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여스님─관세음보살 기도법

관세음보살기도법

-무여스님-

기도가 잘 안 되는 사람이나 희망과 포부가 충천하여 성공을 바라는 사람, 또는 자기 인생에 어려움이나 괴로움이 많은 사람일수록 관세음보살님께 지극한 서원을 세워서 애써보십시오.

기도의 요령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확고부동한 반석 같은 믿음의 바탕에서 간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믿을 신(信)자와 간절할 절(切)자 두 자가 가장 요긴합니다.

오직 철저히 굳게 믿고 간절하게 끊임이 없도록 해보십시오.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언제 어디서나 ‘관세음보살’이 끊이지 않아야 하고, 기쁘거나 슬프거나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밥을 먹든 일을 하든 ‘관세음보살’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하다가 시간을 채웠다고 안 한다거나 마음을 놓지도 말고, 잘 된다고 들뜨고 좋아하지도 말고, 안 된다고 괴로워하고 안절부절 하지도 말고, 새벽에 눈뜨자마자 저녁에 잘 때까지 ‘관세음보살’을 떠나지 않도록 해 보십시오.

기도하다가 보면 잡된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잡념에는 일체 신경을 쓰지 말고 망상이 떠오를수록 더 지극하게 간절하게만 불러보십시오.

안 되는 것 같은 기도지만 ‘하면 된다’, ‘나도 해낼 수 있다’는 굳건한 신념으로 간절하게 성심성의껏 애쓰다가 보면 망상이 없어지며 집중이 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더 지극히 간절하게 정근하고 집중 하다보면 오직‘관세음보살 일념’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기도공덕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기도가 관세음보살에 집중이 되고 빠지면 심하게 일어나던 번뇌와 망상도 저절로 없어지고, 마음은 고요해지고 편안해집니다.

더 집중이 되고 깊어지니 더 고요하고 평화스러워 집니다.

그러면 몸은 가볍고 마음은 맑아집니다.

어떤 때는 깃털처럼 가볍다가 몸의 존재조차도 의식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몇 시간씩 앉았어도 조금도 지루하거나 괴로운 줄 모르고, 법당에 계시는 등상불처럼 꼿꼿하게 딱 버티고 앉아서 깊은 삼매경에 들게 됩니다.

이런 날은 아침공양을 막 하고 앉은 것 같은데 잠깐 사이에 점심때가 되고, 저녁식사를 하고 기도 자세를 취한 것 같은데 벌써 밤 취침시간이 되어 시간가는 것이 눈 깜짝할 사이 같습니다.

심지어 내가 아파트에서 기도를 하는지 법당에서 정근을 하는지 조차 구분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기도에 빠져 시간과 공간까지도 초월하게 됩니다.

이렇게 몸은 가볍고 맑아지고 시공(時空)까지도 초월하게 되면 법열까지도 느끼게 됩니다.

기쁘다고 할 수도 있고 즐겁다고 할 수도 있는,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온몸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기분은 지금까지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느낌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 안락(安樂)을 한 번만 제대로 느껴도 두고두고 잊지 못합니다.

이 희열(喜悅)은 제대로만 체험하면 ‘오직 이것뿐이다’, ‘이 이상이 없다’고 하면서 이때부터는 기도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리고 말려도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부처님 앞에 가면 감사한 눈물이 절로 나오고 불교를 만나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복된 일인 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가고 머물고 앉고 누으며 항상 관세음보살을 염하고, 생각 생각에 관세음보살이 떠나지 않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기쁨을 선사하게 되고, 머무는 곳마다 편안한 세상, 괴로움이 없는 세상이 되며, 가는 곳마다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해 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대무심(大無心)의 경지에 이르러 관세음보살의 대비원력(大悲願力)과 어떠한 고난도 극복하고 소원을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기도자의 간절한 마음이 합일되어 기도가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의 자비광명(慈悲光明)이 기도자의 공덕으로 변하여 만 중생에게 뜨겁게 베풀어지게 됩니다.

관세음보살의 어진 말씀과 그 숭고한 뜻과 자비스런 행동처럼 기도자가 닦은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다른 중생들에게 이익을 돌리는 것입니다.

