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스님─간절한 기도로 큰 그릇 되라

간절한 기도로 큰 그릇 되라

-보성스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 모두는 ‘올해에는 반드시’로 시작되는 첫 생각, 계획들을 했을 것입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바라는 바이니, 한가지도 같지는 않겠지요.

이러니 이것을 듣고 계신 부처님이 원하는 것들을 다 들어줘야 될 텐데 걱정입니다.

천수천안이 아니라 만수만안도 부족할 테지요.

그러나 여러분들의 바람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과거와는 다른 더 좋은 환경의 변화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저 앞에 솟아오른 산, 흐르는 물을 보십시오.

변함이 있습니까.

변화가 있는 것 같지만 큰 변화가 없습니다.

최근에 나온 카르마파의 책에 보면 “각자 나를 보세요”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나로서 출발합니다.

외부의 변화를 기대하기 보다는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 봐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로 발원해야 할 것이, 그리고 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조용히 자신을 관조하면 다들 훌륭한 자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늙은이도 아기도 아닙니다.

절대 평등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불성입니다.

모든 것은 나에게서 시작됨 알아야 우리가 매년 정월 초하루마다 기도를 하면서 “나는 이런 희망을 가지고 올해 이렇게 노력 하겠다”고 부처님 앞에 소원을 비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자신을 가만히 들여 보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없고 외부에 환경의 변화만을 바라는 기도는 허망한 것입니다.

눈으로 본 것도 귀로 들은 것도 다 제쳐놓고 가만히 관조해 보십시오.

누구든지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행동 할 수 있습니다.

‘근심걱정’이라는 이름조차 없는 그 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입니다.

부처님은 항상 원인을 존중합니다.

원인이 잘못되면 결과도 좋지 못합니다.

처음 출발을 잘 해야 됩니다.

입 딱 다물고 ‘나는 오직 부처님에게 내 뜻을 전달하려고 왔다.’, ‘어떠한 누구한테 칭찬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지’하는 사람은 기도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자라면 아무리 기도를 성취 했다고 떠들어도 그릇이 시원찮아서 담기지 않습니다.

자세도 낮춰야 합니다.

그것을 하심(下心)이라고 합니다.

100년 전 진주에 사는 한 노 보살님이 계셨는데 집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음식점에 취직해 밥을 짓는 일을 하며 살았는데 참 정성스럽게 상을 차려 줍니다.

또 손님이 남긴 밥과 반찬은 정갈하게 관리해서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대접하니, 그 음식점과 노보살에 대한 소문이 여기 저기 퍼졌습니다.

참 자비로운 분이지요.

예전에는 소달구지에 수확물을 싣고 자갈밭을 가다 보면 나락이 많이 떨어집니다.

노보살은 늙은 몸을 이끌고 달밤에 그것들을 쓸어 모읍니다.

티클 모아 태산이라고, 이렇게 한 달을 모으면 가마로 몇 개는 된다고 합니다.

노보살은 그것을 또 가난해서 봄에 뿌릴 씨앗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종자 하라고 주는 일을 10년을 넘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 해 동안 음식점에서 일을 하고 나중에야 밖에 나가서 음식점을 차렸는데 진주에서 알아주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노보살의 알뜰한 살림 솜씨와 남다른 음식맛에 부자 된 비결이 있었겠지만, 항상 어려운 이들을 잊지 않았던 그 아름다운 마음 씀씀이가 바탕이 됐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바라는 것은 태산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오욕에 찌든 번뇌 망상에 젖어 있다 보니, 법회 시간에 스님이 아무리 목탁을 치며 기도해도 뒤에서는 딴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왜 스님은 목탁을 오래 칩니까.

화장실 갈 시간도 없습니다.” 이렇게 불평들을 해 댑니다.

그런 분은 절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숫자를 바라지 않습니다.

법당에 앉아 실례를 해도 좋습니다.

올해는 단단히 각오를 합시다.

공양주 보살도 오늘만큼은 공양을 조금만 준비하고 기도하십시오.

공양주가 기도를 잘해야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기도를 성취 하지요.

여러분도 주위를 정돈하고 절도 한 번 더 하고 염불도 더 하십시오.

평소보다 30분만 더 해 보십시오.

이번 일주일은 깐깐하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시간이 간 줄도 모르고 노력해야지 보통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6년 고행을 하셨습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목동의 풀을 빌려서 풀을 깔고서 내가 이 자리에서 마지막 뜻을 이루지 않으면 일어나지 말아야지 하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앉았습니다.

잠 잘것 다 자고 먹을것 다 먹고 하지 않습니다.

