 괴로운 이유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탐욕’과 ‘어리석음’과 ‘게으름’ 때문에 스스로를 구속하여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를 괴롭혀 편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나의 것’,’나의 재산’,’나의 행복’만을 위해 끝없이 달려나갈 줄만 알지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고 터득하려는 욕심은 낼 줄 모릅니다.

중생은 남을 이기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극히 영리하면서도 눈앞의 실상은 전혀 볼 줄 모릅니다.

중생은 이익을 취하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나 부지런하지만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수행하고 공덕을 닦는 일은 등한히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생이기를 그만두고자 한다면 욕심과 어리석음과 게으름을 타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세 가지 장애를 타파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부지런히 닦으라고 하셨습니다.

지유스님─그렇게들 기도하더니 소원성취는 했습니까

***“그렇게들 기도하더니 소원성취는 했습니까?”***

범어사 조실 지 유 스님 오늘 범어사에서 봉행하는 법회는 ‘백일 지장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또 약사보살, 석가모니 부처님, 이렇게 이름이 다르다 보니까 법당을 여기저기 오가며 발원 하고 기도하고 염불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지런히 신심을 발하며 지극정성으로 기도, 염불, 독경했다고 한다면, 그리고 지금 당장도 아니고 작년, 재작년에도 했었다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소원성취 하셨습니까?

일념 정진해 망상 눌러야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 기도를 하면 부처님이 우리에게 현몽이라도 나투고 현실에 무엇인가가 나타나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런 뜻이 절대 아닙니다.

『금강경』 보셨지요? 부처님께서는 모양도 아니고, 소리도 아니고, 냄새도 아닙니다.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육안으로 볼 수 없을 것이고, 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귀로 부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고, 또 부처님은 냄새가 아니기 때문에 냄새를 맡을 수가 없을 것 아닙니까.

제가 “소원성취 하셨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소리도 아니고 형체도 아니고 냄새도 아닌 부처를 만나 보셨느냐는 겁니다.

이치적으로 볼 때 부처님이 바다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계신다면 우리는 파도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소리가 아래까지 도달 하는 것은 보통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려오다가 다른 욕심이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내려오다가 잠이 옵니다.

그러나 반응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극정성, 일념입니다.

지극정성의 힘이 강하다 보면 전에 한번 염불할 때 열 번 일어나던 망상이 다섯 번, 세 번, 두 번, 나중에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지런히 밑바닥으로 내려오다 보면 온갖 산란한 생각이 맑아지고 그토록 잠이 왔던 눈이 맑아집니다.

그래서 눈을 딱 떴을 때 밑바닥에 도달해서 소원대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소리를 보고 싶으면 소리를 가지고, 형체를 보고 싶으면 형체를 가지고, 냄새가 좋다면 냄새를 가지고.

그런데 여기까지 내려와서 가져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옛날 이조시대 때, 무학 대사가 성불하고자 관음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산신각에서 하루에 삼천 배 씩 지극 정성으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나는 산신령이지 부처가 아니다.

그대가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를 해야지.”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음전에 가서 아침에 천배, 낮에 천배, 저녁에 천배 해서 하루에 삼천배를 했습니다.

그렇게 삼천배를 하면 아침부터 시작해서 마칠 때는 해가 지고 깜깜합니다.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했는지 나중에는 이마에 혹이 생기고 무릎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부처도 결국은 내 그림자 그런데 3년 만에 절하다가 홀연히 깨달았어요.

깨치고 보니 아하, 내가 불상을 향해서 절을 하고 있었는데 깨닫고 보니까 내가 나를 보고 절하고 있었구나.

결국 따져보면 내 그림자라는 겁니다.

산도 따져보면 나의 그림자요, 소리도, 모든 불상도 나의 그림자라는 겁니다.

자기 그림자라고 한다면 바깥에 쫓아다닐 필요가 없잖아요.

여러분은 부처님이 되라고 하면 다 자기 나름대로, 보고 들은 대로, 배운 대로, 백사람이 모이면 아마 백사람 생각이 다 다를 겁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과거의 부처님, 지금의 부처님, 앞으로 어떤 부처님이든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맨 처음 깨치고 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니까 부처님과 똑같은 불심을 갖추고 있어요.

