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응스님─항상 베푸는게 진짜 불자

항상 베푸는게 진짜 불자

-원응스님-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緣赴感靡不周) 이항처차보제좌(而恒處此菩提座) 이 말은 산승이 좋아하고 어디든지 자주 인용하는 경구입니다.

『화엄경』 속에 있는 말씀인데, 부처님은 온 누리에 충만하시다, 그래서 중생이 마음을 깨끗이 하고 모든 번뇌를 지울 때 모든 부처님이 그 자리에서 인연을 따라 나투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법당에만 계신다고 생각했지, 우주에 충만하다는 표현을 쉽게 이해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아는 것만큼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수행을 쌓아서 내 마음을 끝없이 넓혀야 부처님의 진리도 엿볼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의 경구 한 마디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옛날 설산동자 같은 이는 부처님의 경전을 한 마디 듣기 위해서 자기 몸을 버렸습니다.

그 만큼 부처님의 경전을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밟히는 것이 경전이라고 합니다.

불교계 신문도 부처님의 말씀을 적어 놓은 것인데 워낙 흔해서 그런 것인지 그 뜻을 몰라서인지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모습은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지장기도를 하는 날입니다.

이 지장기도는 모든 영가와 사부대중이 뜻을 모아서 경건하게 선망부모와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왜 지장보살을 부르는 걸까요.

지장보살의 뜻을 새겨 봅시다.

지장보살님은 지옥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한없는 세월동안 눈물을 거둘 날이 없다고 합니다.

모든 죄가 다 떨어진 세상을 성불의 세계라고 하는데, 거기를 접어놓고 모든 괴로운 세상, 못난 사람이 사는 세상과 섞여서 그들이 부처님이 될 때 오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 중에서 가장 큰 원이라고 합니다.

항상 베푸는게 진정 불자 부처님의 가르침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 종교의 이상이라는 것은 비슷합니다.

모든 성인들이 생각한 것은 결국 같다는 겁니다.

기독교의 성경에도 100마리 양을 데리고 가는데 끄트머리 1마리 양이 처지니까 한 마리 양을 끌고 갔다고 합니다.

그것은 곧 지장보살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또 기독교에는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빈자일등과 같은 말이 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부처님이 받아주실까 하는 겸허한 생각으로 올리는 등이 과시하는 것보다 아름다웠던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장기도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모든 부처님의 광명이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석진 곳, 저 이북 땅의 헐벗고 굶주린 동포들에게도 이 불빛이 전해지기를, 그리고 이 빛이 전 세계에 두루 퍼져서 온 인류가 부처님의 진리를 다 맛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을 하는 겁니다.

지장보살의 명호를 한 번이라도지극하게 부르면 그 공덕은 한량이 없다고 합니다.

날마다 하는 흔한 염불이 어떻게 공덕이 될까 의심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지장보살을 부르라는 말에는 지장보살을 부르는 잠깐 동안이라도 부처님의 상호를 보며 지장보살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면서 염한다면 그 공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지장기도는 집에서나 절에서나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야 됩니다.

법당에 와서 지장보살을 부르다가 문턱 넘어가면 다 잊어버리면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꿩이 산을 돌아다녀도 마음은 콩밭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일상생활 가운데 있더라도 기도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부처님 공부는 항상 생활 속에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세속에서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항상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업이 몇 근이나 되는 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당집에 가서 살피지 말고 내가 남에게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쉽게 끊을 수 있느냐를 가늠해 보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남에게 억울한 소리를 들으면 며칠이 갑니까? 오래 가지요.

아주 억울하면 평생을 갑니다.

그것이 업입니다.

오래가면 오래 갈수록 업이 됩니다.

금생에 못 다하면 내생까지 가지고 갑니다.

그것이 길면 길수록 업이 무겁다는 것입니다.

업이 가벼운 사람은 싸우다가도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도인의 경계는 그런 일에 쉽게 물들지 않는 겁니다.

부처님도 중생에게 야단 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대자비심이 충만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 물들지 않습니다.

거기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어머니가 자식을 나무라는 겁니다.

