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남스님─밤낮으로 부처 안고 있는데

영축총림 율주 혜남 스님

밤낮으로 부처 안고 있는데 어디서 부처를 찾으려 하나

한 성품이 일체 성품에 통해

내 안에 부처있음 깨우쳐전도된 생각 바로 잡음이 우란분절의 참 다운 의미

▲혜남 스님

우란분절은 많은 불자님들이 아시다시피 목련존자가 어머니를 제도한 날을 기념하는 날인데 ‘우란분’이라는 말은 인도식 표현으로, 번역하면 거꾸로 매달린다는 뜻입니다.

금생에 나쁜 일을 하면 다음 생에는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매달리는 것은 생각을 거꾸로 해서 그렇습니다.

‘반야심경’에서도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고 했습니다.

거꾸로 된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라, 그렇게 하고 나면 구경열반(究竟涅槃), 근심 걱정 고통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평화로운 세계에는 평화로운 마음이 들어갑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화평하면 자연히 편안한 말이 나오고 그렇게 되면 생활이 진실을 말하고 남을 화합시키는 말을 합니다.

생명을 해치지 않는 자비로운 행동을 하고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내 것을 베풀며 살고 이성 관계도 욕정에 못 이겨서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도된 생각을 여의려면 탐, 진, 치 삼독이 없어야 됩니다.

‘화엄경’에서는 십선계(十善戒)를 설하고 있는데 탐, 진, 치를 삿된 소견으로 보고 이 사견의 죄가 가장 크다고 했습니다.

소견이 삿되면 모든 것이 거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 마음자리에서는 육도(六道)가 공(空)하다고 했습니다.

지옥, 아귀, 천상 모두 마음의 작용이지 실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중생에게 업이 있는 동안에는 엄연히 현실로서 우리 눈에 보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악한 마음, 표독한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지옥을 만듭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었든 나 혼자 배불리고 내 것을 다 챙기는 것이 아귀도입니다.

그 다음, 지혜가 없이 미련하면 축생도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 마다 힘으로 눌리고 힘으로 결판을 보려고 하면 그것이 아수라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착한 이가 오계를 받아서 잘 지키면 사람 몸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선도를 잘 지키면 천상에 태어나고, 또 십선도를 잘 닦으면서 사성제 법문을 듣고 잘 수행하면 아라한이 되고, 십선도를 잘 지키면서 십이연기를 잘 관찰하면 연각(緣覺)이 되고, 십선도를 잘 지키면서 육바라밀을 잘 수행하면 보살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십선도를 지키면서 사무량심으로 사섭법을 실천하고 십팔 불공법을 닦으면 부처님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십선도이지만 십선도를 닦는 마음가짐에 따라서 성문도 될 수 있고 연각이 될 수도 있고 보살이 될 수 있으며 부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자리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이 사라지면 공적한 대원경지에 들어가서 바로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증도가’의 한 구절이 있습니다.

히말라야의 설산에 가면 잡초가 생기지 못합니다.

거기에 향기가 아주 좋은 비니라는 풀이 있습니다.

맛도 좋습니다.

그런데 설산에 있는 흰 소가 이 비니를 먹고 자랍니다.

그 소에게서 나오는 우유를 정제하면 제호(禮職) 맛이 된다고 했습니다.

일체 쓸데없는 근심, 걱정, 번뇌, 망상이 없어지면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죄업을 지을 일이 없습니다.

자연히 심선도만 실천하면서 오직 나도 부처님이 되겠다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나도 생각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나도 말하고, 부처님께서 행동하시는 것을 나도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외국어를 배워도 무조건 따라 해야 실력이 늡니다.

일단 암기를 해야 말을 할 수 있겠지요.

자, 설산의 풀을 먹고 자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체 중생에는 불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백 가지, 천 가지 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모두 바다가 되듯이 현실적으로는 사람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고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등 별별 차별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연에 따라 나타난 허상일 뿐이고 똑같이 소중한 부처의 성품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불성이 무엇입니까.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잠 오면 잠 잘 줄 아는 것,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불성입니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불성의 작용입니다.

