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화스님─ 기도는 단순할 수록 가피가 빠르다

기도는 단순할 수록 가피가 빠르다

행화스님

누구든지 기도를 하다보면 강박관념이 생긴다.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듣다보니, 관세음보살이 좋다는데, 지장보살이 좋다는데 오대산에 가니 문수보살을 불러야 한다는데, 팔공산에 가니 약사여래불을 불러야 한다하고 정토사에 가니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는데.

아주 혼란스러울 것이다.

기도는 단순해야 한다.

우리 불자들 기도방법을 보면 아주 대단하다.

예를 들자면, 처음에는 천수경을 한다.

천수경은 일종의 부정을 맑게 하는 기능이 강하기 때문이다.

천수경, 반야심경, 능엄주에 금강경, 지장보살 정근 1000번, 관세음보살님께 서운하니 관세음보살 정근 1000번, 관세음보살보문품, 아미타경독송.

아주 보통 장난이 아니다.

염불수행에는 차례가 있고, 단계가 있다.

첫번째가

지명염불이다.

그저 무지금

관세음보살님이든 지장보살님이든 그 명호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말고 절에서나 집에서, 안방에서 주방에서, 직장에서도, 처처에, 시시로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점점 그 명호가 익숙해지는 단계가 온다.

잡념이 치성하기도 하고 텅 비어버리기도한다.

그럴 때는 반드시 상담해야한다.

그 래야 다음 단계로 움직여 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짧게는 300일 길게는 십년을 해도 좋다.

그러다 보면 업장은 무너지고 복력이 증장되어 있음을 안다.

그뒤에

관상염불이다.

부처님이나 보살상을 바라보는 단계이다.

천태지자대사는 사종삼매라는 수행법에서 이 관상염불을 상좌삼매라고 하였다.

무지금 앉아서 불상이나 보살상을 보면서마음에 각인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를 지자대사는 최소한 90일간 하라고 하셨다.

마음에 각인하는 것이다.

지명염불이 명호를 마음에 각인하는 것이라면, 이 관상염불은 모습을 각인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모습을 각인하는 것이다.

우선 해보라.

그 다음 단계를 묻지 말고 불러보라.

기도는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며,

단순할수록 가피가 빠르다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단순 무지하게 말이다.

그래야 중근기 여우병에 걸리지 않는다.

중근기 여우병은 의심하는 병이다.

모든 것을 따져보려는 병이 걸리는 단계이다.

많은 불자들이 이 단계에서 무너지고 망가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믿고 들어와서 단순하게, 이래저래 따지고 헤아리지말고 무지하게 기도하라.

오로지 지극하게 정심을 모아 일념으로 하라 .

지선스님─윤회 끊을 힘 지닌 사람 요지경 세상 두려우랴

윤회 끊을 힘 지닌 사람 요지경 세상 두려우랴 고불총림 백양사 유나 지선 스님 요즘 더위가 과거에 비해 혹심해 금년 안거는 아주 힘이 들었습니다.

이 더위에 여러분들 이렇게 법문 들으러 오시는걸 보니 신심이 장하십니다.

불교 법문을 많이 듣다보면 중첩되는 부분도 많고 혹 같은 내용이라도 말씀하시는 분에 따라 말이 굉장히 다른 경우가 많죠.

하지만 모든 분들이 공통적으로 말씀하시는 한 가지는 ‘일심’입니다.

불교는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으니 ‘ 마음의 노는 모양새를 알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만사를 신에게 의탁하면서 ‘신이 알아서 해주겠지’ 하고 믿는 부류이고, 다른 한 부류는 ‘모든 것이 팔자’라고 생각하면서 업보타령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불교, 정법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올바른 길이 아닙니다.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신을 믿지 않습니다.

또 불교는 운명론, 팔자론이 아닙니다.

불교는 인과응보를 중시하기 때문에 오늘 현재의 이 마음을 어떻게 먹고, 말하고, 생각하고, 실천하고 사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 했던 언행이 내일의 결과로 나타나고 나쁜 업보로 인해 나쁜 운명, 숙명을 받았더라도 좋은 선업으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운명·팔자론, 불교 아니다 그렇기에 불교가 어렵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쉽지만.

불교의 단점은 너무 어렵기도 하고 또 너무 쉽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를 어렵다고 하는 사람에게 불교 책을 몇 권이나 봤냐고 하면 하나도 안 봤다고 합니다.

또 공부를 어느 정도 했다는 사람들은 견성성불하기가 아침에 세수하다 코 만지기만큼 쉽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수십 년을 불교를 믿었으니 도통을 몇 번은 하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스스로가 못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못 깨달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기를 부처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 부처예요.

각성체 그 자체인데 자기가 부처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 안할 뿐이에요.

번뇌를 본질로 삼고 살아온 습성 때문이지만, 내가 어떻게 감히 부처이고 보살인가, 나는 그저 업보가 두터운 중생일 뿐이다 하면서.

