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의 근원,삼독(三毒)/보광 큰스님(전 해인사 주지)◆ 우리는 어떻게 태어나게 된 것일까요?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진 것입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일까요?아니면 이른바 과학적이라는 명분 아래 발표되는 것처럼 부모의 유전자에 여러 가지 물질이 결합되어 비로소 생성된 것일까요? 우리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 것을 업보(業報)의 소생으로 봅니다.
부모는 다만 그 연(緣)이 되어 주고, 전생에 자기가 지은 업의 종자가 금생에 마치 밭에 뿌려진 씨앗에서 움이 트듯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 업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축복해 주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기원해 주지요? 또 누구나 청춘시절에는 장밋빛 인생에 대한 꿈에 마음이 부풀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인생이, 또 사람 사는 이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곳인가요? 어느 가수가 절규하는 목소리로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고 노래했듯이, “누가 인생을 아름답다 했는가!”하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제 상황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세요.
부처님처럼 그렇게 자상하고 자비스러운 웃음을 짓다가도 자신에게 해가 될 것 같으면 돌연 나찰 같은 표정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왜 그런가요? 중생은 필연적으로 삼독에 이끌려 살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삼독의 업에 이끌린 중생들이 살아가는 이 세계가 과연 어떻겠습니까? 말 그대로 ‘아수라장’에 ‘아귀다툼’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억지로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하여 스스로를 속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루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생존경쟁 속에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그런데도 중생계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은 자신이 이런 처지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업에 이끌려 그렇게 사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주체적인 의지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또 그 속에서 나름대로 승자의 자리에 선 자들은 인생에 성공을 하고 대단한 것을 성취했노라고 기쁨에 들뜹니다.
하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람이 부는 시절이 다가온 후에 병 앞에서,죽음 앞에서, 그렇게 자부하던 재산과 명예가 과연 소용이 있던가요? 그렇게 기고만장하던 모습들은 처량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변해 버립니다.
이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코앞에 닥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탐욕에 가려서 어리석기 때문에 한치 앞도 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을까 이익을 찾아 두 눈을 번들거리고, 이빨을 곤두세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돌아볼 줄을 모르지요.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진정한 즐거움과 편안함은 저절로 찾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의 이치입니다.
불법은 결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일까요? 범부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수없이 많은 고통을 크게 정리해 보면, 바로 ‘여덟 가지 괴로움(팔고(八苦))’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생(生)) 늙고(노(老)) 병들어(병(病)) 죽는 것(사(死))은 피할 수 없는 괴로움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사랑하는 사람과는 반드시 헤어지며(애별리고(愛別離苦)),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고(원증회고(怨憎會苦),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없으며(구불득고(求不得苦)), 왕성하게 활동하며 각기 만족을 구하는 오음(五陰)의 욕구(오음성고(五陰盛苦))는 채울 방도가 없습니다.
사람이 겪어야 하는 필연적 고통 가운데 근본적인 괴로움은 생사(生死)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불법을 공부한다는 것도 바로 생사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참선을 할 때나 기도할 때나 염불할 때, 생사라는 두 글자를 분명히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불법을 배워도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왕궁의 화려한 생활과 왕위라는 보좌를 버리고 출가하신 것은 이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삶과 죽음은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갖가지 괴로움의 원인이라 할 만한 것이 ‘오음성고(五陰盛苦)’입니다.
중생은 인연화합(因緣和合)으로 생겼습니다.
그 인연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음(五陰)·오온(五蘊)이라고도 하고,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이라고도 하는데, 설명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그 뜻은 같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눈은 아름다운 빛깔을 쫓고, 귀는 맑고 고운 소리를 쫓고, 코를 향기로운 냄새를 쫓고, 혀는 달콤한 맛을 쫓고, 몸은 부드럽고 편안한 감촉을 쫓고, 생각을 자기 뜻에 합당한 것을 쫓아 제각기 치달립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서로 뜻이 맞으면 좋을 테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로간에 마찰이 일어나고 괴로움을 초래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서로 다른 습성을 가진 여섯 동물을 함께 묶어 놓은 것에 비유했습니다.
만일 악어와 뱀과 새와 개와 여우와 원숭이를 같이 묶어 놓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어는 늪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뱀은 땅속으로, 새는 하늘로, 개는 집으로, 여우는 들판으로, 원숭이는 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죽을힘을 다할 겁니다.
결국에 자기가 편한 곳으로 달아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묶인 다리만 더욱 아프게 될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육근이 각각 자기의 만족만을 끊임없이 추구하므로 편안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식구 안 되는 집안에서도 다툼과 소란이 끊이질 않는 것은 서로 뜻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툼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은 누가 받게 됩니까? 가족 구성원들이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눈썹·눈·코·입이 서로 다투게 되었답니다.
그 중에 입이 “나는 왜 항상 아래쪽에만 있고, 눈썹은 아무 하는 일도 없으면서 높은 곳에 있느냐? 하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자리를 바꾸기로 했답니다.
얼굴에서 눈썹과 입의 위치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구나무를 서야 하겠지요.
물구나무를 서서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니 눈썹이야 아무 탈 없겠지만 눈은 튀어나오게 아프고, 코는 코대로 숨쉬기가 힘들고, 입은 목이 막히고 혀가 타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입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본래대로 돌아가자”고 소리쳤다는군요.
세상의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분수에 맞추어 살고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도’이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면 결국 자기 자신만 고통스럽게 됩니다.
진리,법,질서,덕,등등으로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만 따지고 보면 간단한 원리입니다.
내가 먼저 욕심을 줄이고 양보하고 남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면 우유가 물에 섞이듯 화합은 저절로 이루어지고 다툼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중생이 괴로운 이유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탐욕’과 ‘어리석음’과 ‘게으름’ 때문에 스스로를 구속하여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를 괴롭혀 편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나의 것’,’나의 재산’,’나의 행복’만을 위해 끝없이 달려나갈 줄만 알지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고 터득하려는 욕심은 낼 줄 모릅니다.
중생은 남을 이기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극히 영리하면서도 눈앞의 실상은 전혀 볼 줄 모릅니다.
중생은 이익을 취하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나 부지런하지만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수행하고 공덕을 닦는 일은 등한히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생이기를 그만두고자 한다면 욕심과 어리석음과 게으름을 타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세 가지 장애를 타파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부지런히 닦으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