또 이번 일주일은 말이 적은 것이 좋습니다.

집에 가서도 독경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하십시오.

염불할 때 누가 와서 욕을 하더라도 아랑 곳 없이 하십시오.

내가 깨끗하면 상대방도 깨끗해집니다.

법당에 오면 망상부터 버려라 열반하신 효봉 스님은 간절하게 노력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위에서 “며칠 밥도 안 먹더라”고 해도 자신에게는 잠깐일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든 참선이든 염불이든 시간 가는 줄 몰라야 됩니다.

반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바보가 되면 스스로는 큰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담든지 간에 부족함이 없는 그릇이 되어 본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내놓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대장부 기틀을 부처님 앞에서 배워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훌륭한 장부가 되라, 그리고 남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아들, 딸 잘 키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훌륭한 장부의 길을 가고 남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당연히 아들 딸 잘 키우고 부모도 잘 모십니다.

부모가 유언장 안 써도 자녀들이 잘 봐줍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아버지 어머니는 훌륭한 그릇이 되어 있으니 자녀가 그 그릇에 안 담길 수 있겠습니까.

“간절히 남을 따라 찾지 말라.

점점 나하고 멀어져 간다.

지금 내가 스스로 가니 가는 곳마다 만나는구나.” 중국의 동산 스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여.

왜 자꾸 남을 의지하려 하느냐.

너의 일은 네가 스스로 해라.

그리고 나아가서는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되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미안한 말이지만 고급 장애인이 너무 많습니다.

억지로 남의 힘을 빌리려고 합니다.

집도 나라도 망하는 길입니다.

남을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바로 배우고 바로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바로 배우고 실천한 자신의 경험이라야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장애는 욕심에서 비롯 돈도 적당하게 있어야 됩니다.

욕심이 지나쳐서 항상 돈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원효 스님도 욕심 때문에 고생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법상에서 법문한다고 하지만 욕심을 버리라는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욕심 버리면 바로 보입니다.

기도도 욕심이라는 것을 다 내려놓고 해야 참다운 기도입니다.

이렇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이렇게 하겠습니다가 돼야 합니다.

일단 욕심을 버려 놓고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해야 되는가를 정해놓으면 무슨 어려움이 있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결국 고생도 내가 사서 하는 것이지 누가 고생을 갖다 줘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욕심으로 봐서 그렇지 내려놓고 보면 내가 일등 바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큰마음 먹고 기도 한번 멋지게 해 봅시다.

간절한 생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틱낫한스님─ ‘삶은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다워’

‘삶은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다워’ 틱낫한 스님 평화와 행복은 꿈이 아닙니다.

일상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현실로 나타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새해 며칠 동안은 잠시 멈춰 서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좋은 시간입니다.

이 시간만큼은 과거에 대한 걱정과 미래에 대한 설계를 잠시 접고, 현재에 대한 불안과 걱정도 거두면서 바로 이 순간에 여러분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을 깊이 들여다보길 바랍니다.

문득 태양의 따스함, 어린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그리고 상쾌한 바람이 느껴집니다.

이 모든 것이 행복과 안녕과 기쁨의 샘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평화와 행복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현대사회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길을 잃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잠시 서서 미소를 짓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길거리에 마른 풀이 추운 겨울을 힘겹게 견디고 있음을 매일 봅니다.

그리고 놀이에 빠진 초등학생도 만납니다.

이런 풍경은 여러분을 미소 짓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미소는 여러분 자신에게 기쁨과 기분전환을 안겨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심지어 작은 풀까지도 여러분의 미소에 힘을 얻을지 모를 일입니다.

푸른 하늘과 울긋불긋한 꽃, 새의 지저귐,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이 모든 것은 불국정토, 즉 신의 왕국에 속하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은 죽어야 신의 왕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신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매우 치열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다만 `정신집중(concentration)`과 `마음다함(mindfulness)`이 전제돼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경이로 가득한 참된 삶을 몸으로 접할 기회를 잡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바로 이 순간에, 바로 여기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내세의 천국을, 신의 왕국을, 혹은 정토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죽음 뒤에나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죠.

그러나 부처님에 따르면, 이 순간에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지금 이 순간에는 행복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미래를 위해 현생을 거부해야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삶은 바로 이 순간에 경이롭고, 만약에 여러분도 충분한 자유를 누린다면 이 순간에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평화와 행복을 얻는 방법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먼저, 마음다함이라는 수행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의 조건들이 늘 우리 곁에 있구나라고 자각하게 됩니다.

지금 당장 펜을 들고 여러분이 가진 행복의 조건을 적어 보십시오.

