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재수 좋은 날___

재수 좋은 날…

원철스님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운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아침에 문을 열고 첫손님이 외상을 하면 그 날은 줄줄이 외상이다.

어느 날 재수가 좋아서 수표라도 받는 날이면 운수 대통하는 날이다.

사람들은 운수 대통하는 꿈만을 꾸려고 하지 운수대통을 만들려고 하지 안는다.

내가 하고자하는 모든 일의 성취는 마음에 달렸다.

마음을 어떻게 쓰는냐에 따라 운수대통의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마음의 힘은 집중력이다.

집중력은 곧 염력을 말한다.

염력은 인생을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다.

염력을 얻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철저한 무심에서 하나로의 집중을 이루면 된다.

예를 들면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면서 관세음보살을 반복하는 그 자체에 관심을 두고 서서히 정신통일에 들어간다.

삼매에 들어가면 삼매를 여러 각도로 이용해 수행한다.

앉아서 하기도하고 서서하기도하며 누워서하기도 한다.

혹은 하루를 계약해 삼매에 들기도 하고 열흘 또는 그 이상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집중된 힘으로 그 지역을 관하고 얼마의 손님과 얼마의 돈이 들어오기를 관한다.

그러면 틀림없이 성취할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인간에게 정직과 덕을 원한다.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하늘의 율법을 어긴 자는 죄를 받게 됨으로 정직과 덕이 없으면 이 모든 공은 허사가 된다.

부처님이 계율을 제일 중요한 수행으로 여긴 것도 이 때문이다.

재수좋은 날을 나날이 만들려면 이 모든 조건을 갖추면 된다.

죄와 하늘의 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하늘의 율법(정직, 덕-무조건적으로 베푸는 공덕)을 지키고 간절히 수행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알기는 삼세 아이도 알지만 실행하기는 팔십 노인도 어렵다고 했다.

이 글을 읽었으니 오늘은 재수좋은 날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은 인연에서 비롯되므로

이 글을 읽은 인연으로 언젠가는 완벽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무 관세음 보살

혜정스님─불자라면 인간적으로 살아야

불자라면 인간적으로 살아야 / 법주사 회주 혜정 스님

복잡다단한 세상.

시대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이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추락하고 만다.

살기위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우리들.

이제 단순함은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힘겨운 날개를 잠시 접고 미륵대불로 유명한 보은 법주사를 찾았다.

회주 혜정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서다.

선·교·율을 겸비한 선지식을 사리각에서 뵐 수 있었다.

스님의 처소에 들어서는 순간, 한지가 떠올랐다.

무서우리만치 흰색도 아니면서 적당한 흰빛을 머금은 종이.

만져보면 약간은 거친 듯한 느낌을 주지만 포근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한지.

스님의 방에서도 이 느낌이 났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던 스님의 방에 있는 것이라곤 가사, 죽비, 탁자, 시계 뿐.

조사어록 등이 담긴 그 흔한 액자 하나 없었다.

잠시 후 들어온 혜정 스님의 모습에서도 그 느낌이 다시 났다.

자그마한 체구에 엷은 미소만 뿐.

혜정 스님의 일상사는 ‘단순’ 그 자체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능인전에서 1시간 정도 예불을 드리고 30분 동안 정진을 한 뒤 다시 처소에 들어와 정진을 한다.

아침 6시 공양을 하고 사시마지를 올린 뒤, 오전 11시 30분 점심공양.

오후 6시 저녁예불 후 뒤 9시 취침.

특별한 건강 비결도 없었다.

참선이나 기도 그 자체가 건강 비결이기 때문이다.

다만 “난 참선이나 기도를 잘 못해 건강하지 않다”는 겸손뿐이었다.

스님의 이러한 생활태도는 은사 금오 스님의 영향이 크다.

스님은 서당 훈장이었던 할아버지 영향으로 책을 가까이 하던 중 우연히 불교잡지를 보게 된다.

그 불교잡지에서 “생은 어디를 좇아 왔으며 죽음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생은 곧 한 조각의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의 뜬구름이 사라짐과 같으니라”는 대목이 가슴 깊숙한 곳에 꽂혔다.

그 가슴앓이는 김구 선생이 공부했던 마곡사 대원암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했다.

스님은 행자로 있으면서도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화두를 붙잡았다.

그러던 중 어느 깊은 밤 이상한 경계를 만나게 된다.

앉아있다는 의식도 없어지고 공중에 떠 있다는 느낌, 무엇인가 확 터지는 느낌, 그리고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후 스님은 수덕사에서 은사 금오 스님을 만났다.

금오 스님은 ‘참선 이외의 것은 외도(外道)’라고 할 정도로 참선을 강조했다.

행자가 울력에 동참하지 않더라도 참선에 들고 있으면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 할 정도였다.

금오 스님은 또 무소유를 강조했을 뿐 아니라 계율을 중요시했다.

스님이라면 부처님 법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다.

금오스님은 율장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철저히 배격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자연스레 혜정 스님 몸으로 전이됐다.