어찌 생각해보면 부처님도 번뇌가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번뇌 많기로 부처님 같이 많은 분이 없고 욕심 많기로 부처님 같이 욕심 많은 분이 없습니다.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 얼마나 욕심이 많으십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번뇌 있고 없고, 욕심 적고 많고의 문제보다 그것을 극복하여 깨달으신 부처님처럼 여러분이 스스로 번뇌를 극복할 수 있는 자신이 부처라고 믿지 않는 한 영원히 성불할 수가 없습니다.

남에게 부드러운 말 한마디 하고 내가 아끼는 것이라도 보시하는 마음이 모두 부처이고 보살의 마음인데 말입니다.

내 가족의 화목을 위해서 봉사하고 보시하는 것이 모두 부처님 마음이고 그 자리가 열반과 해탈로 가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작은 행동을 한 가지 두 가지 실천하다보면 불교가 아주 쉬워집니다.

너도 부처고 나도 부처라고 인정하고 나면 부처가 부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해칠 수 있습니까? 침탈하는 행위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나는 부처다’라는 말을 하루에 일곱 번 씩만 하세요.

그럼 나쁜 일을 하다가도 내가 부처인데 이럴 수 있나, 이런 일을 할 수 있나 하며 그만하게 됩니다.

이 불교가 너무 어렵고, 또 너무 쉬워서 걱정인데 그러다 보니 정법과 멀어져서 운명론자가 되거나 기복 불교로 치우치곤 합니다.

그러면 행복과 지혜와 수명과 복덕을 바깥으로 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복덕과 지혜와 수명을 구하고 생사윤회를 끊어버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과 지혜 광명이 내 부처 내 속에 있는데 말입니다.

유불선 모두 ‘심성론’으로 통해 불교 뿐 아니라 동양 종교의 가르침은 딱 두 가지로 통합니다.

유교나 도교나 불교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심성(心性)입니다.

유불선 삼교가 모두 심성론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유교는 ‘존심양성’ 마음을 받들어서 성품을 길러라, 도교는 ‘수심연성’ 마음을 닦아서 성품을 단련시켜라, 불교는 ‘명심견성’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아라입니다.

심성놀음(진공묘유)을 알라는 것입니다.

억천만사가 전부 심성의 문제예요.

본래 착한 심성대로만 살면 그게 부처입니다.

왜 그러냐.

부처님 말씀으로는 진여자성이라, 마음의 본질이 청정한 진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진여자성 자리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붙잡을 수 없고, 얻을 수 없고, 구해서 구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안 잡힌다고 해서 없는 것 아니잖아요.

진여자성이라는 것이 그와 같은데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체와 용인 심성입니다.

성(性)의 본질은 텃밭과 같아서 그 곳에 씨앗을 뿌리면 무엇이든 자라날 수 있습니다.

심(心)은 성의 바탕 위에 떠서 아지랑이처럼 이리저리 변하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 수만 수천가지입니다.

이것을 생멸심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 무수한 마음 중에도 또 본질을 이루는 마음이 있습니다.

심성이란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언제나 그 심성자리만 알면 됩니다.

교리 하나도 몰라도 착한 심성대로만 살면 그 속에, 불법으로 말하면 진여자성 속에 엄청난 복덕과 공덕과 윤리도덕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불성 그 자리는 만 가지 공덕과 복덕이고 지혜이며 영원한 광명입니다.

그럼 다른 종교는 마음을 닦아라, 받들어라 했는데 우리 불교는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봐라’고 했습니다.

이리 왔다 저리 갔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이런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라고 했습니다.

성품을 보는 것, 영원히 불생불멸한 생명의 본질 그 자리를 보는 것이 견성성불입니다.

그 자리를 잘 보면 마음이 아무리 아지랑이처럼 요동치고 세상이 요지경 같이 변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명심견성을 하면 선과 악을 구분하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고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 힘든 세상, 오탁악세를 어떻게 살아야 쉽게 살고, 불자답게 사는가.

달마대사가 네 가지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보원행(報寃行)이라.

남에게서 억울한 소리를 듣거나 본의 아니게 원망을 듣게 됐을 때라도 원망으로 갚지 마라는 말입니다.

내게 오는 모든 일은 사바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므로 그동안 닦은 수행으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원망하는 마음을 쌓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착하게 살고 보시하고 수행하며 살더라도 어려움을 겪는 것은 과거 숙세 인연에 쌓은 업보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업보나 스트레스는 본래 공한 것입니다.

둘째는 수연행(隨緣行)이라.

따를 수(隨) 인연 연(緣), 모든 것을 인연을 따라 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받은 업은 지난날 여러분이 지은 인과 연에 따른 것입니다.

연과 내 업이 어울려서 결과를 만들어내니 그 고락을 순수하게 받으라는 뜻입니다.

