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학스님─기도는 즐거워야한다

기도는 즐거워야 한다

-우학스님-

불교의 일부 교의(敎義)에서는 인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면이 없잖아 있다.

이 세상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인간의 사대(四大)육신은 모든 오물(汚物)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방법에도 부정(不淨)의 관(觀)이 요구됨으로써 다분히 불교가 소승적인 염세주의의 늪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수행과정에서의 이런 부정관이 전혀 무익하고 쓸모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 본래의 대승적 견지에서는 재고할 점이 많다.

궁극을 가르치는 법화경, 화엄경 등 대승경전에서는 이 세상을 아름다은 연화장(蓮華藏)세계로 보고 있다.

스스로 눈을 뜨고 보면 연꽃과도 같은 눈부신 세상이 펼쳐져 있음을 가르친다.

따라서 대승불교에 있어서는 그 수행의 방법론도 부정관이 아니라 자비관(慈悲觀)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자비관이란, 기도할 때 관세음보살님 등 한없이 자애로운 불보살님의 상호를 머리속에서 놓치지 않고 관(觀)하는 것이다.

신라시대 의상스님은 백화도량 발원문에서 자비관을 ‘세세생생 관세음보살님을 머리에 이고 다니겠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비관의 수행을 하다보면 관세음보살님의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눈길이 그 마음 가득 부처님으로 채워진다.

따라서 자연, 마음이 즐거울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해오던 나름대로의 기도가 특별한 주제가 없었던가 또는 기도 중에는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고 짜증스러웠다면 이 자비관의 기도를 해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일이 즐겁지 않으면 능률도 떨어질 뿐 아니라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도 못한다.

특히, 기도는 하루 이틀 하다가 말일이 아니므로 억지나 오기를 부려 마지못해 하다보면 오히려 삶의 스트레스가 되기 쉽다.

기도 중에 나타나는 마장의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단, 기도는 좋아서 해야 한다.

자비관의 기도는 부처님을 머리속에 생각하는 관법(觀法)이므로 직접 부처님을 뵙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부처님을 관한다면 곧 부처님이 늘 자신과 함께 하시는 일이 되므로 세상의 어떤 경우에 놓이더라도 두렵지 않다.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현실이 더없이 훌륭한 수행과목으로 느껴진다.

기도가 공부 못하는 아이들 앞에 놓여진 밀린 숙제가 되어서는 안된다.

기도에 질질 끌려 다니다 보면 기도자는 언제나 어려운 상황아래 놓인 듯 착각한다.

즉, 기도자가 기도의 주체가 아니고 그 상황들이 주체가 되어 곧 잘 헐떡거리게 된다.

수능시험이 끝나면 법당이 썰렁한 경우가 그렇다.

기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도에 임하는 자세때문에 복을 쫓아가는 기복의 형식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내가 스스로 기도의 주인공이 되고, 기도가 늘 즐거우려면 그 수행방법이 긍정적이어야 한다.

늘 자비스러운 부처님을 생각하는 이 자비관의 기도는 관음기도에서 특히 좋은 수행법이다.

처음에는 늘 부처님 사진을 갖고 다니면서 ‘부처님 떠올리기’ 수련을 해야 한다.

어느 단계에 올라서면 기도는 마냥 즐겁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환희지(歡喜地)에 올라선다.

어쨋든 기도는 즐겁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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