“요즘도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은사스님은 어떻게 처리했을까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은사스님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마음, 그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늘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은사스님을 떠올리는 혜정 스님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난다.

혜정 스님은 1970년대 중반 법주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법주사 강원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강원에 유명한 교수를 초빙했고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영어, 심리학, 비교종교학 등 내외전을 모두 교과과정에 도입시켰다.

이러한 교과과정과 함께 율반, 포교반, 외국어반, 편집반, 염불반, 미화반 등 6개 자율반을 편성해 활기를 띠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당시 종정이었던 서옹 스님의 부름으로 총무원장직을 맡았지만 곧 자리를 내놓고 월출산에 있는 토굴로 내려갔다.

도갑사에서 도보로 1시간 거리에 있던 이 토굴은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만 있을 뿐이었다.

시계도 없어 새 우는 소리로 시간을 짐작할 정도였다.

바람 불면 월출산 전체가 흔들리고 비오면 월출산 전체가 온몸을 흠뻑 적셨지만, 겨울밤 달빛에 비친 순백의 세계는 아직도 스님의 가슴을 뛰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회향도 토굴에서 하고픈 마음이다.

“토굴이나 암자 수행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대중 선원에서 기틀을 다진 수행자는 토굴에서의 집중 수행을 통해 더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요.

하지만 초심자가 토굴에 들어가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자칫 나태해지기 쉬우니까요.”

스님은 어떤 토굴이 열심히 정진하는 토굴인지 식별할 수 있는 방법도 귀띔해줬다.

“마당이나 부엌이 깨끗한 토굴이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 토굴인 것 같죠.

아닙니다.

마당이나 부엌이 깨끗한 토굴은 수행자가 거기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당에 풀이 우거지고 부엌은 더럽더라도 방에 좌복 하나 있는 토굴이 진짜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곳입니다.”

스님에게 법문을 청해 듣고 사리각 주변을 둘러봤다.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었다.

수많은 세월 비와 눈보라가 몰아쳐도 엷은 미소를 띤 채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마애불.

조금 전 사리각에서 보았던 선지식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글=남동우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혜정 스님은 1933년 전라북도 정읍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19살 때 예산 수덕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62~83년 1~8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72년 중앙종회 부의장, 77년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법주사 주지와 율주 소임을 거쳐 현재 조계종 법계위원장, 원로의원이다.

이(理)와 사(事)를 겸비한 대표적 스님으로 수행자의 귀감을 보이고 있다.

혜정 스님의 가르침 불교는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적인 종교입니다.

대신 인간을 중심으로 마음을 닦아 깨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혜정 스님은 불교는 인간 중심의 종교이기 때문에 불자는 인간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처님께서 성도를 하시고 얼마 안돼 신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했습니다.

당시 인도는 밤하늘의 별 만큼 많은 신들이 존재했습니다.

또 당시 인도 국민들은 신들을 절대시해, 신과 인간과 관계는 철저한 종속관계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신의 계시에 따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숙명적으로 정착된 때였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신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불교에도 신이라는 단어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화엄경〉을 비롯해 여러 경전에도 나오는 신은 일종의 마음의 변형입니다.

즉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자립적이고 존재적인 신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불교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종교라면 인간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인간은 이중구조로 돼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마음입니다.

육신은 사대(四大:地, 水, 火, 風)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환원됩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걸 우리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지만 가짜 나인 가아(假我)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진짜 나입니까.

가짜 나와 상대되는 것, 그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마음을 찾아서 깨친다고 했는데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는 마음을 어떻게 접근해 깨칩니까.

그래서 고인(古人)들이 마음으로 마음을 찾으려고 하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비유컨대 물은 모든 것을 씻지만 물 자체는 씻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찾을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여기서 다른 학문이나 진리추구와는 다른 방법이 대두됩니다.

말도 문자도 생각도 일체 접근을 불허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직관을 통해서 찾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3000년 전 직관의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역대조사들이 마음과 마음으로 전한 것, 중국에 와서 달마대사가 재창조한 것이 바로 간화선입니다.

간화선이라는 것은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두는 뭐냐, 의심덩어리입니다.

이 의심덩어리를 깨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음을 깨치는 근본자리입니다.

화두는 양미간에 든다고 했습니다.

어느 노스님은 화두를 들면 산을 보되 산이 아니요 물을 보되 물이 아니요, 행하되 행하는 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몸과 마음을 통해 오직 의심덩어리 하나만 끝까지 쉬지 말고 정진해야만 깨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두도 깨치기 전까지 공부하는 방법론이지 궁극에 가면 망상의 하나일 뿐입니다.

버려야합니다.

무심한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무심한 경지란 허공 같아서 막힘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고, 목석과 같아 움직임도 없고 흔들림도 없는 것입니다.

버리는 경계를 무심이라고 했습니다.

무심한 경계에 도달하면 그것이 깨치는 것이고 우리의 구경처입니까.

아닙니다.

물이 흘러가다 멈추면 썩게 됩니다.