한 성품이 원만해서 일체의 성품에 다 통합니다.

이것으로 선도 하고 악도 하는 것입니다.

한 법이 일체의 법을 다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그 도리를 비유한 표현이 하나의 달이 하늘에 나타나면 일체의 물에 다 나타난다는 말과 같습니다.

물이 있는 곳에는 달그림자가 비춥니다.

그런데 만약 탁한 물이 있으면 달그림자가 비치치 않습니다.

달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물이 탁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불성이 모든 중생에게 다 있습니다.

성서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속에 있다.

너희가 내 속에 있다.”

이 역시 같은 말입니다.

도교에서는 ‘도성’이라는 표현으로 “도가 있지 않는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불성이니 도성이니 하는 것은 표현의 차이일 뿐 모두 한 곳으로 돌아갑니다.

“하나의 달이 나타나면 일체의 물에 비치니, 일체의 물에 있는 달이 한 달로 거두어 질 것”이라는 말이 그와 같습니다.

중생의 본성 자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해서 많은 것도 아니고 중생이라고 해서 적은 것이 아니라 모두 똑같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훗날 큰스님들께서 말씀 하시기를, 우리는 아침마다 밤마다 부처님과 함께한다고 했습니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부처를 안고 일어난다, 안거나 눕거나 걸어 다니거나 항시 함께 한다.

마치 몸이 가면 그림자가 따라 붙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범망경’에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노사나 부처님이 연꽃위에 앉아 계십니다.

그 주위에는 천 송이 연꽃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천 송이 연꽃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 분씩 계십니다.

그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마다 백 억 세계를 거느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백억 석가모니불 화신의 본신이 노사나 부처님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의 분신입니다.

그것을 굳게 믿고 부처답게 행동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심하고 겸양하고 남을 존경하지만 그 성품에 있어서는 나도 부처와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란분재를 제대로 맞이하는 방법은 생각을 바꿔서 ‘내가 바로 부처님의 나타남’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경에 말씀하시길, 부처님 법신이 지옥, 아귀, 축생, 천상, 인간 오도의 순환이고 그것을 이름 하여 중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생 속에 부처가 있고 부처 속에 중생이 있다, 모든 부처님 몸 속에 중생이 새록새록 성불해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 도리를 깨달으면 내가 부처고 부처가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다 마음이 착하고 효성심이 있습니다.

해마다 우란분절을 맞아 조상을 위한 천도재를 지내는 것도 부모님에 대한 효성심이 표현된 것입니다.

아까 우란분이라는 것은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구제하는 참다운 방법은 전도된 생각을 바른 생각으로 고치는 것입니다.

그 바른 생각은 우리는 모두 똑같은 불성의 소유자임을 믿고 내가 바로 부처의 나타남이고 우리 부모, 형제, 생명 있는 모두가 부처의 나타남이라는 점을 믿는 것, 그래서 서로 존경하고 칭찬하면서 행복한 삶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잠 섬기는 것 역시 참다운 불성의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으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이 법문은 7월31일 부산 홍법사(주지 심산 스님)에서 봉행된 불기 2557년 백중 49일 기도 4재 법회에서 혜남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수월스님─도를 닦는다는 것은

도를 닦는다는 것은

-수월스님-

도를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고 허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혀서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겨.

하늘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 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겨.

나는 순전히 ‘천수대비주(千手大悲呪)’로 달통한 사람이여.

꼭 ‘천수대비주’가 아니더라도 ‘옴 마니 반메훔’을 혀서라도 마음을 모으기를, 워찌깨나 아무리 생각을 안 할려고 혀도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맨큼 혀야 되는겨.

옛 세상에는 참선을 혀서 깨친 도인네가 많았는디, 요즘에는 참 드물어.까닭이 무엇이여? 내가 그 까닭을 말할 것인게 잘 들어 봐.

