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출가’란 스스로 주인되는 삶

‘출가’란 스스로 주인되는 삶 법륜 스님 출가’란 지금까지의 삶이나 의지해 왔던 것들, 추구해 왔던 가치관에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사주 팔자적인 삶, 지은 업에 따른 인연 과보의 삶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변화의 주체로서 자기가 주인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내 운명의 주인이 어떤 신이나, 내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업이나 태어난 생년월일이 아니라, 바로 내가 행과 불행을 좌우하는 삶의 주체로 서는 것이다.

왜 그것을 출가라 하는가? 출가(出家)란 집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집’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집을 짓는 것은 자기를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평평한 바닥을 만들고 바람을 막기 위해 벽을 쌓고, 햇빛과 비를 막기 위해 처마와 지붕을 만들어서 그 속에서 안온함을 추구한다.

이것이 집이다.

그러나 또한 집은 우리를 속박하기도 한다.

벽과 천장이, 바닥이 나를 가둔다.

또 집이란 ‘우리가 사는 공간’이란 의미를 넘어서서 ‘고정 관념’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판단이나 느낌의 근거가 되는 고정 관념이라 볼 수 있다.

자기가 태어나고 살았던 고향 같이 익숙한 생각이다.

고향은 안온함이 있지만, 그 곳에만 있으면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모순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집을 짓고 있을까? 우리는 부모를 의지하고 산다.

우리는 부모가 안 계시면 쓸쓸해 하고 허전해 한다.

부모는 방바닥과 같은 존재로 내가 의지하고 사는 기초이다.

결혼해서는 아내나 남편을 기둥으로 삼거나 자식을 서까래로 삼고, 돈으로 벽을 만들고, 사회적 지위로 천장을 만들고, 명예로 갖가지 장식을 하고, 이런 것에 의지해서 안온함을 추구한다.

그런데 인생을 살펴보면 부모로 인하여 갖은 속박을 받고, 아내나 남편으로부터 여러 가지 속박을 받는다.

그리고 자식과 돈 때문에 속박받고, 사회적 지위나 인기로 인해서도 속박을 받는다.

이처럼 행복과 자유와 안온함을 가져온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그런 것들로 집을 짓지만, 사실 이 집은 갖가지 괴로움과 속박의 원인이 된다.

비유하면 편안하게 살기 위해 열심히 집을 짓지만, 집 짓는 중에 처마가 뚫어져서 빗물이 들어오고, 그것을 고쳐 놓으니 이번에는 벽이 갈라져서 빗물이 새고, 그걸 고치고 나니 방바닥이 갈라져서 가스가 새어 들어오고, 그걸 고치고 나니 다시 기와가 깨어져서 방안으로 빗물이 떨어지는 격으로 편안하게 살기 위해 집을 지었지만, 죽을 때까지 집 고치다가 세월 다 보내고 한 번도 제대로 안온하게 자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모순이 있다.

출가란 그 집이 속박과 고통의 원인임을 알고 불사르고 그 집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집이 속박과 괴로움의 원인이 될 때, 그 집을 불사르거나 그 집에서 나오려 하지는 않고 이 집이 문제니까 다른 집으로 가자 해서 그 집을 나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가출’이지 ‘출가’가 아니다.

가출은 그 집이 고통의 원인임을 여실히 깨달아 놓아 버리는 게 아니라, 그 현상에 집착해서 다른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 집에서 나오면 잠시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 같지만, 조금 있으면 또 같은 고통을 받는다.

이혼하고 혼자 살다가 외로워서 다시 결혼하고, 자식 없던 사람이 자식을 낳고, 취직 안 되던 사람이 취직이 되면 기쁘다.

그런데 시일이 경과하면서 그것이 다시 고통의 원인이 되어서 직장 가진 것을 후회하고,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사업 벌인 것에 대해 후회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걸식을 하고 분소의를 입고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주무셨다.

깨닫기 전에도 그랬고 깨달은 후에도 그렇게 사셨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깨닫기 전에는 좋은 옷이나 좋은 음식이나 좋은 집을 철저하게 거부하셨지만, 깨달은 후에는 거부는 하지 않으시고, 초대를 하면 응하셨다.

인연 따라 그 경우가 있으면 응하시긴 했지만, 그것에 메이지는 않으셨다.