심지어 미물 곤충까지도, 바늘로 찔러서, 발로 밟아서, 느낄 수 있고 감각이 있는 자는 다 불심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기 가장 깊은 속에 불심을 갖추고 있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이러쿵저러쿵 온갖 생각을 하다 보니 망상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잊어버리고 헐떡거리고 있다고 합니다.

제일 가까운 자기 속에 있기 때문에 남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잖아요.

시간이 걸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영리한 사람은 말 한마디를 듣고 깨달아 버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말 한 마디를 듣고 깨닫기가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으로는 그것이 어렵다 보니 욕심이라는 나쁜 병을 고치기 위해서 약을 먹어야 합니다.

욕심이 나게 되면 아, 내가 또 쓸데없는 욕심을 내고 있구나.

부지런히 남에게 주는 버릇을 하고 남을 도와주는 행을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무학대사처럼 3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하다가 깨닫고 보니 자기가 바로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 깨달은 지혜를 발견한 것을 문수보살이라고 합니다.

깨달은 지혜대로 행하는 것이 보현보살 아닙니까.

그리고 깨닫지 못해서 괴로움에 시달리는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자비한 마음을 일으킨 것을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자기 혼자서의 성불에 만족하지 않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구제하고야 말겠다는 원력을 세운 그 행이 지장보살입니다.

내 마음속 전체에 관음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이 있습니다.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이 도량 그래서 지장보살을 부르든, 관세음보살을 부르든, 보현보살을 부르든, 문수보살을 부르든 그것은 관계없습니다.

무엇을 불렀든 자기가 자기 마음속의 불심을 먼저 찾아봐야 될 것 아닙니까.

불심이라는 것은 결코 관음도량, 문수도량이라고 해서 남해나 오대산이나 특별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곳, 서 있는 이곳, 밥 먹는 이곳, 일 하는 이곳, 울고 있는 이 자리, 화내는 이 자리에 불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제가 제일 처음 말씀드린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시는데 소원성취 하셨습니까?” 하는 이것이 뜻이 있는 말입니다.

불심은 이미 드러나 있다 부처님이 바라고 있는 소원은 너희들이 나와 같이 불심을 찾아봤느냐.

왜 바깥으로 돌아다니며 헐떡거리고 있느냐.

불심만 찾았다면 권리고 명예고 재물이고 아무 관계없이 그것을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옛날에 어떤 사람은 안으로 10년 동안 열심히 찾았는데 못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지식을 찾아가서 깨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물었습니다.

선지식이 “너는 절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전에는 바깥으로 향해서 구했는데 그것은 틀렸다 하고 지금은 안으로 향해서 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지식이 빙긋이 웃습니다.

“그렇게 하면 깨닫지 못하지.”

구하고 있기 때문에 얻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구하려고 하는 마음을 내 버리라.”

그 소리에 홀연히 깨쳤다고 합니다.

불심은 이미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생각이 복잡할 뿐입니다.

이 마음(불심)을 여러분들이 보게 된다면 기도 성취 한 것입니다.

부산=주영미 기자

이 법문은 범어사 조실 지유 스님이 6월 13일 범어사 설법전에서 봉행된 ‘범어사 100일 지장기도 고승초청대법회’ 입재법회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 개제한 것이다.

지유 스님은 1931년 일본에서 출생, 해방 직후 입국하여 18세에 범어사 동산 스님을 은사로 입산, 출가했다.

20세에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하고 전국 제방 선원 및 선원이 아닌 곳에서도 수행정진하며 운수납자의 삶을 살아왔다.

현재 스님은 부산 범어사 원효암, 문경 관음사에 주석하고 있다.

-법보신문에서-

혜민스님─`그걸 문제라고 하시면 문제가 됩니다`

`그걸 문제라고 하시면 문제가 됩니다` – 헤민스님 – [

혜민스님

‘마음치유 콘서트’ /btn]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뭘까요? 행복입니다.

성공도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고, 우리가 정말 행복하려고 이렇게 사는 것인데 예전에 서양 심리학자들이 주 로 연구했던 것은 정신질환, 어떤 정신적인 문제를 연구했는데..

1990년대 중반부터 심리학자들이 행복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분들이 밝혀낸 것들이 있어요, 행복은 무엇인가..

제가 질문 하나 해보겠습니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손 들어보라고 하니까 ‘없다’가 많고 ‘있다’도 상당수..) ㅎㅎ 정답은 ‘있다’입니다.

그런데 어느 ‘일정량까지만’ 이라고 합니다.