옛날 스님들은 스스로 도를 통하지 못혔으면 누가 와서 화두 참선법 (話頭參禪法)을 물어도 “나는 모른다”고 끝까지 가르쳐 주들 않았어.

꼭 도를 통한 스님만이 가르쳐 주었는디, 이 도통한 스님께서 이렇게 생각하신단 말여.

“저 사람이 지난 생에 참선하던 습관이 있어서 이 생에도 저렇게 참선을 하려고 하는구나.

그러면 저 사람이 전생에 공부하던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도를 통했으니께 환히 다 아실 거 아니여.

혀서 “옳다.

이 화두였구나” 하고 바로 찾아 주시거든.

그러니 이 화두를 받은 사람은 지난 생부터 지가 공부하던 화두니께 잘 안하고 배길수가 있남.

요즘은 다 글렀어.

또 말세고 말이야! 모두가 이름과 위치에 얽매이다 보니, 누가 와서 화두를 물을 짝이면 아무렇게나 일러 주고 만단 말이지.

안 일러 주면 자신의 이름과 자리 값이 떨어지니께 말이여.

그래서 화두를 아홉번 받았느니, 여덟번 받았느니 하는디, 이래 가지고서야 워찌게 도통을 한다고 할것인겨! 지가 꼭 공부하던 화두를 일러 주니께 틀림없이 공부를 이루고 바로 도를 통하는겨.자신 만만하니께 도통하는겨.

옛날 사람들은 화두 공부가 잘 되지 않더라도, 화두를 바꾸지 않고 ‘나는 열심이 모자라니께 열심히만 정진하면 꼭 성취할 것이다.’는 한생각으로 마음을 몰아 붙여 오로지 한길로만 애쓰다가 도를 통하기도 혔어.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그게 아니여.

쓰잘데기 없는 몸과 마음에 끄달려, 조금 하다가 안 되면 그만 팽개치고 “소용 없다”고 하거든.

이게 다 아상(我相)이 많아서 그런겨.

무엇이든지 한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혀야 하는디, 이것이 꼭 밥 먹기와 매한가지여.똑같은 밥 반찬이라도 어떤 사람은 배불리 맛있게 먹지만 어떤 사람은 먹기 싫고 또 어거지로 먹으면 배탈이 나는 뱁이거든.

공부도 마찬가지여.

염불을 열심히 혀야 할 사람이 딴 공부를 하니 잘 안 되는겨.

중이 되려면 처자권속을 죄다 버려야 혀.

모두 다 버리고 뛰쳐나와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곳에서 열심으로 닦아야 혀.

아버질 생각한다든지 어머닐 생각한다든지 가족을 생각할 것 같으면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가 않거든.

무슨 공부든지 일념으로 해야 혀 위찌케든 일념을 이뤄야 되지, 이 일념이 안 되면 이것 저것 다 쓸데없는겨.

그래서 옛날 도통한 도인네들은 부모 형제 모두 내버리고 중이 되어 홀로 공부했던 거여.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게 되는겨 집에 있으면서 부모님을 열심히 위하면 효도라도 되는데, 이런 효도도 못하고 집을 나와서는 도도 깨치지 못하니 두 집에 죄를 짓게 되는 거 아녀.두 집안에 죄짓지 말고 “워쩌튼 죽어라 혀 보자” 해서 부모 형제 모다 버리고 이렇게 산단 말이지 “한 집안에 천자가 네 명 나는 것보다도 도를 깨친 참 스님 한 명 나는게 낫다.” 이런 말을 옛날부터 많이 들었지.

만일 중이 되어 도를 통할 것 같으면 이 공덕으로 조상의 모든 영령들과 시방삼세의 중생들이 다 이고득락(離苦得樂) 할 것이니 이 얼마나 좋으냐 말여.

이 세상이라는게 중이 되면, 머리가 있고 없고 글이 있고 없고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여.차라리 그런 것들은 없는게 훨씬 나아.