행복의 조건들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불교 신자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을 행복하게 할 조건은 아주 많습니다.

여러분이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몸을 열고, 마음을 열면 모든 행복의 조건이 당신의 손에 닿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마음다함이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마음다함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행복의 조건들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사람은 행복을 돈과 명성·권력·섹스를 기준으로 파악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와 젊은 세대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과 파괴를 안겨줍니까? 마음다함이란 마음이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다함은 항상 뭔가에 마음을 온전히 바친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여러분의 발자국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도 있고, 아직 건강한 몸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를 떠올릴 수도 있지요.

사실, 마음다함은 일상의 모든 활동에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 운전을 하고, 차나 커피를 마실 때도 지극 정성으로 마시고, 심지어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때도 마음다함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정신 집중 또한 행복의 원천입니다.

마음다함이 여러분을 행복으로 안내하지만, 만약에 여러분의 마음이 마음다함의 상태를 놓아버린다면 여러분은 다시 행복을 잃고 맙니다.

마음다함의 지속은 여러분이 정신집중을 계속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 순간에 정신집중했다가 그 다음 순간에 놓아버린다면, 여러분은 행복을 계속 지켜갈 수 없습니다.

소극적으로 들리는 행복의 원천이 하나 있습니다.

포기하거나 마음을 비우는 것이지요.

여러분을 행복하지 못하게 막는 유일한 장애는 아마 여러분이 버리거나 비우지 못하고 있는 바로 그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행복에 대한 어떤 관념을 품고 있다면, 여러분이 행복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바로 그 관념일지 모릅니다.

이런 저런 것은 꼭 가져야 하고, 이런 저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식이죠.

지금까지 당신의 행복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온 것들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사람일 수도 있고, 주택일 수도 있고, 욕망일 수도 있고, 관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뒤로 버리고, 더 이상 그런 것의 희생이 되지 않는 것이 아마 행복의 진정한 조건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마음을 비우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지속적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참선 수행의 목적이 뭡니까? 여러분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것입니다.

자유인처럼 앉고, 자유인처럼 걷고, 자유인처럼 호흡해 보세요.

그러면서 여러분 속에 도사리고 있는 노예의 뿌리를 찾아내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의 욕망과 화와 두려움의 노예가 돼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쑥 빠져 나가게 내버려 두십시오.

단순한 삶은 행복의 또 다른 원천입니다.

단순하고, 마음을 다하는 삶의 중요한 양상 하나는 소비 방식입니다.

우리는 매일 뭘 먹습니까? 아이들에게는 뭘 먹이고 있습니까? 심각한 질문입니다.

잠시 그 문제를 곰곰 생각해보세요.

부처님은 모든 존재가 음식으로 살아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대인의 경우 육체에는 소화 가능한 음식을 공급하고, 정신에는 TV와 음악·빌보드 광고·잡지·영화 등 감각적인 대상들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이미지와 소리를 섭취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든 것은 우리의 의식과 육체·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일부 선진국의 어린이들은 매일 TV를 네 시간 이상 시청합니다.

어린이들이 TV를 보면서 어떤 자양분을 섭취하겠습니까.

어린이들이 어떤 감정과 사상을 받아들일까요? 젊은 세대 사이에 폭력과 화·갈망·절망이 팽배합니다.

그들이 소비하는 음식을 보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섭취한다는 것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그것이 우리의 신체와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어린이와 이 사회를 보호하려면 우리는 마음을 다 쏟는 소비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매일 섭취하도록 내놓을 수 있는 경이로운 것들이 이 세상에는 아주 많습니다.

자연의 정원은 맛나고 건강한 음식으로 넘쳐납니다.

말하는 방식, 걷는 방식, 정성을 다하여 호흡하는 방식, 그리고 동정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방식,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내놓을 수 있는 음식들입니다.

평화의 이미지, 화해의 이미지, 더욱 커진 이해심의 이미지가 어린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음식입니다.

부디 여러분이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가꿔나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린이들을 어떻게 키워가고 있는지를 새해에 다시 한번 돌아봐 주시길 바랍니다.

대신 여러분은 구름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나무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의 책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연은 훌륭한 책이니까요.

꼭 글을 파고들 필요가 없습니다.

독서 못지 않게 자연을 읽는 일 또한 흥미롭습니다.

저는 많은 아이들에게 만물이 서로 얽혀 존재한다는 점을 가르치기 위해 아이스크림 콘과 구름을 깊이 들여다보는 방법을 가르쳐왔습니다.