기도로서 얻은 정신세계뿐만 아니라 자기가 쌓아온 좋은 과보까지도 자기만을 위해서 쓰지 않고 관세음보살처럼 중생을 위해서 회향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관세음보살이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求願者)가 되고, 중생들의 영원한 안식처(安息處)가 되며, 진정한 귀의처(歸依處)가 되어 보십시오.

그렇게 기도공덕을 쌓지 못한 사람은 매일 관음정근을 삼만 번 이상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서 싫더라도 항상 웃는 얼굴로 남을 위해서 하루 한번 이상은 선행을 해보십시오.

천일기도 회향 무렵에는 관세음보살이 기도자를 모시고 수미산(須彌山) 정상을 올라가고 있을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에 목숨을 놓았더니 밝고 신령하고 안락하도다 한 물건이여 사물마다 그대로가 비로자나 법신이요 곳곳마다 금색세계(金色世界) 아닌 곳 없네.

해월스님─인연과 생각은 실체가 없다

***인연과 생각은 실체가 없다***

해월스님

| 논설위원ㆍ해인사승가대학장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무아의 인연의 법을 가르쳐 주셨다.

우리 존재는 인연으로 만들어졌고 인연으로 살다 인연으로 죽는다.

인연의 존재로서 인연에서 일어나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우리 삶이다.

우리 삶들은 인연 속에서 허덕인다.

인연이 무거운 사람, 인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인연들에게 묶여있는 사람, 인연에 얽히는 사람, 인연이 버거운 사람, 인연을 푸는 사람, 인연을 즐기는 사람… 삶들은 과거이든 현재 이든 미래이든 인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행자는 과거의 인연들에게 아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어떤 인연들에게 걸려 헤매지 말아야 한다.

수행자도 인연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연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는 있다.

인연에는 실체가 없는 사실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이해할 때이다.

외식제연 내심무천 심여장벽 가이입도(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 加以入道)라 했다.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이는 마음이 없어서 마음이 벽과 같아야 비로소 도에 든다.

인연을 짓고 잇는 것이 생각이다.

세상은 온통 생각의 투영이다.

세상은 생각놀음이다.

생각이 일어나, 생각이 변하고 생각이 갈등하고 생각에 울고 웃는다.

생각은 꿈같은 것이다.

생각은 아지랑이, 생각은 물안개, 생각은 외래자, 생각은 분열자, 생각은 차별자이다.

생각은 이중성이다.

수행자는 생각에서 생각을 씻는다.

물에서 물을 씻는 법이다.

수행자는 생각을 다스려야 한다 생각이 문제이다.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생각의 주인 못되면 노예가 될 뿐이다.

스스로 일어나는 생각을 이겨야 한다.

생각은 본바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인연 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연에서 나오는 것을 생각이라고 한다면 본바탕에서 나오는 것이 도다.

도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대로 일 뿐이다.

수행자는 생각에게 걸리지 않는다.

수행자는 생각을 바르게 본다.

수행자는 생각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

생각이 오고 가면 오고가는 그대로 둘 뿐이다.

도인이 보여주는 것은 같은 것을 보여줘도 같은 것이 아니다.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신문]

해월스님─열반 그 생멸의 멈춤 그리고 깊은 침묵 생명

☆열반, 그 생멸의 멈춤 그리고 깊은 침묵 생명☆

열반재일 특집 / 강주스님에게 듣는 부처님 열반이야기 저 먼 날 마가다국의 우루벨라 마을에 있는 니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서 한 구도자가 깨달음의 눈을 떴다.

생명의 본질에 눈 뜬 자, 본질에 머무는 자, 본질을 쓰는 자, 그 분을 사람들은 ‘붓다’라고 불렀다.

깨달음을 성취한 후 붓다는 침묵하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붓다는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대지를 걸으며 법을 전했다.

아침햇살 아래서도, 노을이 지는 순간에도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걸었다.

그리고 붓다는 생사를 반복하며, 이원(二元)에 떠도는 삶, 무명의 고통 속에 헤매는 삶들에게 말했다.