연기의 법칙을 안 내가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연이 사라지면 다시 무로 돌아가고 또 거기서 연이 인이 되고 인이 또 연을 부르고 해서 인연 과보가 되풀이되는 이치를 알아 좋고 나쁨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깨달은 사람한테는 그것도 공이고 필요 없긴 하지만.

매일 나를 바꾸는게 인과응보 그 다음이 무소구행(無所求行), 댓가를 구하는 바가 없이 선행을 하면서 세상을 살라 입니다.

좋은 일을 하더라도 대가를 받을 것이라 기대 하지 말고 행하라는 말입니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 탐욕과 집착은 계속 업을 쌓기 때문에 아무리 공덕을 베풀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공덕 복덕을 베풀더라도 영원히 불생불멸한 근본 그 자리에 앉아서 공함을 알고 베풀어야지, 그 이치를 모르고 대가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만유는 공하여 항상함이 없으니 집착함이 없어야 삼독에서 벗어납니다.

그러고 나면 칭법행(稱法行)이라.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본래의 마음, 성품의 근본자리, 선악시비와 공덕 복덕을 다 떠나 불생불멸, 부증불감, 선악도 끊어지고, 시비도 끊어진 영원한 진여자성의 자리에 앉아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속에서 억천만사가 떠오르고 일어날 때라도 그 자리를 지키고 알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 삼보도 들고 지혜광명도 들고 법계도 모두모두 다 들었습니다.

생사 공덕 시비를 떠난 그 자리를 알면 무엇이 두렵고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잡으려하고 보려하면 또 없습니다.

하지만 있습니다.

그 이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정(性淨)의 이치를 보고 관함을 삶의 법(法)으로 삼아야 합니다.

참된 성품의 이치를 보고 관찰하는 수행의 자세로 사세요.

그 본성(진여자성) 자리에서 온갖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여 물리치고 법에 충만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상은, 모든 선악 시비는 다 무상한 것입니다.

그것이 잘 안돼서 업이 쌓이면 다시 참회하고 수행하고 그래서 업을 소멸하고 이렇게 일생동안 살다보면 큰 악을 안 짓고 나중엔 작은 악도 짓지 않고 그렇게 살다보면 죽을 때쯤 돼서는 진여자성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인연 과보란 내가 어디 가서 무엇이 되어 태어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탁’ 하고 내가 무엇이 되는 결과를 받는 것이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인과응보의 법칙을 잘 알아서 하루하루 열심히 수행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

com 이 법문은 8월 26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봉행된 ‘초삼일 법회’에서 고불총림 백양사 유나 지선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지선 스님은 1946년 전남 장성 출생으로 1961년 16세의 나이로 석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 사미계를 수지하고 1967년 범어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72년 서옹 스님으로부터 ‘학봉’이라는 법호를 받아 법제자가 됐다.

1980년대와 90년대 민주화 운동을 견인하기도 했던 스님은 제주 관음사와 전남 백양사 주지, 종회의원 등 종단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백양사 운문암, 김천 수도암, 상원사, 계룡산 갑사 등 전국의 선원에서 수행 정진하며 20안거를 성만했다.

스님은 2004년 4월부터 고불총림 백양사 유나로 제방의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다.

송명스님─악은 화로 선은 복으로

악은 화로 선은 복으로

-송명스님-

사람들은 누구나 복 받길 원하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을 바라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은 감나무에 감이 열리듯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춘추좌전(春秋佐傳) 이르길 화(禍)와 복(福)은 들어오고 나가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한 일을 하면 화가 오고 착한 일을 하면 복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행(行)을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재앙을 부를수도 있고 또 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복을 받으려면 착한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을 불표에서는 공덕을 쌓는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쌓을 수 있는 공덕은 아주 많습니다.

그중 나누어 주는 공덕을 쌓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나누어주고 베푼다는 의미의 보시는 불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입니다.

보시에는 재물을 나누어주는 재시(財施)와 진리를 가르쳐주는 법시(法施)와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습니다.

재시는 재가 불자가 출가수행자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는 보시이고, 법시는 출가 수행자가 재가 불자에게 하는 보시이고, 무외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국민에게 베푸는 보시입니다.

그러나 어떤 보시이든 보시는 삼륜청정(三輪淸淨)해야 합니다.

즉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주는 물건이나 돈이 모두 깨끗해야 합니다.

만약 어떠한 대가를 바라고 보시를 행한다면 그것은 깨끗한 보시가 아닙니다.

어떠한 대가나 목적을 가지고 베푸는 보시는 보시로서의 의미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선 베푼 만큼 공덕이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누어주고 베푸는 보시, 즉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의 반대 개념인 화(禍)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쁜일을 많이 행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 그것은 반드시 자신에게 재앙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악은 화를 부르고 선은 복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악을 행한다면 언젠가는 오는 재앙으로 파멸에 이를 것이요, 스스로가 선을 행한다면 언젠가는 오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