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불스님─다른 가치 조화 이루는 것이 종교의 참 역할

다른 가치 조화 이루는 것이 종교의 참 역할

-수불스님-

지혜의 눈 열린 사람에겐 모든 가치 진리 안에 있어

내 안의 생각 조율하면 남 이해 못할 이유 없다

종교가 무엇인지, 왜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알면 시간 낭비를

덜 할 수 있습니다.

헤매지 않고 정성을 더 쏟을 수 있으니 이익도 더 큽니다.

종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종교를 위해 종교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종교를 통해 종교가 말하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현실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를 믿으면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이익이 생겨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종교가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류가 찾아낸 정신적 가치 가운데 최고의 가치라 할 수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라는 개념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교의 개념을

모르고 있습니다.

불교가 등장한지 2600여년 됐습니다.

기독교는 2000여년 됐습니다.

그 전에는 힌두교 정도의 종교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어지고 있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 이전에는 자연숭배, 주술, 신화 같은 것을 종교로 여기고 신성시했지만 종교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종교에는 과학보다 앞서가는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종교는 정확해야 합니다.

정확한 근거를 갖지 않고 이야기하면 종교가 아닙니다.

기만입니다.

종교에는 더 이상의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풀어헤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알려야 합니다.

눈을 뜨게 해줘야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의 기능을 그런 것이라고 생각안합니다.

눈뜰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 안하고 늘 자기 눈높이에서만 종교를 생각하고 믿고 의지합니다.

‘우리 아들딸 합격하게 해주세요, 아픈 사람 빨리 낳게 해 주세요’하는 식입니다.

소박하고,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부탁을 합니다.

그게 우선 급하니까요.

그러나 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종교처럼 착각할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눈을 갖고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초등학교만 평생 다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높이를 달리할 수 있는 가치를 생각하고 배우고 이해하고 실천해서 증명할 수 있는 자세로 거듭나야 하는데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종교를 위해 종교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광신, 맹신입니다.

정신적 우상이나 물질적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타파하고 본질을 추구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놓은 가치, 그 가르침이 종교가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상에는 거짓이나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 공개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리석어서 비밀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지 깨달은 자의 눈, 지혜를 가진 사람의 눈에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비밀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가르침에 눈떠야 하는가.

과학에서는 지구가 45억년 전에 생겨났고 인간은 350만년전 쯤에 등장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후로 오랜 시간이 흐르며 인류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 등등을 거치고 씨족, 부족, 도시국가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환경의 동물에서 사회적, 정치적 동물로 변모했으며 마침내 종교가 나타났습니다.

그 이전에는 차원 높은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눈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어리석음을 지혜로 전환할 수 있는, 그런 가치에 눈뜬 성자가 세상에 출연한 것입니다.

그 성자가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말합니다.

무명과 탐진치 삼독의 지옥 같은 삶에서 좀 더 다른 차원의 행복을 느끼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도록 가르치는 지혜로운 가치관이 세상에 등장한 것입니다.

종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법질서에서는 선은 진리고 악은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정의는 진리고 불의는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에 대한 구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전제가 돼야 사회가 통제되고 변화 발전할 수 있습니다.

선은 진리고 악은 진리가 아니라고 규정해야만 악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방어 할 수 있습니다.

질서가 유지 됩니다.

그래야 힘없는 사람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윤리에서는 선도 진리고 악도 진리라는 개념을 발견했습니다.

진리의 본질은 선악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진리 속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진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본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지만 선악을 포용한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물들지 않는 순수함이 영원한 것이다.

이것을 찾아내고 규명했습니다.

논리로만 찾아낸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것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며 정신적인 눈을 뜬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회의 질서가 바뀌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의 영향입니다.

다만 종교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과학은 눈에 띄게 발전하다 보니 오늘날의 발전이 과학의 산물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과학을 앞서가지 못하는 종교는 도태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일반적인 사고에서는 깨끗한 것만을 청정(淸淨)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물들지 않는 것을 청정이라고 합니다.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이 오면 물듭니다.

그것은 순수한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잠시 잠깐 인연 따라 깨끗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가 물들여지니 더렵혀지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청정은 어떤 물을 들이려 해도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구부정(不垢不淨)입니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한 것도 아닙니다.

종교에서는 이것을 청정이라고 말합니다.

일반과는 용어의 뜻이 다르니 종교가 어려운 것입니다.

같은 청정을 이렇게 다르게 소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와 일반, 양쪽을 다 소화할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오해하고 살고 있는 것 가운데 또 하나가 고정관념입니다.

흔히 ‘눈이 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눈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눈이 본다’는 것은 고정관념, 정체된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보고 있다’는 것이 바른 말입니다.

