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스님─ 오늘도 큰 기적이 있었구나

오늘도 큰 기적이 있었구나.

-마성스님-

흔히 “별 일 없으십니까?” 혹은 ‘별고(別故) 없으십니까?’라고 안부를 묻는다.

이 평범한 인사말 속에 삶의 참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별 일 없음’이란 ‘별다른 일이 없다’는 뜻이다.

별고란 ‘뜻밖의 사고’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별고가 있다면 큰일이다.

올 여름 태풍과 홍수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런 것을 우리는 변고(變故)라고 한다.

변고란 ‘재난과 사고’를 말한다.

‘별 일 없다’라는 말을 군대에서는 ‘이상무(異常無)’라고 말한다.

반대로 ‘이상유(異常有)’라고 하면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군에서 아무 일 없는 것을 평상시(平常時)라고 한다.

줄여서 평시(平時) 혹은 상시(常時)라고도 한다.

평상시의 반대말은 비상시(非常時)다.

비상시란 곧 전시(戰時)를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설하는 것이 별 일 없는 것이다.

곧 건강하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잘 못 먹고, 잘 자지 못하고, 잘 배설하지 못하면, 분명 신체 어딘가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다.

별다른 일 없음이 곧 행복한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이다.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단란하게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다.

그런데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식사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이를테면 직장에 출근했던 남편이나 학교에 갔던 자녀가 제 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이미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러다가 혹시 불행한 사고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 혼비백산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별 일이 생기고 나면 그때서야 아무 일 없던 그 때를 그리워하며, 그때가 바로 행복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아무 일 없는 평범한 일상이 곧 행복임을 알아야 한다.

붓다는 『숫따니빠따(經集)』에서 “부모를 섬기는 것,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참으로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본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평범한 일상 속에 최상의 행복이 있다는 말이다.

부모가 살아있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최상의 기쁨이다.

그리고 화목한 가정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다.

여기에 다시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하지 않는 것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복은 평범한 일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똑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안정된 가정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권태를 느껴 밖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이 간혹 있다.

그때부터 그 가정에는 불행이 시작된다.

삶의 재충전을 위한 일상의 탈출이라면 권장할만하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아무 일 없음보다 못하다.

그 평범한 일상이 곧 기적임을 명심해야 한다.

사전에서 말하는 기적이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아주 신기한 일’을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하느님·성령의 힘을 입은 특수한 사람이 행하는 일.

곧, 예수가 기도로써 문둥병·앉은뱅이를 고친 일’ 등을 기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능력으로서 불가능한 일을 이룬 것만 기적이 아니다.

일상이 곧 기적인 것이다.

아무런 이상이 없는 평상시가 곧 기적이다.

이 지구상에는 지금도 전쟁이 진행 중이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였다.

이 사바세계는 투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인간으로서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한마디로 삶 자체가 전쟁이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것, 그 자체에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외줄타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매우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조건 부처님께 매달려 기복적인 신앙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맹목적으로 부처님께 구원을 청하는 것은 올바른 불교도의 신앙이 아니다.

부처님은 구세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한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보다는 다섯 가지 계율을 잘 지키고 바르게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한다면 오늘도 어제와 같이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보다 현실적인 불교도의 삶인 것이다.

외출했다가 사찰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종무소에 들러 ‘별 일 없었느냐?’고 묻는다.

종무소 직원은 ‘절에 무슨 별 일이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오늘도 큰 기적이 있었구나!’ 하고 안심한다.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삿베 삿다 바완뚜 수키땃따.)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불교포커스에서-

원행스님─‘무소유’는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

‘무소유’는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 – 원행 스님 – “모든 것 변하기에 집착하지 않는 삶 살아야” “모든 것 변하지만 마음만은 영원불멸 매 순간 정진하며 끊임없이 성찰해야” “육바라밀 실천 통해 업 제대로 닦아야 남 위해 베푸는 보시바라밀 가장 중요” 지난 11일 ‘무소유(無所有)’ 등을 통해 많은 국민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했던 법정 스님이 입적했습니다.

스님은 많은 저서를 남기셨는데 가시는 그날에도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며 마지막까지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울린 ‘무소유’란 무엇입니까? 무소유를 한문으로 해석하면 ‘있는 바가 없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님들은 스님들로서 가져야 할 것이 있고 갖지 말아야 할 것이 있듯이 사람들마다 각자 가져야 할 것과 갖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래 없기 때문에 무소유를 통해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라고 하는 ‘상(相)’입니다.

부부간에도 나를 없애고 서로 마음을 화합하면 아름답듯이 모든 것의 기본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법정 스님은 한국에서 제일 좋은 절을 짓고 살았습니다.

스님의 대표 산문집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은 대원각의 김영한 보살이 스님에게 시주, 절을 세워주기를 청하면서 길상사가 탄생했습니다.