회초리를 들지만 자식이 밉습니까? 내 마음이 더 아프거든요.

여러분들이 지장기도를 하는 동안은 기도에 마음이 집념이 되어서 억울한 마음은 붙을 겨를이 없어야 됩니다.

공부가 무거운가, 업이 무거운가 저울대에 올려놓으면 스스로 자명하게 나타납니다.

내가 아무리 도인인 척해도 억울한 것이 내 마음에 남아있으면 그것은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지장기도에 집념을 하면 모든 업이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남에게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다고 할지라도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마음 깊이 들어가면 모든 잡념이 다 끊어져서 오직 내 마음 가운데 지장보살만 남아있게 됩니다.

나중에는 지장보살을 갖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가까이 있는 것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눈이 나에게 달려 있지만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장보살을 염한다는 의식이 남아 있으면 아직 지장보살과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까이 있으면 지장보살을 부르면서도 지장보살을 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될 것 같으면 지장보살의 원력이 모든 중생을 다 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도 따라서 넓어지게 됩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넓어지고 육바라밀을 실천하게 됩니다.

남에게 베푸는 마음, 일상생활에서 항상 조심하는 것, 또 어려운 일을 참아가는 것, 이것이 지장기도 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지장보살뿐만 아니라 부처님께 참배하고 부처님을 가까이 하는 것도 부처님을 닮기 위해서입니다.

착하게 마음먹은 사람들은 얼굴도 맑아집니다.

업보중생이기 때문에 천차만별의 모습인데 나중에 업이 다할 것 같으면 전부 부처님 얼굴이 될 것입니다.

지장기도 끝없이 이어지길 요즘 효 사상이 멀어져 가는 것은 기가 막힌 일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자식을 키우는 분들이 많을 텐데 자식 키우는 것만큼 부모에게는 못하거든요.

그렇게 키운 자식에게 외면을 당한다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겠습니까.

이런 법문을 통해서 효행하는 사상이 되살아나길 바랍니다.

선망 부모를 생각하는 마당에 살아있는 부모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특히 최근에는 어린이, 청소년들에 대한 범죄가 많이 일어납니다.

대중매체에서 청소년들에게 볼 것 안 볼 것 다 보여주고는 보지 말라, 하지 말라 하는 것은 고양이 앞에 생선을 가져다 놓고 먹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예술과 문화라는 미명하에 못 쓸 것만 유도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이중성입니다.

수행은 곧 사회가 정화되고 온 인류가 낙토가 되도록 이끄는 길입니다.

최근 서양 사람들도 동양 사상에 눈을 뜨고 불교에 관심을 많이 기울인다는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이러한 세상에 참다운 등불이 될 수 있도록 정진을 거듭하시길 당부 드립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5월 14일과 6월 25일 부산 내원정사에서 봉행된 ‘선망부모 순국선열 호국영령을 위한 49일 지장기도’ 초재 및 회향법회에서 스님이 설법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원응 스님은 원응 스님은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선친의 권유로 여러 경전을 읽고 참선을 하다 부친과 평소 교류가 있던 석암 스님을 은사로 1954년 부산 선암사에서 출가했다.

그 후 제방에서 참선 공부에 매진해 온 스님은 1961년 지리산 칠선계곡 부근의 폐사나 다름없었던 경남 함안 벽송사에 들어가 도량을 중창했다.

특히 10년에 걸쳐 『대방광불화엄경』의 금니사경을 완성해 출, 세간의 화제가 된 바 있다.