죽은 사람이 눈을 뜨고 죽었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하여금 보게끔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생명, 마음, 혼,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름이 다만 그럴 뿐이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깨닫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의 가치는 내가 누구인지, 생명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이해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자각할 수 있게끔 길을 열어놓은 데 있습니다.

눈이 본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눈이 보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양쪽을 다 이해해서 조화롭게 소화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어떤 말을 어떻게 하든, 실타래가 엉켜있어도 풀어낼 수 있습니다.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이 시점에서 왜 저렇게 말을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눈을 뜨고 깨달았을 때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됩니다.

그것이 힘입니다.

이런 열쇠를 통해 열고 들어갔을 때 세계가 달라집니다.

내 가치관이 폭넓어집니다.

그런 소통을 통해서 화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야 합니다.

너와 나의 화합 뿐 아니라 내 안의 엉클어진 정신을 소통시키고 화합하는 것입니다.

안팎을 조율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나부터 안정시키면 남을 이해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럼 그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이 우리가 알아야할 것이고 그걸 알 수 있게끔 길을 열어놓은 것이 종교입니다.

중심이냐, 중심이 아니냐, 이런 것을 구분할 수 있는 힘을 지니는 방법, 그런 가치를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길은 어디서 비롯되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되는 종교, 불교는 이 길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수행은 어둠을 밝음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눈이 본다와 눈이 보지 않는다의 차이점을 모두 소화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이치로는 배울 수 있지만 실제화는 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우글거리는 어리석음을 뽑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바꾸는 것, 혁명할 수 있는 능력을 수행이 제공합니다.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을 참고해서 좀 더 자유롭게,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으신 분들은 오늘부터 열심히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우학스님─’큰 원(願)을 세우라 ‘

‘큰 원(願)을 세우라 ‘

-우학스님-

원은 곧 희망이다.

그러므로 원이 없이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은

산송장과 다를 바 없다.

원이 있는 사람은

의식이 분명하여서 자기가 이세상에

왜 살고 있는지 잘 알고있다.

그래서 살만한 가치를

설정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도 한다.

그런데 이원에는 중생이 세우는 작은 원이 있는가 하면

불보살이 세우는 큰원이 있다.

작은 원은 그 바라는 바가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이며 자기 이익적이다.

큰원은 종합적이고 입체적이며 전체 이익을 추구한다.

얼마전 방생및,야외 법회에서 본인들

스스로 원을 적은 축원 카드를 읽던중

놀랄만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백퍼센트 모두가 다 가족건강 및 가족의 소원을 잔뜩 적어두었지,

불국토 건설이나 사찰 발전 등의 원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더욱이 그날 법회의 목적이 미물의 방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미물의 해탈을 바라는

내용이 전혀 없어 기분이 씁쓸하였다.

“관세음보살님을 외우고 기도하는 관음행자는

천수경에서 나타나는 관세음보살님의10원(願)

6향(向)을 자기원으로 삼아야 한다.

10원 6향은”일체법을 속히알고저 원합니다”에서

시작하여”축생을 향하면 그들이 큰 지혜를 얻게하여지이다”로

끝을 맺고있다.

뒷쪽의 6향은 앞서 세운 10원의 구체적

실천 다짐 이라고 볼수있다.

아무튼 이 10원 6향은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 원으로써,

우리 모든 관음기도자들이 다 함께 세워야

내 사는 이 현실이 가릉빈가 지저귀고 금옥수 돌돌돌 흐르는

보타락가산 극락의 동산이 될수있다.

한편,중생의 작은원은 원초적 욕망 같은 것이라서

불교수행의 일반적 가치 개념과는 상반되는 점이 없지않다.

예를들어”우리아이를 이번 대학 시험에 합격 시켜 주십시오”

하고 원을 세워 기도한다면 그 원이 성취는 되겠지만

보살의 기도로서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부처님 이 자식놈이 이 세상에 나서 인류와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보람있는 일을 할수있도록 온정성을 기우리는 부모가

되고자 하옵니다”하고 발원한다면 이에 앞서 언급했던 작은 원은

다 포함 되면서 공동선의 완성도 같이 있게 된다.

이같은 발원의 모양새는

스님들의 관음 축원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시 맞이에 동참 해본 신도님들은 가족 개개의 축원끝에

“연후원 세세 상행 보살도 구경원성 살바야 마하반야 바라밀”

이라고 읖조리는 스님 염불을 들었을것이다.

“나의 모든 기도 생활이 세세 생생 동안의보살도로 연결되어서

끝내 부처님 세계로 이루어지이다”라는 내용인데

바로 이 발원문이 가장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불자로서의 뚜렸한 목적의식”즉,큰원을 세워야한다.

그 절에 오래주석하는 주지스님은

그절의 부처님을 닮는다는 말이 있다.