아이들과 법문을 나누기 전에 저는 차를 마시며 아이들에게 이렇게 묻지요.

‘내가 지금 구름과 비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 ‘라고요.

저는 어린이들에게 다음 번에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는 꼭 잊지 말고 아이스크림 속에 들어 있는 구름 냄새를 맡고 구름에 미소를 지어 보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70%가 물입니다.

물을 마실 때 여러분은 몸 속에 구름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비에서 구름을 볼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부처님의 눈인 지혜를 얻은 것입니다.

지혜는 깊이 들여다보는 행위가 맺는 결실이고, 행복의 또 다른 원천입니다.

여러분은 금방 자신의 삶이 주변의 모든 것과 서로 얽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구름과 사슴, 꽃의 새싹과 밀접하게 얽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모든 것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행복은 `인간이란 상호 의존적인 존재`라는 지혜에 크게 좌우됩니다.

그 깨달음을 얻는다면 홀로 있음에 대한 두려움, 죽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단절에 대한 두려움을 쉽게 초월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책을 읽는 것은 매우 즐거운 수행이지요.

오늘날 많은 사람이 TV와 컴퓨터에 파묻혀 삽니다.

이 또한 매우 자연스럽지 못한 일입니다.

물론 매우 교육적인 TV 프로그램도 많고, 컴퓨터 또한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균형을 잡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연에서 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서 위대한 예술작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파도는 자연의 음악입니다.

여러분의 집 앞뒤로 걸린 구름의 모양, 그것은 그대로가 그림입니다.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상설 전시관이지요.

거기 자연에는 예술가가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펼쳐지는 산과 강·바다, 그것은 매시간 달라지는 그림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수행법 몇 가지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저 자신만 아니라 저 주변의 많은 친구들의 행복에도 꼭 필요한 마음다함과 정신집중,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저의 걷기 명상 수행(행선·行禪)부터 이야기 하지요.

중국 당나라의 혜조(慧照)선사는 땅 위를 걷는 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떻게 그게 기적일 수 있을까요? 자유 때문입니다.

어떤 자유냐고요? 고민과 두려움·외로움, 그리고 계획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면서 땅과 발의 접촉을 즐깁니다.

그리고 온몸으로 호흡을 즐기지요.

단 한 발자국으로도 우리는 부처님의 정토로, 신의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단 한 발자국으로 우리는 현 순간을 즐길 수 있습니다.

걸음 걸음이 무척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걸음을 옮기면서 호흡을 마음 속으로 따라가고, 부드럽게 미소 짓습니다.

전신을 편안하게 풀어주고, 경쾌하고 신선한 기분을 계속 유지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매순간 목적지에 닿고 있는 것입니다.

플럼 빌리지(틱스님이 이끄는 영성 수행공동체)에서 우리는 마음다함의 수행을 고무하기 위해 시를 즐겨 활용합니다.

‘나는 이미 도착했다/나는 고향집에 왔다/바로 여기 이곳에서/바로 지금 이 순간/나는 바위처럼 굳건하다/나는 바람처럼 자유롭다/궁극의 그곳 대자유에/나는 언제나 거하노라’라는 시입니다.

도시에서는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 서너 걸음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드럽게, 차분하게, 편안하게 걷지요.

여러분이 걷기 수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평화와 기쁨을 발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다함과 정신집중을 얻으려면 느릿느릿 걷는 게 좋습니다.

걸음걸이를 늦추면 여러분은 매 순간 하고 있는 일을 더 절실히 의식할 수 있습니다.

잠시 자신의 호흡을 즐겨 보세요.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느껴질 것입니다.

어느 때나 실천할 수 있는 매우 간단한 운동이지요.

손을 복부에 대고, 배가 올라오고 내려가는 것을 느껴 보세요.

호흡을 가볍고 자연스레 해 보세요.

호흡을 고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마음으로 호흡을 따라 가 보세요.

육체와 정신이 다시 살아나면서 차분함과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느껴집니다.

마음을 다하는 호흡은 가장 기본적인 선(禪)수행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두려움과 화·욕망 같은 강렬한 감정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런 호흡을 생활화하면 동정심과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게 되지요.

불교에서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 바른 말을 골라 하는 수행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동정심으로 듣고 사랑으로 말하는 것은 연인과 연인,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국가와 국가 사이의 의사소통을 회복하는 경이로운 방법입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려면 온몸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 상대방은 아내일 수도 있고, 남편일 수도 있고, 아들이나 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내면에 너무 많은 화와 폭력을 가두고 있기 때문에 정성으로 들을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말을 다정하게 할 줄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들은 항상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판하려 들지요.