특히 절대빈곤층이라고 하는 아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은 행복의 아주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살 만큼 중산층 정도 되면, 그때부터는 돈이 행복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이게 답입니다.

제가 일전에, 몸이 많이 불편하셔서 오늘낼 하시는 어떤 분이 저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하셔서 찾아갔습니다.

그분은 어느 기업체 회장님이신데 그분이 뭐라고 하시냐 하면 ‘스님, 제가 정말 후회되는 게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살 때는 별로 중요한 거 못 느끼고 살다가..

‘죽음’이라는 게 살짝만 손짓을 해도 내 인생에 정말로 중요한 것만 남고 나머지 것들은 사소하게, 별 의미가 없게 느껴져요.

그분도 정말 중요한 것만 남은 거예요.

그래서 어떤 후회가 되냐 하면..

(첫 번째 후회) ‘그렇게 열심히 일만 하지 말 것을..’ 왜 그동안 열심히 일만 했을까요? 먹고 살려고..

돈을 벌려고 그랬던 것인데 우리 심리가 어떠냐 하면, 없을 땐 ‘한 500만원만 있으면 좋겠다’ 하다가 막상 500만원이 모아지면 ‘이 정도면 됐어’ 그럽니까? (1,000만원요~) ㅎㅎ 바로 두 배로 뛰네요.

그럼 천만원이 되면 만족합니까? (2,000만원요~) 2,000만원 되면? 이게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분도 열심히 일하는 것이 중독처럼 돼 있던 것이죠.

멈출 수가 없어요.

그냥 하는 겁니다, 그냥..

내가 사는 건지..

사는 게 사는 건지..

그냥 휩쓸려 사는 거예요.

그렇게 살다가 지금 돌아보니까..

정말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이 아닌가? 그분이 정말 후회하는 것이..

열심히 일하는 것도 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그랬던 것인데 정작 그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못 보낸 게 정말 후회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십니까? (두 번째 후회) ‘다른 사람이 나한테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것을..’ 여러분은 정말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았습니까? 아니죠..

^^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려고 할 때 누가 자꾸 훼방을 놓죠? 내 갈 길을 가고 싶은데 자꾸 옆에서 나를 흔들어요.

누가 그러죠? 엄마가 ㅎㅎ 특히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너 그러면 안 된다, 위험하다, 너 그래서 어떻게 먹고 살래? 결혼은 안 할래?’ 하면서 나를 자꾸 흔들어요.

흔들어서..

정작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 하고 남들이 나한테 원하는 삶을 지금까지 살았구나..

하는 후회를 하는 겁니다.

주위에서 사람들은 나보고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지만 그 삶의 책임은 결국 누가 져야 합니까? 내가 져야 해요..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냐 하면..

다른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런데 어렸을 때 그거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중고등 학생들이 거울을 하루에 몇 번씩 봅니까? 열두 번씩 보잖아요? 왜 그렇게 자주 보죠?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엄청 관심이 있을 거라고 착각하면서 봐요.

그런데 그 만큼 관심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나이들면서 알게 돼요.

다른 사람은 나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러면서 그때부터 불쑥 불쑥 올라오는 게 뭐냐 하면..

아줌마의 힘! ‘내가 뭐 하루 이틀 사는 것도 아니고, 내 편한 대로, 하고 싶은 것 좀 하면서 남들 눈치 안 봐가면서 살겠다..’ 이런 게 나와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남들 눈치보지 말고 그냥 하고 살아도 돼요 안 돼요? 돼요.

인생을 너무 복잡하게 살 필요 없어요.

너무 남 눈치봐가면서 살 필요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아셨죠? (세 번째 후회) ‘자식이 살고 싶은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둘 걸..’ 정말 아이들 문제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아요.

아이를 잘 키우려고 하다보니까 이것 저것, 하나 하나 콘트롤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늘 궁금한 게..

왜 스님한테 자녀 키우는 법을 물어보는지 모르겠어요.

ㅎㅎ 아니, 우리가 애를 낳아봤나 길러봤나..

그런데 자꾸 물어봐, 어떻게 키워야 좋으냐고..

프로가 아마추어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연구를 해봤더니..

답이 나왔어요.

애들은 낳아 놓으면 반품이 안 되기 때문에 애가 속을 썩여도 그 모든 걸 내가 다 받아야 돼..

그래서 힘든 거예요.

