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명스님─부모님이 바로 당신의 부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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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바로 당신의 부처님입니다

-학명스님-

부처님 말씀 가운데 첫 번째 효는 ‘의식주’요, 두 번째 효는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요, 세 번째 효는 부모님을 부처님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부처님처럼 받드는 것이 바로 바른 효도입니다.

이처럼 지중한 부모님의 은혜를 우리들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가슴에 새기고 사는지, 부모님께 보답을 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겠습니다.

오늘은 우란분절 기도에 입재하는 날입니다.

불자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우란분절은 부처님의 효에 관한 가르침을 상징하는 불자들의 명절입니다.

다음 일화를 잘 새겨들으시고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새깁시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남인도의 어느 마을을 향해가고 계셨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길거리에 웬 사람의 해골 무더기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게 보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부처님께서는 곧 옷깃을 여미고 땅에 엎드려 공손히 절을 하셨습니다.

갑작스런 부처님의 행동에 제자들은 모두 의아해 했습니다.

이윽고, 부처님께서 절을 마치시자 아난존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여쭈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삼계(三界)의 도사(道師)시며,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당신께서 이름 모를 해골더미에 그토록 공손히 절을 올리시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아난의 질문을 받으신 부처님께서는 조금 전의 공손한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신 채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 이 해골더미는 혹여 전생, 내 조상의 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여러 겁 그 어느 생엔가 나와 부모의 연을 맺었던 분의 뼈일 것이다.

그런데 어찌 내가 절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칠 수가 있겠느냐.”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해골조차도 내 전생의 조상이나 부모님이었을 것이라는 부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가르침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사람들, 사물들, 심지어 생명을 다한 수많은 뼈 조각 하나까지도 ‘나’와 인연이 있음을 일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 하셨습니다.

“아난아, 저 뼈들을 잘 살펴 보거라.

그것이 만약 남자의 것이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나, 여자의 것이라면 검고 가벼울 것이다.” 아난이 어떤 연유에서 그런지 여쭈어보자 부처님께서는 “남자는 생시에 절에 가서 불경 읽는 소리도 듣고, 스스로 독경도 하며, 삼보께 예배하고, 부처님 명호도 생각하곤 하였기 때문에 흰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과정에 있어서, 아이를 낳느라 ‘서말 서되’나 되는 엉킨 피를 흘리고 ‘여덟 섬 여덟 말’의 젖을 먹여야 하는 까닭에 그 뼈가 검고 가벼운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은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어머님의 깊고 깊은 은혜가 새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난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 부처님께 어떻게 하면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을 할 수 있는지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열 가지 은혜를 조목조목 나누어 한없이 깊고 넓기만 한 부모님의 은혜를 설하여 주셨습니다.

첫째 懷耽守護恩(회탐수호은)이라, 아이를 잉태하니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마음가짐도 바르게 가지려 애쓰시고, 둘째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이라, 해산이 임박해짐에 따라 점점 커지는 어머니의 육체적 고통과 그로 인한 정신적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며, 셋째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이라, 자식을 낳은 후 지금까지의 고통을 잊고 큰 환희심으로 아이를 사랑하고, 잠시 사무치는 슬픔을 경험하시나 이로 인해 자식이 겪어야 할 수많은 고통을 안타까이 여기시기 때문이고, 넷째 인고토감은(咽苦吐甘恩)이라, 쓴 것은 당신이 삼키시고 단것은 자식을 위해 가려 먹이시기를 즐거워하시며, 다섯째 회간취습은(廻乾就濕恩)이라, 아기는 마른자리에 뉘이고 자신은 진자리에 누우시며, 여섯째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이라, 젖을 먹여주시고 사랑으로 길러 주시며, 일곱째 세탁부정은(洗濯不淨恩)이라, 깨끗하지 않은 아이의 몸이며, 옷가지들을 마다 않고 세탁해 주시며, 여덟째 원행억념은(遠行億念恩)이라, 자식이 멀리가면 밤낮으로 자식을 걱정하시고, 아홉째 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이라, 자식을 위해서라면 험하고 궂은일이라도 마다 않고 하시며, 열 번째 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이라,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자식을 사랑하시고, 사후에도 자식만을 염려하시는 부모님의 은혜를 이루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동서양의 모든 종교가 ‘효(孝)’를 인륜의 근본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효도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가령 어떤 사람이 왼쪽 등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서 수미산을 백천번 돌아서 가죽이 터져 뼈가 드러나고 뼈가 닳아 골수가 드러나더라도 부모님의 깊은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느니라.” 이 세상에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인가 하면, 그 어떤 은혜와 비교해 보더라도 부모님의 은혜보다 더 한 것은 없습니다.