길상사는 현재 시가로 7000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님은 그곳에서 한번도 주무시질 않았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언행이 일치하셨고, 마지막 가시는 길조차 대나무 평상에 가사 한 벌 덮은 다비장이었습니다.

저는 스님의 영전에 삼배를 올리며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조사 열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는 한문으로 해석했을 때 ‘있는 바가 없다’일 뿐 진정한 가르침은 ‘그것조차 없다’는 말씀입니다.

무상(無相)하기 때문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상은 무엇입니까? 흔히 무상을 ‘생각이 없다.

덧없다.

욕심이 없다’라고 통용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불교를 믿어서 제일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신도들에게 말하길 불교를 믿어서 제일 좋은 것은 사람이 몸을 바꿔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라 고 말합니다.

사바세계에서 만나서 사는 것을 저는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천상에 가면 다 좋은 일을 해서 복을 지을 수가 없고, 지옥에 가면 너무 힘들어 남을 도울 시간이 없습니다.

삼독과 번뇌를 참아내는 세계를 인토(忍土)라고 하는데 이 사바세계에서는 많은 복을 짓고 남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종교에도 내생이 있는데 오직 ‘천당과 지옥’ 두 가지 세계로 나눠집니다.

하지만 불교는 어떻습니까?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6가지 세계에 태어나고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육도윤회(六道輪廻)라 하는데 6가지 수레바퀴가 돌듯이 계속 돈다는 의미입니다.

천상,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세계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태어나고 죽습니다.

그런데 6가지 세계를 순서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업의 성질에 따라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에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러한 인연 속에 부부가 탄생합니다.

흔히 부부는 천생연분이라고 하는데 천생동안 맺을 인연이라는 뜻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서로 격려해주는 것이 부부의 인연인데 악연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싸울 정도로 세상은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또한 부부간에 이해를 잘 하지 않으려 하는데 끝까지 용서하고 격려해줘야 합니다.

수많은 인연 속에 부부가 되는데 사람이 몸을 바꿔서 천당과 지옥에 가면 인연을 지을 수 없습니다.

무상은 무소유입니다.

항상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은 가지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변한다고 했는데 우리 자신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몸이 제일 소중합니다.

하지만 몸은 언젠가는 한 줌의 재로 변한다는 것을 깨닫고 순간순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상의 뜻은 ‘이 세상은 모두 변한다’입니다.

권력도, 재산도 모두 변합니다.

하지만 영원불멸한 것이 있습니다.

마음은 영원합니다.

불성(佛性)만큼은 영원한 것입니다.

재물은 벌기도 하고, 쓰기도 해야 합니다.

중도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굴삭기가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듯 여러분들은 굴신(屈伸)을 잘해야 합니다.

채우다 보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풀면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대원각을 보시한 보살을 보십시오.

그 보시로 인해 많은 이들이 법정 스님의 향기로운 법문을 통해 마음까지 밝아지듯이 진정 그 마음이 무상입니다.

법정 스님 또한 보시를 받았지만 길상사에서 하룻밤도 지내지 않았습니다.

무소유 정신은 보시의 정신과도 같습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있는 것은 없다’, 즉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은 ‘윤회’와 같은 말입니다.

윤회는 ‘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고정돼 있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윤회하는 것입니다.

윤회는 우리가 지은 업에 의해 변합니다.

법정 스님도 금생에 말빚을 내생에 가지고 가지 않겠다고 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무소유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것이라 하더라도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단지 업만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업을 잘 닦으려면 육바라밀을 실천해야 합니다.

육바라밀 가운데 첫째가 바로 보시입니다.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는 여성불자를 보살이라 칭하는데 보살의 진정한 뜻은 ‘남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남’은 다른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배우자를 시작으로 자식, 친척, 이웃, 사회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개인주의로 복을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사는 삶, 법정 스님을 ‘나의 거울’ 삼아 사회를 위해 비추십시오.

나를 넓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정 스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은 실질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특히 불교계는 더욱 심한데 큰스님들이 법문을 할 때는 늘 중국의 선조사들의 법문을 인용하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다르셨습니다.

우리 대중 곁에서 우리 식으로 법문을 하셨습니다.

법정 스님이 가장 좋아하신 책은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으로 신라 원효대사가 지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과 고려 지눌대사가 지은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고려 후기 야운대사가 지은 《자경문(自警文)》을 합본한 책입니다.

강원에서 배운 것이 대부분 중국 선조사들의 가르침입니다.

중국식 불교에서 탈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국의 조주 선사의 유명한 ‘뜰 앞에 잣나무’라는 오도송이 있는데 이 잣나무는 우리나라의 측백나무입니다.

격조 있는 불교만 생각하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불교를 해야 하겠습니다.