[불교용어사전]여래십호

여래(如來) 어디로부터 오는 곳도 없고 어디로 가는 곳도 없다는 뜻이며, 진리 그대로를 여(如)라고 하고 그것 을 깨친 이를 래(來)라고도 합니다. 즉 여래는 부처님을 말하며, 덕높은신 부처님을 그 덕에 따라 불리는 대표적 열 가지 별호를 말합니다. 응공(應供) 부처님이 행을 원만하게 이루고 복과 지혜가 구족해서 천상이나 인간세에서 존경을 받으며 능히 공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말합니다. 정변지(正遍知) 바르고 완전하게 진리를 깨달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명행족(明行足) 과거세를 아는 숙명명과 불교의 진리를 알아서 번뇌를 끊어 없애버릴 수 있는 누진명의 지혜를 완 전히 갖추고 있는 이를 말합니다. 선서(善逝) 어두운 세계를 초월해서 또 다시 어리석은 세계에 돌아오지 않고 묘하게 간다는 뜻. 세간해(世間解) 세간이나 출세간의 인과법에 의해서 요해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 무상사(無上士)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독존(獨尊)이라는 뜻이며, 번뇌가 다 끊어지고 다시 끊을 것이 없는 사 람을 말함. 조어장부(調御丈夫) 여러가지 법을 설해서 일체 중생을 조복하고 제어해서 열반을 얻게 하는 위대한 분이라는 뜻. 천인사(天人師)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라는 뜻. 불(佛) 부처님, 또는 깨달은 사람. 스스로 깨달아서 다른 이를 깨닫게 하는 부처님. 세존(世尊) 인간이나 천상이나 모든 사람과 성인의 존경을 받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높은 분이라는 뜻으로 열 가지 덕을 대표하는 명칭

지현스님─심신이 아픈 세상 사람들이여

◆심신이 아픈 세상 사람들이여’보리수,약을 복용해 치유하라◆ – 송광사 율원장 지현 스님 – 지현 스님은 “자등명 법등명에 담긴 부처님 뜻을 마음에 새길 때 진정한 불자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오늘은 마음을 다스리는 보약인 무제 대사의 심약방(無際大師 心藥方)을 준비했습니다.

무제 대사는 당나라 석두 희천 스님입니다.

무제 대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집안을 잘 거느리고 나라를 다스리며 도를 배우고 자신을 수양하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먼저 내가 처방해주는 열 가지 맛의 미묘한 마음의 약을 복용하여야 바야흐로 뜻을 성취할 수 있다.”

석두 희천 선사의 心藥方(심약방) 첫째는 좋은 창자 한 가닥(好腸一條)이라 했습니다.

남의 어떤 말이나 행동도 비위에 거슬리지 않고 웃으면서 잘 받아 소화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야 불법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며 집안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자비심 한 조각.

(慈悲心一片) 나누어지거나 변하지 않는 항상스런 자비심을 말합니다.

셋째는 온유 반냥.

(溫柔半兩) 무골호인(無骨好人) 즉, 강함과 부드러움을 반반씩 갖춰야 합니다.

넷째는 도리 삼푼.

(道理三分) 시비곡직을 따질 때 논리성과 합리성은 30% 정도만 내세우고, 나머지는 인정과 사정 등을 참작하여 관용을 베풀라는 뜻입니다.

다섯째는 요긴한 믿음과 행실.

(信行要緊) 믿음도 바르게 하고 수행도 바른 쪽으로 가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정견을 세우는 일입니다.

여섯째는 중용 정직 한 덩어리.

(中直一塊) 자신의 마음과 정신이 중용과 정직으로 한 덩어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일곱째는 효순 십 푼.

(孝順十分) 부모와 웃어른에게 100% 완전하게 효도하고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여덟째는 성실 한 개.

(老實一個) 성실을 여기서는 노실(老實)이라 했습니다.

노(老)라고 하는 말은 늙었다는 의미도 되지만 한 분야의 최고 전문가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홉째는 음즐은 완전 사용.

(陰 全用) 남모르게 선행을 쌓고 복을 지어, 타고난 운명을 바꾸는데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열 번째는 방편은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음.

(方便不拘多少) 여기서 말하는 방편이란 최선의 방법을 이릅니다.

이 열 가지 약을 마음이 넓은 냄비(寬心鍋) 안에 넣어 볶되, 눌거나 태우지도 말고 조급하게 다루지도 말며, 불기운을 삼 푼 정도 제거한 뒤 평등한 사발 안에 넣어 빻아가지고, 세 번 생각함의 가루로 빻아 육바라밀의 알로 제조하되, 보리수 열매만한 크기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보리수 열매만한’이라고 한 것은 ‘깨달음의 열매’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 약을 하루 세 번 복용하는데, 시간은 어느 때고 상관이 없으나, 화기애애한 국물로 마셔 삼키라 했습니다.