참으로 살람되기가 어렵고, 천상천하에 그 광명이 넘치는 불법 만나기가 어려운데 말이지, 사람 몸 받아 가지고도 참 나를 알지 못하고 참 나를 깨치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워디 있을겨.사람 몸 받고도 성불 못하면 이보다 더 큰 한이 워디 있을겨.

부처님께서도 “나는 너를 못 건져 준다.

니가 니 몸 건져야 한다.” 하셨어.그러니 참 그야말로 마음 닦아가지고 니가 니 몸을 건지지 못하고 그냥 죽어 봐라.이렇게 사람 몸 받고도 공부를 이루지 못하고 그냥 죽어 봐라.다 쓸데 없다.

어느 날에 다시 이 몸을 기약할 것인가.

서암스님─ 매일아침 10분이라도 자기를 찾아 보세요

매일아침 10분이라도 자기를 찾아 보세요

서암스님

“아침에 공기맑을때 독서하는 것은 죄악이다.” 내가 어릴적 읽었던 톨스토이의 작품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때만 해도 일제시절이라 책 빌려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늘 책을 가까이 했지요.

왜 아침 공기맑을때 책읽는 것이 죄악일까요, 오히려 권장할 일인데 말입니다.

종일 활동하다가 잠자리에 들기전에 과거의 인간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을 참고하기 위해 그때 독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아침 그 신성한 시간에는 남의 찌꺼기를 들여다 볼것이 아니라 자기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마음에 어찌나 감명을 받았던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자기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 말은 후에 나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이끈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끔 보면 종교를 갖는 신행활동이 다 여가시간에나 하는 것인 줄 알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육을 받고 철학을 연구하고 모든 종교의 문을 두드리고 하는 것들이 다 무슨 글을 배우기 위해서나 어떠한 기교를 배우기 위해서나 어느 종교를 믿기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을 보다 복되고 행복하게, 진지하고 평화스럽고 아름답게 살기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찰나를 살더라도 우리가 하루하루 노력해서 먹고사는 것들이 다 무엇때문일까요? 이 사는 목적을 밝히고 발견해야 합니다.

불교는 바로 그 사는 태도를 분명히 알자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백년도 못되는 세월동안 우리는 꿈틀거리며 무한히 헤매고, 한생뿐만 아니라 또 몸 받고 몸 받는 수없는 광겁으로 생사의 파도에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생사없는 도리를 하나 밝히기 위해서 부처님이 출현하신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쉬운 도리를 일러 주셨지만 모두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생사 없는 길에 몰아 넣기 위해 49년 동안이나 종으로 횡으로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꿈깨는 일밖에 없습니다.

불교의 핵심은 바로 꿈깨는 문제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천하에 이보다 쉬운 법(法)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불교가 너무 어려워서 못하겠다는, 잠꼬대같은 소리들을 하지요.

가장 쉬운 이치를 두고 어렵다는 것은 겉으로 헤매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다만 1시간이나 10분이라도 딱 앉아서 자기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인식한다면, 그 시간은 참으로 빛나는 시간입니다.

깨치지는 못하더라도 잠깐 동안이나마 면밀히 자기자신을 적나라하게 바라보고 생각해 본다면 하루 24시간 생활하는데 큰 힘이 되고 큰 빛이 됨을 직접 경험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어요.

일찍이 중농이었던 아버지께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신 관계로 안동형무소에 투옥되셨고, 집안은 파산의 운명을 겪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방랑를 하다 예천땅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민족의식에 눈을 뜬 분들이 설립한 조그마한 사립학교에서 처음으로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배달하고 밤에는 물건을 팔아 학비는 물론 집안의 살림도 도와야 했지만 육체의 고통을 정신력으로 버텨가며 와세다 대학의 강의록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늘 갖고 있는 의문점들을 많은 사람에게 질문하곤 했는데 흔쾌한 답을 얻지 못해 늘 답답했습니다.