관음 기도를 하는 불자는 관세음보살을 닮는다.

우리는,겉모양은 물론이요,속모양도 닮아야한다.

속마음이 관세음보살을 닮으려면

관세음보살의 큰원을 잊어서는 안된다.

모든 관음 기도자는 관세음보살의 10원 6향을

자기의 원으로 삼기로 권한다.

-관세음보살님의 한량없는 가피 중에서-

현해스님─가난한 수행자

가난한 수행자

-현해스님-

우리 불교에서는 빈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빈도’는 ‘가난한 수행자’라는 의미로 스님들이 자신을 낮추어 사용하는 말입니다.

물질적으로는 풍부하지 못하지만, 정신적인 행복과 최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수행자라는 자부심도 함께 들어 있는 말입니다.

‘가난’이라는 것.

그것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슬픔이 될 수도 있고, 자유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스님네들은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가진 것 없는 왕자가 되고, 여러분들은 많이 가지려 애를 씀으로써 돈 많은 거지가 되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왜 가진 것 없는 왕자가 되고, 돈 많은 거지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마음의 풍요를 기본으로 하는 우리 인간들의 행복기준 때문입니다.

스님네들은 자기 집, 자기 돈, 자기 이름을 알아주는 이 하나 없어도 언제나 신도님들의 존경과 공양물로 아무런 근심없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여러분 주위의 돈 많은 이웃들은 도둑과, 사기와, 집안간의 싸움, 그리고 정치적 희생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각종 질병과 정신적 고통을 감수해야 함을 무수히 보아 왔을 것입니다.

아무리 돈 많고, 이름이 높으면 뭐합니까? 언젠가는 병들고, 죽어서 사라질 것을 말입니다.

젊어서는 돈 벌고, 자리 쌓기에 바빠서 인생을 허비하고, 나이들어서는 그 젊었을 때의 고생으로 병들고 지쳐서 끝내 제대로 자신의 개인행복 한 번 찾아보지 못하고 죽어 가는 우리들.

이것은 슬픔입니다.

물질과 권욕에 눈이 먼 우리네들의 슬픔입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빈도’라고 자처하며 산으로 머리를 삭발하고 들어왔습니다.

세속에서 쌓은 재산과 명예, 지식과 기술을 모두 버리고 산으로 들어와 그야말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새로운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대의 조류에 역행하는 처사라고 지탄도 받을 수 있겠지만,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공존하는 사회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당연히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성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아무리 여러분이 행복하다고 해도 우리 스님네들의 모든 것 다버린 이 행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법입니다.

욕심에서 벗어나 무위자적하며 세상의 이치를 관찰하고, 그래서 자연을 닮아가는 이 생활이 바로 부처님의 법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님네들을 다른 잣대로 쳐다보지 마시고, 그냥 그 모습 그대로를 보고 존경하며, 또한 스님네들의 그 모습이 바로 부처님의 법인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올바르지 못한 수행을 하는 스님네들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스님네들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정말 무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여러분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바르지 못한 스님들도 여타의 청정한 스님들에 의해서 뉘우치고 참회하며 바른길을 걸어갈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불자들이 모두 쌓아 두어야 할 성스러운 일곱 가지 재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이 일곱 가지 칠성재(七聖財)를 여실히 쌓아 두시기 바랍니다.

첫째의 성스러운 재물은 ‘믿음’입니다.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부처님의 제자들까지 믿어서 결국에는 모든 인간들을 믿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그런 믿음의 재물을 모으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재물은 올바른 행동입니다.

앞의 믿음이라는 재물을 모으려면 이 올바른 행동이라는 재물이 항상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타인이 나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세번째는 반성하는 자세입니다.

늘 옳은 일을 한다고 해도, 또는 모든 사람을 믿는다고 해도 자신도 모르게 그른 일과 불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을 돌이켜보고 점검하는 그런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네번째는 참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른 일을 내가 하고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수록 자신의 옳음을 인정 받으려면 꾸준히 기다리고 노력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다섯번째는 항상 좋은 말을 들으려 애쓰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문 뿐만 아니라 세상의 좋은 이야기들을 듣고 본받으려는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여섯번째는 남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베풀라는 것입니다.

나의 생활이 빈곤하여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에서 그 대가를 바라지 말고 남에게 베풀줄 아는 마음.

이 마음의 재물을 쌓게 되면 여러분은 우리네 스님들과 같은 행복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번째는 슬기롭게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 슬기롭게 사는 방법만 알면 세상이 훨씬 행복해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곱 가지 성스러운 재물입니다.

누구도 훔쳐가지 못하는 이 일곱 가지 보배는 여러분의 삶을 훨씬 더 윤택하게 해 드릴 것입니다.

발행일

카테고리 현해스님법문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