내 생명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옛날이건 지금이건 ‘효’의 기본은 매 한가지입니다.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요,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효의 기본입니다.

효도란 보은(報恩)입니다.

은혜를 입는데 대한 보답입니다.

그러므로 이유가 없이 당연한 마음으로, 긍정하는 마음으로 효를 실천해야 합니다.

자기를 이 세상에 있게 한 부모님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것일까요.

『아함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효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의식을 제공함은 하품(下品)의 효양이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함은 중품(中品)의 효양이며, 부모님의 공덕을 여러 부처님께 회향함은 상품(上品)의 효양이라 한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 첫 번째 효는 ‘의식주’요, 두 번째 효는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요, 세 번째 효는 부모님을 부처님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부처님처럼 받드는 것이 바로 바른 효도입니다.

이처럼 지중한 부모님의 은혜를 우리들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가슴에 새기고 사는지, 부모님께 보답을 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겠습니다.

속담에 ‘부모는 가슴으로 자식을 생각하지만 자식은 부모를 머리로만 생각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머리와 가슴의 차이, 그것은 참으로 큽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는 밤잠을 못 자지만 자식은 한 순간 걱정하는 것뿐이라고나 할까요.

불교 최대의 명절이자, 전생 금생 모든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는 우란분절(백중)의 49일 영가 천도 기간 동안 잊었던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생각합시다.

우리는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지만, 공기가 없으면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부모님의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부모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으나 우리는 지금까지 부모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냥 지나쳐 왔습니다.

우란분절을 맞아 기도를 하면서 ‘효도하는 자식이 되겠다’고 발원합시다.

그리고 부모님을 부처님처럼 받들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정진합시다.

부모님과 부처님을 함께 생각하며 염송합시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성수스님─ 부처를 흉내내며 살자

성수스님

(해동선원 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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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무지렁이가 서울 오기도 어려웠던 45년 전.

조계사 주지 소임을 맡고 올라왔는데 그때 내 나이가 마흔이야.

3일 만에 결혼식이 들어왔다고 주례법사를 하라고 해 못한다고 해도 기어이 하라고 해서나오니 직원들이 책을 가져와 이것은 빼고 이것을 하라는데 내 재주로는 2시간을 해도 다 못할 것 같아 책을 덮고, 이렇게 말했어.

“오늘 시집가는 신부는 부처님한테 맹세하기를 도인 한 명 키우고, 영웅 한 명 키우고, 네 가지 덕이 있는 군자 한 명 키울 맹세를 해라.” 신랑에게는 “가문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러온 신부 속을 썩이지 말아라.

속을 썩이면 구정물 단지에서 나쁜 놈이 나와 가문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니 그렇게 되면 그 책임은 다 신랑이 져라”고 했거든.

그 얘기하고 말랬더니 사람이 1300명이나 왔는데 너무 간단하잖아.

그래서 “오늘 가문 살리고 나라 살리러 시집가는 신부는 세 가지 밝은 생활을 먼저 해라.

입은 헛말하지 말 것, 손은 헛일하지 말 것, 발은 헛걸음하지 말 것.

이 세 가지 밝은 생활을 하고 원만하게 현명하게 투철하게 생활을 하면 영웅호걸의 영혼이 지나가다가 ‘저런 집에서 한번 살아봐야겠다’ 하고 태기가 든다.

그 책임은 신부가 져라.” 또 신랑한테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아 “신랑은 식구를 위해 애써 돈을 벌어오는 수고보다는 신부가 살림을 잘 살고 재산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므로 돈 벌지 않는다고 무시하지 말아라.