그당시 나는 예천 서악사에 친구들과 가끔 놀러갔는데 어느날 서악사의 노스님을 만나뵙는 인연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만해도 하룻강아지 범무서운줄도 모르고 산중에 있는 중이 뭘 알까싶은 마음에 내가 아는 것을 뽐내며 대화를 시작했지요.

그런데 대화를 해보니 예전에 만났던 이들과는 달리 오히려 내 입이 꽉 막혀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스님은 내게 “그래, 네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배운 것 다 털어내고 네소리 한번 해보아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그 소리에 ‘아!…’하며 꽉 막혀버린 것입니다.

내가 그때까지 아는 소리란 소설보고, 책보고 배운것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다 버리고 내안의 소리를 한번 해보라고 하니 그만 막혀버린 겁니다.

그리고 스님은 “너의 정체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셨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또 꽉 막히는 것이었어요.

물론 어머니 뱃속에서 내가 나왔겠지만 또 그 어머니는 어디서 왔냐고 소급해 물으면 또 막힐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그 노스님과 며칠간 이야기를 해보니 예사 스님이 아니구나 생각돼 스님께 중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무나 중되는 것 아니다 하시기에 며칠을 졸라 서악사 노스님 밑에서 2년 반동안 시봉을 하고 난 후, 김용사에서 화산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했습니다.

출가 한 뒤 한 3년동안은 경전공부와 참선수행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다가 종단의 추천을 받아 종비생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하고서도 생계를 유지하기위해 요즘도 나오는 ‘요미우리’‘아사히’ 등의 배달도 하고, 방학때는 다음학기 학비를 마련하기위해 품팔이도 하고, 고물장사도 하고 막노동판 주방장도 하는 등 별 것을 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덜컥 폐병에 걸렸지요.

피를 토하며 쓰러진 나를 당시 같이 유학하며 옆방에 살던 故 이종익박사가 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폐병에 걸리면 가족들도 가까이 가기를 꺼릴 정도로 중병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 의사에게 “내 병 고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가 “고칠 생각이 있느냐”하면서 2년간 입원해야 된다는 것이었어요.

하루살이도 힘든데 2년간 입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대학 3년을 수료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귀국후에 결사용맹정진을 하며 그 죽을 병마를 뛰어넘었습니다.

일제 징용이 한창이던 때에는 철원 심원사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강사생활을 잠시 했었고,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 심계사 등에서 수행했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병이 내 몸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이날까지 살고 있습니다.

또 대승사에서는 청안스님, 청담스님, 포산스님, 우봉스님, 성철스님들과 함께 정진하기도 했습니다.

광복후 우리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울때를 두루 지나며 해인사 선방, 망월사, 청화산 원적사 등지를 떠돌며 화두를 잡고 있습니다.

화두라는 것은 본시 말씀 화(話)자, 머리 두(頭)자입니다.

아무리 짤막한 말도 말의 뜻이 다 있습니다.

뜻없는 말이 없지요.

그런데 이건 뜻이 붙지 않습니다.

일체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붙지 않는 것이 화두입니다.

가령 화두를 뭐하러 할려고 하냐고 물으면 뭐라 할것입니까? 깨닫기위해서 한다고 하겠지요.

왜 깨달으려 하냐고 물으면 뭐라 답하겠습니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할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괴로우니까 고(苦)에서 벗어나기위해 화두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49년간 설한 8만4천법문은 모두 이야기 즉, 말로돼 있습니다.

화두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옛스님들은 “어떻게 하면 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하고 제자가 물으면 방망이로 후려치기도하고, 또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기도 했지요.

그것은 이론으로는 안되니까 그런 비상수단을 이용하는 겁니다.

화두는 이론이 아닌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그 사람의 생명체에다가 침을 놓은 것입니다.

이론을 따져봐도 안되고, 백과사전을 찾아봐도 안되는 꽉 막히는 의문을 푸느라 시간 가는줄 모르고, 시간과 공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어디 앉아 있는지도 망각해 버리고 골똘히 참구해 들어가는것, 그게 화두입니다.