그걸 보고 뎃바다타가 부처님을 비난했다.

“부처님, 출가 수행자는 다섯 가지 규칙을 꼭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반드시 분소의를 입어야 합니다.

둘째는 반드시 걸식을 해야 하며, 셋째는 음식은 반드시 하루 한 끼만 먹어야 하고, 넷째는 절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잠을 자야지 처마 밑에서 자면 안 됩니다.

”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무 밑이나 숲에서 자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비가 올 때는 처마 밑에서 잘 수도 있다.

걸식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신심 있는 재가 신도의 공양을 받을 수도 있다.

하루 한 끼만 먹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환자나 어린아이는 두 끼를 먹을 수도 있다.

고기를 먹지 않고 수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보시받은 음식에 섞여 있을 때는 먹을 수도 있다.

분소의를 입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분소의가 없을 때는 새 옷을 입을 수도 있다.

” 그런데 부처님이 새 옷 입어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는 헌옷이 있는데도 새 옷 입고, 비가 오지 않는데도 꼭 집안에 들어가 자려 하고, 몸이 아프지 않는데도 끼니대로 다 먹으려 하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거다.

또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뎃바다타처럼 고행을 하고 사는 것만이 불교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좋은 옷이나 떨어진 옷을 입든 안 입든, 음식을 어떤 것을 먹든 거기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무엇인가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니까 그것을 놓으라는 것이다.

어떤 거사님이 내게 상담하러 찾아 와서는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왜 하는 일마다 다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 그래서 그 이유를 들어보니, 대학 입시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고시 시험에도 떨어지고, 또 직장을 구했는데 세 번이나 쫓겨났고, 사업을 했는데 네 번이나 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여자를 만났는데 세 번 다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얼굴이며 모습이 아주 멀쩡하게 보여.

그래서 “초등 학교도 못 나온 사람도 있는데, 당신은 대학 시험을 두 번이나 친 걸 보니까 고등 학교도 나왔다는 소리 아니오? 또 대학 시험을 두 번이나 칠 정도로 집안에 경제력이 있었다는 이야기고, 고시 공부를 했다는 것은 누가 그 뒷받침을 했다는 거고, 또 고시를 칠 정도라면 머리도 괜찮았다는 이야기 아니오? 회사에서 세 번이나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세 번 취직을 했다는 이야기여서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게 세 번씩이나 취직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 않느냐? 또 여자를 세 번이나 만났다는 건 여자를 끄는 힘도 있다는 것 아니오.

능력이 있으니까 세 사람이나 만났지, 없으면 어떻게 만났겠어요?” 이 거사님의 경우 마음이 괴로운 것은 욕심 때문이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전생에 죄가 많은 것도 아니고, 사람도 괜찮은데 현재의 자기 능력보다 자기의 상을 너무 높게 설정하고 있어서 스스로를 비하하고 좌절시키는 것이다.

거사님이 뭔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능력 이상의 것을 추구하니까 늘 일이 안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 이치를 깨달아 자기 능력이 오십일 때 오십인 줄을 자각하게 되면, 절망과 좌절, 자학이 사라지고 행복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가해야 한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불태워 버려야 한다.

지금 마음으로 스님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스님인데 머리 기르고 다녀도 되니 얼마나 편한가.

내가 앉아서 다른 여자나 남자와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절에 출가한다고 들어와서는 생각의 기준을 늘 결혼해서 사는 친구한테 두고, 자기 개인 공간이 있어야 한다, 취미 생활을 해야 된다고 한다면 문제다.

일본 승려들이 결혼한다고 욕하지만, 그분들을 그렇게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된다.

집에서 가정 생활을 하더라도 아침에 자가용을 타고 절에 출근해서 승복으로 갈아입으면 절도 있는 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저녁에 퇴근하면 사복 입고 나와서는 보통 사람처럼 산다.

그런데 우리는 태도가 분명하지 않다.

태도가 분명하지 않으니까 시비 분별심이 많다.