그럼 이 자녀 문제를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가? 그분은 자녀 문제를 하나 하나 다 자기가 나서서 콘트롤하신 거예요.

어떤 보살님은 이러시더군요.

아이들이 너무 말을 안 들어서 막 화가 폭발하는데 그렇게 폭발하는 자기가 너무 싫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아이들한테 왜 내가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가?’ 왜 이렇게 우리는 화를 내면서..

어렵게 기르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좀 더 지혜롭게 기를 수 있는가? 그분의 후회는..

아이 인생을 내가 콘트롤하려고 했는데 정작 결과는 아무도 행복하지 않더라..

특히 결혼 문제에 대해서 이분이 아주 직접적으로 관여를 해서..

아들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도 ‘안 된다’ 하면서 헤어지게 하고 그랬는데..

행복하겠어요? 아니죠.

안 행복하다..

이걸 나중에 알고 후회하는 거죠.

좋은 방법은 이렇습니다.

‘선택은 아이에게 하게 하고, 선택에 따르는 결과의 책임을 아이에게 철저하게 묻는다’ 그런데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모든 걸 다 부모가 선택해주려고 그래요.

유치원부터 학원, 대학교 학과, 결혼 배우자 선택까지..

다 부모가 하려고 그러는데 아무리 좋은 선택도 자녀 스스로가 하지 않으면, 그게 좋은 지를 모릅니다.

자립심이 없기 때문에 그냥 ‘엄마 아빠 말대로 살아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와도 정말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지를 몰라요.

우리나라에 이런 학생들이 너무 많아요.

어려서부터 선택을 해보지 않아서..

제가 미국에 아는 분이 있는데 교수 부부입니다.

교수 부부라서 그런지 육아도 학구적으로 하는데 ‘아이 기르는 법’이라는 아주 두꺼운 책을 읽고 키우는데..

밤 8시 반이 딱 되니까 아이한테 이렇게 물어봐요.

‘얘야, 너 지금 잘래? 10분 있다 잘래?’ 아이가 ‘나 10분 있다 잘래요’ 그러니까..

10분 후에 ‘얘야 10분 지났어’ 그러니까 아이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거였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선택했다고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어떻게 기릅니까? ‘지금 빨리 들어가서 자~’ 그러잖아요? 말 들어요 안 들어요? 안 들어요..

왜? 자기가 선택했다는 느낌이 없어서.

물론 부모님들은 혹시나 자녀가 잘못된 선택을 할까봐 걱정이 돼서 그러지만 설사 자녀가 좀 잘못된 선택을 해서 힘들어 하더라도, 그걸 지켜봐주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인생을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큰 깨달음이 있어요.

그런데 부모가 자꾸 간섭을 하면 그 깨달음을 얻지 못 하게, 기회를 앗아가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미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요.

‘사람들은 개개인이 추어야 할 춤이 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의 춤을 춰버리면, 자식은 그 춤을 나중에 뒤늦게 춰야 하는..

그런 사태가 벌어집니다.

즉 아이들이 배워야 할 때 배우도록, 선택을 하게 하고..

혹시 그것 때문에 힘들어해도 옆에서 그것을 지켜봐주는 것이 지혜로운 부모의 역할입니다.

(네 번째 후회) ‘그렇게 걱정하지 말고 살 것을..’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그 많은 걱정들이 쓰잘데없는 걱정이더라..

심리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우리 걱정이 100가지라면 그 중 95가지는 불필요한 걱정이래요.

그 95가지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거나..

현실적으로 이루어져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

그래서 그거 걱정하나마나한 것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너무 걱정을 많이 하고 살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 걱정을 많이 하고 살까? 가만히 보니까 그 이유는 이겁니다.

‘그걸 문제라고 하시면 문제가 됩니다’ 별문제도 아닌데 자꾸 큰 문제라고 하면서 걱정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예를 들어서..

손등에 점이 있거나, 상처가 있거나, 이쁘지 않은 곳이 있으면 그것을 점점 더 내 눈에 가까이 보면 볼수록 그 점이나 상처가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다시 점차 멀리 해서 바라보면..

그 상처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큰 문제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전체적인 것을 놓고 보면 큰 문제가 안 되는데, 그걸 문제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을 당겨서 ‘큰 문젭니다, 스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러는 거예요.

지나고보면 별문제 아닌 것을 가지고 그렇게 고생을 했다..

그런 후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