불자들은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무소유의 뜻을 바로 알고 자비를 베풀어 무량대복을 짓길 바랍니다.

지성스님 법문

■복밭 가꾸는 것도 믿음에서 출발해야■ 지성스님 동화사 주지 ‘백고좌 법회의 공덕’ “복밭 가꾸는 것도 믿음에서 출발해야”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기도하는 현대인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살고 싶지만 바쁜 현실 속에서 불자의 삶을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지역의 불심을 한데 모으고, 불자들에게 고승대덕을 친견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을 넓혀주고자 대구 동화사는 백고좌 법회를 개최해 큰 호응을 얻었다.

동화사 주지 지성스님에게 백고좌법회의 의의와 현대인의 올바른 신행활동에 대해 들어보았다.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힘은 믿음까지 고취시켜줄 수 있는 불교공부가 디딤돌이 될 때 생깁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간사에 몸을 맡기다 보면 부처님의 깨달음도 바쁜 일상속에 끼어들 틈이 없는 듯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의 흐름에 쫓기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과 갈등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부처님께 의지하고 부처님 법을 따르는 것이겠지요.

불자들을 만나보면 흔히 “불교를 믿고 있긴 하지만 불교에 대해 아는 건 없다”고 합니다.

특히 불교의식에서부터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이 너무 방대하여 어디서부터 어떻게 배워야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고, 사람으로 태어나서도 불법을 만나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부처님 법을 만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불자의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불자다운 신앙생활은 믿음과 배움, 실천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지요.

부처님이라는 개인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회를 통해 배우는 것이지요.

《화엄경》에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한국불교에 있어 불자들의 신행모습은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한 기복신앙의 형태로 지난 50여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불법을 수호하기는 했지만 정작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는 말씀입니다.

불교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다스려 마음의 얼룩을 지우는 수행의 종교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한국 불교를 기복신앙, 치마불교라고 폄하하면서 불교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기복불교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되고 학문적인 지식은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을 지어 복밭을 가꾸는 일도 중요한 수행의 과정입니다.

종교는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염원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고3 수험생을 가진 학부모들은 오로지 대학입학이라는 소원을 부처님께 올립니다.

그 소원을 가슴 깊이 품고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지요.

자식의 대입합격이라는 일념으로 염불이든 절을 하면 그것만으로도 부처님을 믿는 마음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고, 불법을 깨달아 윤회의 고리를 끊는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녀의 앞날을 위한 기도로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다면, 기도하는 가운데 그 생각조차도 떨쳐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자녀의 앞날을 위한 기도로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다면, 기도하는 가운데 그 생각조차도 떨쳐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 의지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마음의 준비, 즉 불심이 가슴속에 진동한다면 그 다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일이겠지요.

불심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으면 불교를 배우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입니다.

부처님께 복을 구하는 행위도 불교의 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믿는 마음만 가지고는 불교를 다 알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오히려 복을 바라며 부처님을 찾는 일이 전부가 된다면 불교의 진정한 가치를 외면하는 일이 되겠지요.

불자들이 불법승 삼보를 외호하고 절에 와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 우리나라 불자들의 신심은 나무랄 데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의 신행생활은 변해야 합니다.

불자들이 절에 가서 불사에 동참하고, 부처님 전에 앉아 염불소리만 듣고 집에 돌아와도 그 공덕은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염불소리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절은 왜 하는 것인지 알고 행한다면 사찰에 가서 법회를 봉행하는 시간이 바로 깨달음으로 향하는 정진의 시간이 되지 않을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변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불자들의 모습은 바뀌어야 합니다.

본질은 본질대로 지키고 변화는 수용하면서 현대사회에 발맞추어야 합니다.

세계를 이끌 수 있는 불교가 우리 곁에 있지만 불자들은 그 불교의 우수성을 잘 모릅니다.

앞서 나가야 할 불자들이 변화에 이끌려 다녀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 불자들은 복을 짓는 것도 대승의 차원에서 지어야 합니다.

사회문제나 나랏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나의 작은 관심과 행동이 전체를 바꿀 수 있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우선 불자들이 이 시대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불교를 알아야 합니다.

불교를 공부하려거든 벼랑 끝에 선 자세로 매섭게 몰아부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사는 모습이 위태롭기 그지없다는 뜻이지요.

《법화경》 〈비유품〉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윤회하는 중생들의 삶을 불타는 집에 비유하셨습니다.

집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을 버젓이 보면서도 불이 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불에 타 죽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무지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 어느 때보다 정견(正見)이 필요한 때입니다.

세상을 바로 볼 줄 아는 힘은 단순한 알음알이식 공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의 시발점이 됐던 믿음까지 고취시켜줄 수 있는 불교공부가 디딤돌이 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 불자들이 노력해야 할 올바른 신행생활입니다.

-만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