그리고 그들의 언어는 매우 거칠고 비뚤어져 있습니다.

그런 언어는 언제나 우리 안에 화와 짜증을 키우고, 측은지심으로 남의 말에 귀기울이지 못하게 합니다.

행복과 자유의 중요성을 잘 말해주는 작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사공이 물길을 거슬러 힘겹게 노를 젓고 있는데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배가 하나 있었답니다.

곧 충돌하고 말 것 같은데 저 쪽 배에서는 아무런 노력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두 배는 안개가 자욱한 강에서 충돌했고, 사공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사공이 정신을 차려 상대방 배를 보니 빈 배가 아니겠습니까.

일순간 그 사공의 화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화를 내겠습니까, 아니면 담담해지겠습니까.

이렇듯 화를 내고 안 내고는 여러분 자신에게 달린 것이지, 나 아닌 다른 데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해심과 동정심을 키워가면 그 첫 수혜자는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마음다함과 정신집중·통찰력을 확보하면 동정심을 쉽게 가꿀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는 가족과 사회, 더 나아가 이 세상에 대단히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평화로운 발걸음과 정성을 다 쏟는 호흡, 사려 깊은 소비, 혼이 담긴 시선, 측은지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자신과 타인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누그러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이 순간에 잡을 수 있는 행복과 평화에 이르는 아름다운 길이 펼쳐집니다.

한번 노력해보십시오.

번역=정명진 기자myungjin@joongang.

co.

kr 16세에 베트남에서 출가한 틱낫한(釋一行·76)스님은 1980년대 초 프랑스로 망명한 후 1982년 보르도 지방에 명상수련센터 `플럼 빌리지`를 세워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틱낫한은 3월 두번째 방한에 앞서 중앙일보 독자들에게 새해 편지를 보내왔다.

첫회분은 3일자 8면에 실렸다.

행복해지려는 사람들에게 매일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깊이 성찰해 보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처한 현실의 개선을 위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연스럽지 못한 삶의 방식을 많이 익혀 왔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쏟습니다.

물론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요.

하지만 독서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으면 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출처: 중앙일보 게재일: 2003년 01월 03일 [8면] / 01월 04일 [15면] 합본.

기고자 : 번역=정명진 기자

마성스님─인과(因果)의 무서움

인과(因果)의 무서움

-마성스님-

몇 해 전 아주 특별한 천도재에 참석했다.

어떤 보살이 밭일을 하다가 뱀을 만났다.

잠시 밭일을 중단하고 뱀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런데 뱀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자칫 잘못해 뱀을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그 보살은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결국 큰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뱀의 천도재를 지내주자는 결심이었다.

그 보살은 인과(因果)를 철저히 믿었고, 천도재를 통해 뱀을 죽인 살생의 업을 참회하고 싶었다고 했다.

어쨌든 천도재를 잘 마무리됐다.

지금 이 세상에 인과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이 인과의 법칙이다.

착한 덕을 쌓으면 선의 과보를 받고(善因善果), 나쁜 업을 지으면 나쁜 과보를 받는다(惡因惡果)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이 인과의 법칙은 호리(毫釐)의 오차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 같은 인과법을 믿지 않고 죄를 저지른다.

붓다는 처음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난 뒤, 깨달은 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여러 부류의 인간이 있음을 알았다고 했다.

이를테면 더러움이 적은 사람, 더러움이 많은 사람, 영리한 사람, 둔한 사람, 착한 사람, 악한 사람, 가르치기 쉬운 사람,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아는 사람,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것이었다.

특히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교화하기 어렵다.

이들은 내세를 믿지 않고 죄의 과보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과를 믿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등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남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지은 업(業)은 결코 숨길 수 없다.

그가 지은 업은 그것이 선업이든 악업이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게 돼 있다.

인간이 지은 업은 일단 결정되면 그 과보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지은 업을 다른 사람에게 이전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기가 대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업의 원리를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원리’, 즉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원리 또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다만 그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는 업의 성질과 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른바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를 3가지로 나눈다.

이 생에서 지어서 이 생에서 그 과보가 나타나는 업을 순현업(順現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가 다음 생에 나타나는 업을 순생업(順生業)이라고 한다.

차후생 또는 여러 생에 걸쳐 나타나는 업을 순후업 (順後業)이라고 한다.

지금 당장 그 과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업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그 업을 지은 사람에게 그 결과가 나타나고야 만다.

죄를 짓고도 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모든 사람들이 이 인과의 무서움을 안다면 악행을 삼가게 될 것이고 이 사회는 보다 맑고 향기로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불교포커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