돈 버는 신랑보다 지키는 신부가 잘해야 한다.

또 돈을 쓸 때는 신랑과 신부가 의논해서 써라.

돈을 잘못 쓰면 개망신을 한다”며 주례사를 5분하고 얼굴 빨갛게 해서 나왔어.

그런데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서 결혼식이 다 조계사로 몰렸어.

이화여대에서 오라고 연락이 왔어.

안가니까 총장이 와서 “여자교육을 잘 하신다는데 우리 여대생들에게 한 마디만 일러주고 가라”고 해서 차를 타고 갔어.

여대생 3000명을 모아놓으니까 욕심이 나더라고.

그래서 “사내대장부들은 남의 나라도 홀까닥 집어먹을 포부와 희망을 가지고 대학을 다니는데 여자 너희들은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고 갈래.

포부가 있으면 손들어 봐라”고 하니 아무도 손을 안들어” “ 옛날 아버지가 훌륭해서 영웅호걸이 된 역사는 없다.

어머니가 훌륭해서 영웅호걸이 되었으니 여자로서 최고학부를 나왔으면 도인 한 명 키우고, 영웅한 명 키우고, 네 가지 덕(관대하고, 후덕하고, 착하고, 상냥한)이 있는 군자 한 명 키울 포부와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대학을 다녀라.

안되거들랑 물으러 오너라.”그렇게 해놓고 왔거든.

3분했어.

결혼해 아이가 태어나면 부처를 흉내내며 살아야 돼.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를 부를 때 나직하게“아무개∼”라고 불러야지.

소리 높여서 “꽥” 지르면 자신도 마음이 아파.

식구들도 마찬가지야.

자, 오늘부터 하루 한 마디 부처님 말씀 흉내낼 것.

또 걸음을 걸을 때도 첫걸음은 꾹 누른 다음 떼어야 해.

지구가 한 곳으로 기울만큼 신중하고 무게 있게 발을 떼어야 해.

또 눈을 뜨고 있되, 물질과 주변환경은 보지 말고 하루 5분만 부처님의 생사자재법을 보는 거야.

5분조차 관리하지 못하면 그날은 밥을 먹지 말아야 돼.

여러분.

매일 5분만 좌선을 하되 몸은 부처를 흉내내고, 생각은 부처가 나라와 부모와 아내와 자식에게 네 가지 죄를 짓고도 3000년 동안이나 존경을 받는 이유를 생각해야 돼.

사흘을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면 부처님께 찾아와 사정을 해봐.

그래도 안 되면 부처를 패.

그러면 가르쳐줄 꺼야.

부처님은 그것 물으러 오는 놈 가르쳐 주려고 앉아있는 거야.

그런데 그건 안 묻고 밥 한 그릇 떠다놓고 복 달라는 협잡꾼만 오니 기가 막혀 저리 가만히 있는 거야.

이제부터라도 좀 알고 믿자고.

선본스님─공덕과 복전

공덕과 복전 – 정선본 스님 – 『법화경』에 다음과 같이 유명한 회향의 게송이 있다.

“원하옵건대 지금 닦은 이 공덕을 널리 일체 중생에게 보급하여, 나와 더불어 일체 중생이 모두 함께 불도를 이루도록 하옵소서.”

이것은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 언제나 염불하고 있는 게송인데, 참된 공덕은 어떻게 해야 이루어지는 것일까? 또한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는 시주를 동참하는 권선문에도 한결같이 공덕을 쌓도록 권유하는 말이 있으며, 어느 사찰을 찾아가더라도 절 입구에는 사찰을 건립할 때에 애쓴 사람들의 시주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면 공덕과 복전은 같은 것일까?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일까? 공덕과 복전의 이야기를 거론할 때 많이 언급되는 이야기가 『전등록』 제3권 보리달마전에 전하고 있는 보리달마와 양무제의 첫 만남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일단의 대화이다.