그리고 출가를 하면 부처님께서 분소의를 입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주무시고 걸식하며 사셨던 그 정신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복도에서 자더라도 숲에서 자는 것보다는 안온하고, 걸식하여 주는 밥 먹는 것보다는 절에서 먹는 밥이 훨씬 고급이고, 옷도 훨씬 잘 입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제까지 살아왔던 안온함의 기준을 붙들고서 세수할 데도 없고,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자며, 이렇게 적게 먹고 힘이 없어서 어떻게 절을 하느냐고 생각해선 안 된다.

일 주일을 아무것도 안 먹어도 사실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이렇게 시비 분별을 하게 되면 자기가 선택해서 출가하고는 자기 스스로를 괴롭히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건 출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출가란 생각이 바뀌는 거다.

머리 모양과 옷 모양만 바뀌는 게 출가가 아니다.

머리칼을 자른다는 건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고,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기득권을 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남자다 왕이다,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버림을 뜻한다.

거지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출가해야 한다.

우리가 늘 참회 기도를 하는 이유는 부처님의 삶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너무도 부족한 점이 많아서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부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부처님의 삶을 늘 살펴보면서 비록 시대와 지역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그 기본 정신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고 무엇을 입고 어떤 것을 먹든 간에 우리는 어쨌든 그분보다는 좋은 상황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혼자라서 외롭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세속에서 보내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세속 일에 관여한다.

그러니 우리가 수행자라면 부처님께 엎드려 절할 뿐이지 시비를 논할 것이 없다.

그리고 방석 하나를 깔거나, 발우 공양을 하거나, 휴지 한 장을 쓸 때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개선할 일이 있으면 불평과 불만을 할 게 아니라, 의견을 나누고 건의하고 조절하고 살아야 한다.

출가하여 산다는 것은 보살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저 과거 연등 부처님이 계셨을 때, 선혜 동자로 출가한 이래 우리는 그분을 보살이라 불렀다.

그래서 도솔천의 호명 보살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스물 아홉에 출가하기 전까지 우리는 그분을 보살로 부르진 않는다.

원력을 가지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 코끼리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왔지만, 태어나는 순간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본분을 잊어버리고 세상을 살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두 살 때 농경제에 참석하여 농부의 고통을 보고 벌레의 죽음을 보면서, 동서남북 사대문을 나가서 늙고 병들고 죽어 가는 사람의 고통을 보면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시작했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속에서 수많은 갈등을 하다가 욕구의 충족을 따라 사는 이 길이 해탈의 길이 아님을 확연히 알자 출가를 하셔서 자신의 본분을 되찾으셨다.

그래서 깨달은 중생인 보살이 되셨다.

새로 태어나고 거듭나셨다, 부활했다고도 볼 수 있다.

비록 몸은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삶의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발심하고 살아왔던 삶의 연속선상으로 회복되었다.

꿈속을 헤매다가 잠이 깨어 제 자리에 돌아왔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꿈꾸는 상태에 있으니까 자기가 이 세상에 올 때 그냥 떨어졌는지 어떤 원력을 갖고 이 곳에 나투었는지 바로는 모른다.

부처님 법을 만나 공부를 하여 그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되면 자기의 참 모습, 자기의 원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편안해지는 거다.

노력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원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온 그 본래 모습으로 회복했기 때문에, ‘아이구, 내가 삼사십 년 동안 엉뚱한 짓을 하고 살았구나!’를 자각하기 때문에 그 전의 수많은 생으로 연결된다.

자기의 삶이 시간적으로 길어지고 자신의 존재를 여실히 꿰뚫어 봤을 때 우리는 이 육신만을 나로 삼는 게 아니라, 수많은 내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공간적으로도 넓어진다.

이제까지는 어리석어서 오직 이 몸만을 나로 삼아서 남편과(혹은 아내와) 이웃과 다투다가 깨닫게 되면 민족이나 인류, 지구의 생존 문제도 자기 문제가 되어 염려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자기의 문제가 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는데, 그럴 때 모든 두려움도 함께 없어진다.

무여스님─간절한 일념으로 염불하면 오던 화살도 비켜간다

간절한 일념으로 염불하면 오던 화살도 비켜간다

-무여스님-

(准提功德聚) 준제주의 크신 공덕, 적정심상송(寂靜心常誦) 일념으로 늘 외우면, 일체제대난(一切諸大難) 어떠한 어려움도, 무능침시인(無能侵是人) 그를 침노하지 못하리니, 즉 염불하는 사람을 침노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이 준제주는 관세음보살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즉, 관세음보살님을 말합니다.