우리가 무심한 경지에 안주해 이것이다 하고 주저앉게 되면, 비유컨대 깊은 귀신굴에 떨어져서 나올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신명을 바쳐 진일보하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목숨을 바쳐 한걸음 더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요 깨치는 구경처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 어느 외도가 와서 “아주 훌륭한 성자라고 들었습니다.

제 마음이 괴로우니 한 말씀 해 주십시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끝까지 말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자 그 외도가 “제가 질문한 요지에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라며 말하고 갔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한마디도 안 했지만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설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의 인연이나 근기가 마주치면 가능한 일입니다.

화두를 들고 끝까지 정진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화두를 깨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신심을 견지하고 꾸준히 정진하면 구경에 도달한다는 믿음 말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먼 길이요, 고달픈 길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막막한 사막을 걸어야만 합니다.

걸어가다 보면 회오리바람을 만나 세상을 떠날 수 있고, 독충이나 맹수를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도 있으며, 작열하는 태양에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문의 본분은 수행입니다.

수행을 위해 집과 가족, 모든 것을 버리고 혈혈단신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걸어가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바쳐 한 번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란 무엇이냐.

부처는 최고의 인격경지를 수행을 통해 체득한 사람, 생사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경지를 체득한 사람, 모든 고통을 여의고 고통 없는 세계를 체득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마음을 깨쳐서 된 정신적인 대 혁명가입니다.

즉 부처님은 역사적인 인물이지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나무는 아래서 위로 자랐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렀습니다.

지금도 나무는 위로 자라고 물은 아래로 흐릅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인간이 부처가 됐다는 것, 마음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 깨칠 수 있다는 것, 그러면 삼계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고 생사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반신반의합니다.

요즘 위빠사나를 한다 요가를 한다 그럽니다.

안되니까, 답답하니까, 세월은 자꾸 가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으니까 방황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럴수록 신심을 굳건히 해서 원력을 세운 다음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불교는 신 중심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인간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효봉스님─집착함 없기를 배우라

집착함 없기를 배우라

효봉스님

사람마다 그 발밑에 하늘 뚫을 한 가닥 활로가 있는데,

여기 모인 대중은 과연 그 길을 밟고 있는가?

아직 밟지 못했다면 눈이 있으면서도 장님과 같아 가는 곳마다 걸릴 것이다.

보고 들음에 걸리고 소리와 빛깔에 걸리며 일과 이치에 걸리고 현묘한 뜻에도 걸릴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그 길을 밟으면 이른바 칠통팔달이요 백천 가지를 모두 깨달아 밝히지 못할 것이 없고 통하지 못할 이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 길을 밟고자 하거든 이익이 있거나 없거나 시장(市場)을 떠나지 말라.

이제부터 대중을 위해 용심할 곳을 지시하리라.

보리달마 존자는 인도로부터 중국에 오셔서 오직 한 마음을 말씀하시고 한 법만을 전하셨다.

부처로써 부처를 전하신지라 다른 부처를 말하지 않으셨고, 법으로써 법을 전하신지라 다른 법을 말하지 않으셨다.

그 법이란 말로 할 수 없는 법이요, 그 부처란 취할 수 없는 부처이니 그것이 곧 본원 청정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오늘 밤에 내 설법을 듣는 대중으로서 만일 이 마음을 밝히고자 한다면 다른 여러 가지 불법을 배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만 구하거나 집착함이 없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구함이 없으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집착함이 없으면 마음이 멸하지 않을 것이니, 생멸이 없는 그것이 바로 부처이니라.

부처님이 사십 오 년 동안 말씀하신 팔만사천법문은 팔만사천 번뇌를 상대한 것이니, 번뇌를 떠나면 그것이 곧 법이요, 떠날 줄 아는 그 놈이 곧 부처다.

모든 번뇌를 떠나면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일 묘한 비결을 알고자 한다면 오로지 그

마음에 한 물건도 구하거나 집착이 없어야 한다.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인은 마음을 취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옳지 않다.

마음과 경계를 모두 잊어버려야 그것이 곧 참 법이다.

경계를 잊기란 쉽지만 마음을 잊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런데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흔히 마음은 버리지 않고 먼저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모색할 것이 없는 곳에서 공이 본래 공도 아닌 그것이 일진법계임을 모르고 있다.

그것은 삼세제불과 일체중생이 다 같이 지닌 대열반의 성품이다.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법이니,

한 생각이라도 진실을 떠나면 그것은 모두 망상이다.

마음으로 마음을 구할 것이 아니요, 부처로 부처를 구할 것이 아니며, 법으로 법을 구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단박에 무심(無心)하면 말없는 가운데 도에 계합할 것이다.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삼학으로써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요문을 삼는다.

옛 사람은 ‘비구가 비구법을 닦지 않으면 삼천대천 세계에 침 뱉을 곳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 이 산승은 비구니들을 위해 다시 한 말 하리라.

비구니가 비구니법을 닦지 않으면 지금부터 오백 년 뒤에는 이 땅에 부처님 그림자도 없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