梁 나라의 武帝가 달마 대사에게 질문했다.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로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고, 탑을 세우고, 경전을 寫經하고, 승려들을 출가시키는 일을 수없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

달마 대사가 대답했다.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無功德)” 이 이야기는 『벽암록』 제1칙과 『종용록』 제2칙 등에 채택되어 있는 것처럼, 일찍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양 무제는 황제로서 평생 수많은 절을 짓고, 탑을 세우고 경전을 사경하고, 승려들을 출가시켜서 불법을 옹호하고 홍포한 불법 천자(佛法天子)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런데 불법을 위해 평생을 받친 양 무제의 엄청난 업적을 보리달마는 한마디로 ‘무공덕’이라고 단언해 버렸다.

보리달마와 양무제와의 만남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은 아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선 불교의 문헌에 등장시킨 것은 하택 신회의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에서 북종 공격을 위한 방편으로 응용한 것인데, 이것이 선종의 초조 보리달마전의 대표적인 일면이 되고 있다.

달마계의 선종 입장에서 볼 때 양무제는 달마에게 당하는 한 사람의 광대역할(조연)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인데, 불법을 전하는 달마 대사에게 당하는 사람을 일반인이 아닌, 당시 최고 지위의 인물로서 불법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체면이 서질 않기 때문이다.

신회가 달마로 하여금 양 무제와 상면하게 하여 양 무제의 호불 호법을 ‘무공덕’이라고 평가한 의도는 당 나라 왕실의 비호를 받고 있는 신수계의 북종선의 공덕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신회의 뛰어난 각본은 북종선을 공격하는 한편, 달마로부터 비롯되는 선 불교의 올바른 실천 정신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달마와 양무제와의 회견은 「육조단경」에도 사군 위거의 질문으로, 위와 똑같은 대화를 싣고 혜능이 ‘진실로 공덕이 없다.

’라고 단언하면서, “사군이여! 달마 대사의 말을 의심하지 말라.

양 무제는 邪道에 집착하여 정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사군이 또 “어째서 공덕이 없다고 합니까?”라고 질문하자, 혜능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절을 짓고, 보시하고 공양 올리는 것은 복을 닦는 것일 뿐이다.

福田을 가지고 공덕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功德은 法身에 있으며, 福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法性에 공덕이 있는 것이요, 견성이 바로 功이요, 평등함이 곧 德이다.

안으로 불성을 깨닫고, 밖으로 남에게 恭敬을 실행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고, 나라고 하는 我相을 끊지 못한다면, 곧 자기 자신에 무공덕인 것이요, 또한 自性이 허망하면 법신에 무공덕인 것이다.

순간 순간 생각마다 덕을 실행하고 평등하고 솔직한 마음이면 그 덕은 경박하지 않고 항상 공경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공덕은 자기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기에 복과 공덕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양 무제가 올바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지, 달마 대사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복전과 공덕이 다른 점을 이렇게 명쾌하게 밝힌 설법은 드물다.

불교를 위하고, 남을 위해서 물건으로나 마음으로 베푼다는 것은 복전이 될 수는 있어도 공덕은 될 수 없다.

공덕은 불법의 참된 도리를 각자의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다.

불성을 깨닫고 깨달음의 지혜로 일체 중생에게 진실된 불법을 회향하는 것을 공덕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조당집』 18권에는 「종지를 깨닫는다는 것은 (달마 대사가) 양 무제에게 말하기를, “성품을 깨닫는 것을 功이라 하고, 묘한 작용을 德이라고 한다.

공이 이루어지고 덕이 일어나는 것은 한 생각(一念)에 있다.

이러한 공덕과 맑은 지혜의 묘한 작용은 세상에서 구할 바가 아니다.”

라고 한 것이다.

」 말하자면 공덕은 일념으로 깨달음의 마음을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유마경』에 “깊은 깨달음의 마음(深心)이 곧 진실된 도량이니, 공덕은 增益하기 때문이다.”

라고 설하고 있으며, 『위산경책』에도 “안으로 깨달음의 마음을 이루는 것을 功이라 하고, 밖으로 편안함을 나투는 것을 德이라고 한다.”

라는 말이 참다운 공덕을 이루는 수행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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