이 관세음보살님의 공덕은 가히 말로써 글로써 표현 할 수 없는 대단한 공덕이 있는 분이 바로 관세음보살님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님에게 지극하게 의지해서 참으로 대단한 신심을 발하면 안 될 일이 없다 그런 말씀이 [관음경]에 있습니다.

그 능력이나 안목이나, 그 자비한 마음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분이 바로 관세음보살님입니다.

그분의 공덕은 아주 대단해서 어떤 분보다도 참으로 대단한 공덕을 가졌습니다.

염불은 일념으로 외워야, 즉 고요하게 번뇌 망상이 일체 없이 일념으로 외워야 됩니다.

일념이 더 깊어져서 염불 삼매가 될 정도로 오직 염불에 빠져야 돼요.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하다가 보면 아주 깊게 빠져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내가 앉아 있는 곳이 법당인지 집인지 어디인지도 모를 정도로 깊게 빠질 그럴 정도로 지극하게 하고 아주 간절하게 해야 됩니다.

일체 번뇌 망상이 안 떠오를 정도로 해야 됩니다.

그래야 참으로 대단한 염불 공덕이 있습니다.

또, 이 일념으로 늘 외운다는 것은 끊이지 않고 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염불이나 화두는 끊임이 없어야 됩니다.

끊임이 없이 하는 데 아주 묘(妙)가 있습니다.

하다가 말다가, 하다가 말다가 하면 그 염불의 공덕이 없습니다.

그래서 염불하는 데는 ‘닭이 알을 품듯이 하라’ 했습니다.

닭이 알을 품을 때는 웬만해서는 둥지를 떠나질 않습니다.

왜 둥지를 떠나지 않느냐.

둥지를 떠나게 되면 계란이 식어 버려요.

식으면 병아리가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닭이 알을 품을 때는 오뉴월 그 한더위에도 – 닭이 아주 더위를 많이 탄답니다.

한여름에도 닭을 보면 입을 떡 벌리고 막 헐떡거리듯이 다녀요.

둥지 위에 앉아 있으면 더 더위를 느낀다는 겁니다.

– 막 숨을 몰아쉬듯이 헐떡거리면서도 둥지를 떠나지 않아요.

그건 왜 그러느냐? 계란을 식지 않게 할려고요.

그렇게 계란을 늘 따뜻하게 품고 있어야만 스물 하루가 되면 병아리가 되어서 나옵니다.

그렇듯이 화두 하는 분은 항시 화두 기운이, 염불하는 분은 항시 염불 기운이 없어지지 않아야 됩니다.

염불은 늘 해야 되고, 가급적이면 그치질 않아야 됩니다.

설사 잘 안되더라도 항시 연습을 하듯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애쓰고 애쓰다가 보면 참으로 될 날이 있어요.

보통은 잘 안 되니까 놓았다가 하다가 말다가 그러는 분이 있는데 그러면 더 안 돼요.

안 되더라도, 염불하는 재미가 없더라도 애쓰다가 보면 참으로 잘 될 날이 있습니다.

참으로 잘 되는 날은 대단한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염불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즉 부처님이 가깝다는 겁니다.

이 범부 중생, 여러분 자상하게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참 못나고 부끄럽고 어리석은 점이 많을 겁니다.

아무리 잘났다는 사람도, 아무리 똑똑하다는 사람도 그럴 겁니다.

그래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 합니다.

따지고 보면 문제가 없고, 부족하고 못나지 않은 분이 없어요.

그래서 흔히 미완성의 작품이다 그런 말을 합니다.

그렇게 못나고 어리석은 것이 범부고 중생입니다.

그래서 잘 못할 수도 있고, 해도 잘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요새 IMF(아이엠에프) 한파다 해서 어렵다 어렵다고 하는데, 열심히 해도 안 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은 역시 그만큼 ‘본인이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그런 분이라도 꾸준하게 염불을 지극하게 많이 하십시오.

하면 하는 것 만큼 반드시 공덕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다만 한 번이라도 한 것은 반드시 헛되지가 않아요.

