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방법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방법

-달라이라마-

언젠가 한 신도에게 “명상을 시작하면 달라이 라마의 얼굴이 떠오르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덕분에 요즘에는 분노가 끓어올라도 나를 생각하면서 분노를 가라앉힌다고 합니다.

어쨌든 분노가 끓어오를 때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컨대 당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기분이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동시에 떠올릴 수는 없다!” 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생각이 더 강렬하다면 우리 정신은 자동적으로 새로운 방향으로 향하게 마련입니다.

그럼 당신을 화나게 만들었던 원인이 슬그머니 잊혀질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 존자 ‘365일 명상’ 中 에서-

우학스님─기도는 즐거워야한다

기도는 즐거워야 한다

-우학스님-

불교의 일부 교의(敎義)에서는 인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면이 없잖아 있다.

이 세상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인간의 사대(四大)육신은 모든 오물(汚物)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방법에도 부정(不淨)의 관(觀)이 요구됨으로써 다분히 불교가 소승적인 염세주의의 늪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수행과정에서의 이런 부정관이 전혀 무익하고 쓸모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 본래의 대승적 견지에서는 재고할 점이 많다.

궁극을 가르치는 법화경, 화엄경 등 대승경전에서는 이 세상을 아름다은 연화장(蓮華藏)세계로 보고 있다.

스스로 눈을 뜨고 보면 연꽃과도 같은 눈부신 세상이 펼쳐져 있음을 가르친다.

따라서 대승불교에 있어서는 그 수행의 방법론도 부정관이 아니라 자비관(慈悲觀)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자비관이란, 기도할 때 관세음보살님 등 한없이 자애로운 불보살님의 상호를 머리속에서 놓치지 않고 관(觀)하는 것이다.

신라시대 의상스님은 백화도량 발원문에서 자비관을 ‘세세생생 관세음보살님을 머리에 이고 다니겠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비관의 수행을 하다보면 관세음보살님의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눈길이 그 마음 가득 부처님으로 채워진다.

따라서 자연, 마음이 즐거울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해오던 나름대로의 기도가 특별한 주제가 없었던가 또는 기도 중에는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고 짜증스러웠다면 이 자비관의 기도를 해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일이 즐겁지 않으면 능률도 떨어질 뿐 아니라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도 못한다.

특히, 기도는 하루 이틀 하다가 말일이 아니므로 억지나 오기를 부려 마지못해 하다보면 오히려 삶의 스트레스가 되기 쉽다.

기도 중에 나타나는 마장의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단, 기도는 좋아서 해야 한다.

자비관의 기도는 부처님을 머리속에 생각하는 관법(觀法)이므로 직접 부처님을 뵙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부처님을 관한다면 곧 부처님이 늘 자신과 함께 하시는 일이 되므로 세상의 어떤 경우에 놓이더라도 두렵지 않다.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현실이 더없이 훌륭한 수행과목으로 느껴진다.

기도가 공부 못하는 아이들 앞에 놓여진 밀린 숙제가 되어서는 안된다.

기도에 질질 끌려 다니다 보면 기도자는 언제나 어려운 상황아래 놓인 듯 착각한다.

즉, 기도자가 기도의 주체가 아니고 그 상황들이 주체가 되어 곧 잘 헐떡거리게 된다.

수능시험이 끝나면 법당이 썰렁한 경우가 그렇다.

기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도에 임하는 자세때문에 복을 쫓아가는 기복의 형식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내가 스스로 기도의 주인공이 되고, 기도가 늘 즐거우려면 그 수행방법이 긍정적이어야 한다.

늘 자비스러운 부처님을 생각하는 이 자비관의 기도는 관음기도에서 특히 좋은 수행법이다.

처음에는 늘 부처님 사진을 갖고 다니면서 ‘부처님 떠올리기’ 수련을 해야 한다.

어느 단계에 올라서면 기도는 마냥 즐겁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환희지(歡喜地)에 올라선다.

어쨋든 기도는 즐겁게 해야 한다.

우학스님─기도는 오로지 한 부처님으로

기도는 오로지 한 부처님으로

-우학스님-

불교적 기도는 다양하다.

여기에는 사경,독송,정근,다라니주력 등이 있다.

그런데 기도라고 하면 주로 같은 부처님 명호를 반복해서 외우고생각하는 정근 기도를 말한다.

정근 기도를 할 때 주의할 점은 여러 부처님 명호를 많이 섞어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어느 신도님과의 상담 중에 1시간 정근기도를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부처님 명호를 몇 십분 씩 배분해서 염 하는 이야기를 듣고 아연실색한 적이 있다.

듣다 보니 나름대로 일리는 있었다.

가정에 평안을 위해 관세음보살 정근을, 자녀 학업성취를 위해 문수보살 정근을, 돌아가신 이의 천도를 위해 지장정근을, 내세 극락 가기 위해 아미타불 정근을, 옆집 아주머니가 하니까 남묘호랑개교를 한다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다 보면은 불현듯 다른 부처님께 미안하기도 하고 혹시나 여타의 부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면 어떻하나하고 불안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을 저 희랍의 신이나 우리 인간들처럼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나오는 괜한 망상들이다.

불교는 다신교가 아니다.

여러 부처님 명호가 있다고 하여서 그런 부처님들이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신들의 존재처럼 계시는 것이 아니다.

단지 화신의 이름일 뿐 실제적인 모습으로 계시는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즉 용처에 따라 때로는 관세음보살로 때로는 지장보살 등으로 나투신다.

형상을 떠난 참 부처님의 끝없는 화현이므로 어느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던지 결국에는 진리이신 법신불을 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정근 기도를 한답시고 한 마음 한 부처님으로 몰입하여 들어가지 않고 이분 저분의 부처님 명호를 찔끔찔끔 부르다 보면 마음이 흩어져서 선정력 즉,삼매의 힘을 얻을 수가 없다.

우리의 세포는 7년이면 완전히 바뀐다는 학계의 학설에 맞추어 만일 7년 이상 외우면서 기도한 부처님 명호가 있다면 누가 뭐라고 하던지 오직 그 부처님 이름만 불러야지 다른 제삼자의 불필요한 예기를 듣고 헷갈려서는 안된다.

거듭 말씀 드리자면 기도는 오직 화두 일념으로 참선하듯이 한 부처님으로 밀어 붙일 일이며 욕심을 부려 온갖 부처님 이름을 총동원 시켜서는 곤란하다.

어느 부처님 이름을 부르든지 결국에는 광명 그대로 계신 법신불께 귀결되고 자연스레 상황에 따른 가피를 입게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 불교에서는 주로 관세음보살님을 많이 신앙하고 있는데 이는 신행 편재상 아주 바람직하다.

아이들도 줄줄 외는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님이 바로 관세음보살이요, 무슨 기도든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그 유명한 천수경이 관음 신앙의 결정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