자비-중용은 최고의 재료 정말 이와 같이 복용하기만 하면, 치유되지 않을 질병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약을 복용할 때는 금기 사항이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 공덕이 안 나타나는 경우, 영험이 안 나타나는 경우는 모두 금기사항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 보시면 틀림 없습니다.

첫째, 말로는 청정한데 행실은 혼탁하게 하는 짓.

(言淸行濁) 둘째는 자기를 이롭게 하며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짓.

(利己損人) 셋째는 은밀한 가운데 화살을 겨누는 짓.

(暗中) 감언이설로 형제처럼 가족처럼 친해졌을 때 배신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넷째는 뱃속에 독을 품는 짓.

(中毒) 겉으로는 좋으면서도 항상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웃음 속에 서슬 퍼런 칼을 꽂는 짓.

(笑裏刀) 웃으면서 사람 죽이는 것입니다.

아주 싸늘한 미소, 냉정한 미소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여섯째는 대가리 둘 달린 뱀 같은 짓.

(兩頭蛇) 여기서는 이 말하고 저기서는 저 말하며 이간질 하는 몹쓸 행동을 뜻합니다.

일곱째는 고요하고 평안한 곳에 갑자기 바람과 물결을 일으키는 짓.

(平地起風波) 이렇게 정답게 차 마시면서 이야기 하는데 누구 한 사람이 들어와서 무슨 짓이냐고 하면서 설친다면 분위기가 삭막해져서 흩어져 버리잖아요.

남 잘 되는 것 배 아파 방해하면 안 됩니다.

이 일곱 가지는 모름지기 한 시 바삐 금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게송으로 이르면 이와 같습니다.

비방절묘합천기 比方絶妙合天機 불용노사편작의 不用盧師扁鵲醫 보권선남병신녀 普勸善男竝信女 급수대치막호의 急須對治莫狐疑 처방은 절묘하게 천기에 부합하니, 노사나 편작 같은 신의도 쓸 필요 없네.

착한 남자와 신심 있는 여자한테 두루 권하노니, 조금도 의심 말고 한 시 바삐 먹어 치료할지어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처님으로서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아침 저녁으로 읽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전생의 업으로서 만들어진 사주팔자, 운명에 의해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 운명은 우리들의 신, 구, 의 삼업에 의해서 좋은 쪽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나쁜 쪽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매일 부처님이 되겠다는 원을 가지고 부처되는 수행을 한다면 이것은 좋은 쪽으로 원이 성숙해가겠지만 그냥 대충대충 살면 자꾸 미끄러집니다.

이생에서 자기의 복을 까먹을 줄만 알지 다음 생을 위해 복을 저축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찬다면 욕심은 밑 빠진 독처럼 아무리 채워도 그 욕망은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밑 빠진 독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무기를 가지고 번뇌와 싸워도 이길 수 없습니다.

다만 번뇌를 이길 수 있는 묘약은 부처님의 가르침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갖고도 안 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법등명’이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내가 수행하면서 내가 성불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은‘자등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등명에 의해서 자등명이 밝혀지는 겁니다.

나쁜 마음 거둬야 효능 있어 태양이 세상을 비추는 것이 법등명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눈을 번쩍 뜬다는 것, 혹은 방문을 활짝 열고 나간다는 것, 또 밖의 밝은 기운이 들어오게 하는 것, 이런 것은 자등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내 자신이 부처, 즉 자귀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해서 내 자귀의가 진실해지면 부처님의 팔만 사천 법문이 법귀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등명 법등명”을 설하셨습니다.

사실은 이런 것을 읽으면 제가 제일 부끄럽습니다.

제가 이렇게 잘 못하기 때문에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는 순간만이라도 이런 생각을 내게 되고, 또 그러면서 가고 서고 앉고 눕고 할 때 이런 생각들이라도 내니까 계속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향상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