그 훗날 참으로 대단한 것으로 승화될 날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안 되더라도 안 된다는 생각도 마시고, 무얼 소원 했는데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당장 이루어 질 수도 있지만 먼 훗날 몇 십 년 아니면 다음 생애도 이루어 질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하면 한 것 만큼 반드시 이익이 있고, 애쓰면 애쓰는 것 만큼 조금도 헛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염불을 하되 일념으로 하시라는 겁니다.

일념으로 일체 잡된 생각이 없이 염불에 폭 빠질 정도로, 오직 요것 뿐이다는 그런 생각으로써 살림하고 이런 저런 집안일을 보고 애들을 키우고 하다가 보면 일념으로 하기가 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냥 보통 할 때는 평범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참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할 때는, 그때는 바짝 하는 겁니다.

그때는 정말 폭 빠질 정도로 일념으로 하시는 겁니다.

그래 해도, 설사 짧은 시간이래도 제대로만 하면 몇 시간, 몇 일간 하는 이상의 공덕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일념으로 하셔야 됩니다.

일념으로 하시되 좀 더 깊게 들어가서 일념 삼매에 들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삼매에 들어가면 묘한 염불하는 기분을 느껴요.

오묘한 법열을 느껴요.

즉 염불하는 데서 묘한 기쁨을 느껴요.

그 기쁨을 흔히 안락이라 하는데, 아주 편하고 아주 즐거운 기쁨입니다.

그것은 꼭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느껴봐야만 염불을 하는 참으로 진정한 그런 기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거기까지 느껴보지 못하면 ‘나는 진정한 불자가 아니다, 나는 진정한 신도가 못 된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괜찮아요.

거기까지만 느껴보시면 절에 오지 말라, 오지 말라 해도 안 올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절이래요.

그럴 정도로 진리에서 느끼는 기쁨, 그 행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런 대단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꼭 느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럴 정도가 되면 일체제대난 무능침시인(一切諸大難 無能侵是人) – 그 어떠한 어려움도 그를 침노하지 못하리니.

그러한 염불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어려움이나 어떠한 괴로움이나 어떠한 근심 걱정도 그를 침노하지 못해요.

즉 염불이 다 막아 준다는 겁니다.

그럴 정도로 염불은 아주 대단한 그런 공덕이 있는 것이 바로 염불입니다.

그래서 관음경에 보면 어떠한 풍수해에도 막아준다 했어요.

바람으로 인한 것이나, 물로 인한 것이나, 불로 인한 것이나 어떠한 어려움이나 어떠한 괴로움도 다 막아준다고 했어요.

요즘은 사회가 발전해서 갖가지 사고가 많이 납니다만, 옛날에 관음경을 쓸 때만 해도 큰 화난이라고 하면 풍수 화난이 거의 가장 큰 화난이었어요.

즉 물로 인해서 큰 장마가 진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강둑이 무너진다든가, 아니면 큰 바다가 해일을 한다든가 그런 데서 오는 어떤 괴로움, 그렇지 않으면 불이 난다든가, 아니면 바람으로 인한 어떠한 난(難)도 다 물리칠 수 있다는 거래요.

요새는 그런 난 말고도 여러 가지 새로운 신종의 난들이 많습니다마는 그러한 난도 다 물리 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염불의 공덕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지금은 어디로 가셨는지 확실치 않은데 신행 스님이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70년대 한 중반쯤 스님이 되신 분인데, 전라남도 장성에 가면 백양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서옹 큰스님이 계셨는데 그 스님의 상좌입니다.

이분이 66년도에 서울에서 동국대학교에 다녔는데 학생회에서 해인사로 관광을 간 적 있다는 겁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고속버스가 다니지 않을 때라 국도로 서울에서 9시간이 걸려 간다고 했을 정도로 장시간 걸리는 그런 여행이었답니다.

그분 성격이 상당히 활달하고 어디 가서 노는 걸 보면 아주 재미있게 잘 노는 분이래요.

노는 데는 꼭 중심 역할을 하는 그런 분이었어요.

그런데 그날은 친구들끼리 해인사로 가니까 그 뭐, 술도 먹었을 테고, 차 안에서 노래도 부르고 아주 신나게 놀았는가 봐요.

그런데도 그분은 전혀 놀고 싶은 생각이 안 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놀든 말든, 그 분이 16살 때부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했는데, 열심히 그 다라니를 외웠다는 겁니다.