하지만 화두는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화두에는 1700공안이 있는데 역시 말을 통해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지, 말 안하면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말을 안해야 된다는 것을 또 말로써 설명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 가지고 말에 이른것.

즉, 이론에서 이론으로 끝마치는 것은 불교의 경전 즉 교학이고, 이론에서 이론이 끊어진데까지 끌어다 놓는것이 화두다 이 말입니다.

사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화두 아닌게 없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우리가 정말로 아는게 사실 하나도 없어요.

아는거 있거든 하나 얘기해 보세요.

그래 이건 연필인데 이름이 연필이지 이게 어떤 나무로 만들었는지 또 그 나무는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알아요? 실제 우리는 먼지 하나도 제대로 알고 있지를 못해요.

그러나 사실 먼지 하나의 존재만 제대로 알아도 우주전체를 알아버립니다.

요새 과학에서도 소립자, 원자, 전자니 하면서 연구해 들어가는데 그것만 알아도 우주전체를 아는 것이 아닙니까? 이세상을 이루는 물질은 하나인데

-현재 하나라고 과학은 결론지어 놨는데-

하나의 먼지 입자만 봐도 제대로 아는게 하나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꽉 막힐 수 밖에요.

참선이란 말 자체를 몰라도 인간이 진지하게 살려고만 한다면 다 화두가 되게 마련입니다.

풀 한포기 꽃 한송이를 보아도 저런 풀에 파란물이 묻어 올라오고, 빨간 꽃 봉오리가 올라오고 하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기하지요.

누가 염색공장을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닌데, 우주에는 전부 신기한 것, 모르는 것 뿐입니다.

모르는것 뿐이라는 것은 자기가 결국 멍텅구리다 이 소리인데, 정신 바짝 차려야지 그냥 멍텅구리로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신 바짝 차린다는게 화두거든요.

예전에 나는 잠시 조계종 총무원장직을 맡았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일은 내게는 영 맞지가 않았습니다.

자질이 부족했던 것이었죠.

그래서 모든 직책을 다버리고 경상북도 하북면 원적사로 내려왔어요.

그때 나는 바랑에다 흰 장갑 여섯켤레를 넣어가지고 왔어요.

총무원장으로 있다보니 각종 행사에 참석하는 일이 많았는데 가만히 보면 테이프커팅인가 뭔가 할때 한번 쓰고는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 이더라구요.

면장갑 한켤레지만 참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요긴하게 쓰려고 모아둔 것이지요.

주위 스님들이 흰장갑 여섯켤레의 사용처를 묻길래 “나무할때 쓰려고 모아왔지”했더니 다들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더군요.

요즘 너무 헤프게 삽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얼마든지 오래 오래 긴요하게 쓸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수행하는 스님들 조차 아끼고 절약한다는 생각없이 너무 풍족하지 않나 염려가 됩니다.

그렇게 원적사에 내려와서 원효스님이 머물렀다는 근처 토굴에서 솔잎을 따먹기도하고 내손으로 직접 공양을 지어 먹으며 오랜동안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오로지 철저하게 수행에만 몰두했던 그때가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가 철저한 생각이 아니고 이 세상이 조금 살만하니까 정신이 없어 그렇지, 내가 오늘을 살지 내일을 살지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바람 앞에 촛불같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인생인데 백년산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설사 백년을 산다해도 이렇게 살아가지고 근본문제가 해결이 되겠느냐 그말이지요.

수행은 누가 하는 것이라고 해서 하는게 아니고 안한다고 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진실되게 살려면 안하고는 배기지 못하는 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누구한데 수행법을 배운게 아닙니다.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해서 밤중에 집을 나와서 탁 한 판 해보려니까 시원하게 자기를 가르쳐 줄 스승이 한분도 없었어요.

그러니 물을 필요가 없지요.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해결해야 되겠다 그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진지하게 살면 저절로 수행자가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급한 것이 내 인생을 찾는 것입니다.

머리에 불붙은 것을 끄듯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듯이 내 인생의 참모습을 깊이 참구해 들어가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