“귀 있는 자여! 들어라! 눈이 있는 자여! 보라.

여기 해탈의 길이 있다.”

붓다의 사바세계 마지막 길은 마가다국의 수도인 왕사성에서 시작된다.

늙으신 붓다는 더위와 장마를 이기지 못하고 병에 걸려 심한 고통을 겪었다.

장마철이 거의 지나갈 무렵, 병에서 회복한 붓다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을 때, 아난이 곁에 앉아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아무런 유언도 없으시기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생사의 오고감 자체가 장애는 아니다 ‘법’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해라 자기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아난다야, 교단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느냐? 나는 이미 안팎의 구별 없이 모든 법을 설했다.

아난아, 나의 가르침에는 어떤 것을 숨기는 따위의 비밀스러운 진리는 없다.”

병색이 완연해진 붓다는 언덕에 올라 노을 지는 바이샬리를 바라보며 설했다.

“아난다야! 내가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 되리라.”

붓다의 눈빛은 고요 속에 연민으로 가득 차있는 듯했다.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에게 생사의 오고 감 자체가 장애는 아니다.

더구나 연기(緣起)와 무상(無常)의 진리를 체득한 붓다가 ‘생의 마감’을 애통해 할 이유는 없었다.

붓다는 또 다시 걸었다.

히란야와띠(Hiranyavati) 강을 건너 쿠시나가라 근처의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평소처럼 마을사람이 올린 공양을 받았다.

쭌다(cunda, 춘다)가 올린 공양을 드신 붓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극심한 통증을 일으켰다.

“아난다여.

아난다여! 나는 지금 몹시 피곤해 눕고 싶다.

저기 사라수 아래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깔아다오.

나는 오늘 밤 여기에서 열반에 들겠다.”

부처님 열반성지 인도 쿠시나가라의 열반당.

불교신문 자료사진.

내가 가르친 법과 계율이 너희들의 스승이 되리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해 간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붓다는 맑고 고요한 얼굴로 ‘생멸이 둘이 아님’ 을 시현했다 깨달음의 꽃잎은 떨어졌지만 씨앗은 때를 기다릴 뿐… 사라수 아래 자리를 깔자, 붓다는 옆구리를 아래로 하고 발 위에 발을 포갠 자세로 편히 누웠다.

붓다가 세연(世緣)이 다했음을 알아챈 아난다는 나뭇가지를 붙들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스승을 보내야만 하는 순간이 도래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애통해 하는 아난다를 바라보며 붓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난다여.

울지 마라.

누구나 가까운 사람과 언젠가 한번은 헤어지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 이며 인연이다.

그리고 한번 태어난 것은 그 어떤 것이나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죽지 않고 영원히 목숨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아난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제자 들과 신도들이 붓다의 주위를 지켰다.

시간이 흐를 수록 숨결이 거칠어 가는 붓다가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비구들아, 나의 가르침에 의문이 있으면 물어라.”

대중은 말이 없었다.

침묵만이 흘렀다.

그 때 아난다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수행자 중에는 붓다의 가르침에 의문을 지닌 사람이 없습니다.”

마치 사라질듯 한 불꽃처럼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뜬 붓다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마라.

함께 내 교법(敎法)으로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도(道)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 수행자들의 원칙으로 가르침, 화합, 공경, 정진을 제시한 것이다.

붓다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법(法)을 등불로 삼고, 진리(眞理)를 의지해라.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해라.”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의 가르침을 유훈(遺訓)으로 전한 것이다.

붓다가 이어 말했다.

“아난다야,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가르친 법과 계율이 너희들의 스승이 되리라.

비구들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해 간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다.”

그리고 붓다는 열반에 들었다.

가르침과 고요한 침묵만을 남긴 채 붓다는 니르바나를 보여주었다.

사바세계의 마지막을 맞이한 쿠시나가라(Kushinagar) 에서 붓다는 맑고 밝고 고요한 얼굴로 생멸(生滅)이 둘이 아님을 시현(示現)했다.

깨달음의 꽃잎은 떨어졌다.

그리고 씨앗은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