다라니가 그렇게 잘 되더라는 거래요.

김천을 조금 지나서 계속 앉아오니까 다리가 뻐근하고 안좋더랍니다.

그 때만 해도 버스에 안내양이 있을 땐데, 그 안내양한테 ‘내가 좀 설테니까 이 자리에 좀 앉으라’하고 안내양을 바로 자기 자리에 앉히고는 안내양 서는 그 출입구에 서서 갔답니다.

가다가 불과 한 20분쯤 지났는데 차가 그냥 구르더라는 겁니다.

한 50미터 가량 되는 언덕에 차가 굴러버렸다는 것이지요.

몇 바퀴 굴러 가지고 그냥 떨어졌는데 완전히 차가 납창갱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45명이 타고 갔는데 44명이 죽었다는 거예요.

저도 훗날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당시 신문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 버스 사고로는 가장 큰 교통 사고였답니다.

1명 남고 다 죽어버렸는 거래요.

그 한 명이 누구냐, 바로 신행이라는 그 스님입니다.

그 스님은 상처도 거의 안 났더라는 겁니다.

머리에 상처가 조금 나고 팔다리가 좀 뻑적지근한 그런 정도지 거의 상처가 안 난거라.

그래 그때 인터뷰를 했는데 그 어떤 기자가 매일신문인가 어디에 “이건 기적이다.

이렇게 거의 상처가 안 날 정도로 한 사람이 살았다.

이건 기적이 아니면 있을 수가 없다.” 그런 내용의 인터뷰 기사가 있습디다.

어쨌든 그렇게 살아났던 것입니다.

신행이라는 그 스님은 훗날 월남전에 참전을 했는데, 월남에 가서도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겼다는 겁니다.

한번은 전 중대원이 세 명을 남기고 다 몰살을 했는거라, 청룡부대로 갔는데요.

그런데 그 세 명 중에 그 신행스님이 끼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훗날 하는 얘기가 자기는 불사신이라는 겁니다.

죽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게 여러 번 사선을 넘어도 안 죽고 이렇게 멀쩡하니 이것은 자기 명(命)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거야 말로 참으로 염불 공덕이다.

주력 공덕이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주력을 해서 좋은 공덕을 얻었는데 그냥 있을 수 있느냐.

스님이 되자” 해서 출가한 그런 스님이 있었습니다.

강원에 조금 다니다가 일본 유학 갔는데 그 뒤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

어쨌든 그분은 어떤 어려움이나, 어떤 괴로움이나 근심 걱정도 신묘장구대다라니만 잘 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야말로 참으로 많이 겪은 사람이니까.

다라니뿐만 아니라 염불이든 참선이든 참으로 지극하면 대단한 그런 공덕이 있습니다.

참으로 지극하면 그 이상의 공덕이 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염불입니다.

그래서 불가사의하다 그런 말을 합니다.

염불의 공덕은 참으로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공덕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일으킨다는 말을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려면 일념으로 지극하게 해야 됩니다.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 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그를 침노하지 못하리니, 즉 염불하는 사람을 침노하지 못해요.

염불하는 사람을 해치질 못해요.

그래서 화살도 오다가 비껴간다 했어요.

그런 공덕이 바로 염불 공덕입니다.

서암스님─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서암스님-

나무(南無)란 내 잃어버린 마음을 찾자는 소리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내 근본 마음입니다.

불생불멸 無量壽의 무량한 광명 無量光입니다.

내 이몸 덩어리는 백년 안쪽에 부서져 없어집니다.

그러나 이생명은 무한히 빛나고.

끝이 없는 불생불멸입니다.

그것이 아미타불입니다.

우리가 망상 없이 일념으로 내 마음 자리를 찾는 그 염불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우리 마음자리는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몇 천만년 전의 굴이나.

금방 만든 굴이나 불을 켜면 곧 바로 밝아집니다.

몇 천만 년 전의 굴이라고 해서 몇달 동안 불을 밝혀야 밝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모질고 독한 사람도 임종시에는 모든 생각이 순수하게 됩니다.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도 임종시에 “나무아미타불”한번만 지극정성 불러도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간다고 합니다.

순수한 세계는 순수한 마음으로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