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행스님─‘무소유’는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

‘무소유’는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 – 원행 스님 – “모든 것 변하기에 집착하지 않는 삶 살아야” “모든 것 변하지만 마음만은 영원불멸 매 순간 정진하며 끊임없이 성찰해야” “육바라밀 실천 통해 업 제대로 닦아야 남 위해 베푸는 보시바라밀 가장 중요” 지난 11일 ‘무소유(無所有)’ 등을 통해 많은 국민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했던 법정 스님이 입적했습니다.

스님은 많은 저서를 남기셨는데 가시는 그날에도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며 마지막까지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울린 ‘무소유’란 무엇입니까? 무소유를 한문으로 해석하면 ‘있는 바가 없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님들은 스님들로서 가져야 할 것이 있고 갖지 말아야 할 것이 있듯이 사람들마다 각자 가져야 할 것과 갖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래 없기 때문에 무소유를 통해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라고 하는 ‘상(相)’입니다.

부부간에도 나를 없애고 서로 마음을 화합하면 아름답듯이 모든 것의 기본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법정 스님은 한국에서 제일 좋은 절을 짓고 살았습니다.

스님의 대표 산문집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은 대원각의 김영한 보살이 스님에게 시주, 절을 세워주기를 청하면서 길상사가 탄생했습니다.

길상사는 현재 시가로 7000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님은 그곳에서 한번도 주무시질 않았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언행이 일치하셨고, 마지막 가시는 길조차 대나무 평상에 가사 한 벌 덮은 다비장이었습니다.

저는 스님의 영전에 삼배를 올리며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조사 열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는 한문으로 해석했을 때 ‘있는 바가 없다’일 뿐 진정한 가르침은 ‘그것조차 없다’는 말씀입니다.

무상(無相)하기 때문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상은 무엇입니까? 흔히 무상을 ‘생각이 없다.

덧없다.

욕심이 없다’라고 통용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불교를 믿어서 제일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신도들에게 말하길 불교를 믿어서 제일 좋은 것은 사람이 몸을 바꿔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라 고 말합니다.

사바세계에서 만나서 사는 것을 저는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천상에 가면 다 좋은 일을 해서 복을 지을 수가 없고, 지옥에 가면 너무 힘들어 남을 도울 시간이 없습니다.

삼독과 번뇌를 참아내는 세계를 인토(忍土)라고 하는데 이 사바세계에서는 많은 복을 짓고 남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종교에도 내생이 있는데 오직 ‘천당과 지옥’ 두 가지 세계로 나눠집니다.

하지만 불교는 어떻습니까?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6가지 세계에 태어나고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육도윤회(六道輪廻)라 하는데 6가지 수레바퀴가 돌듯이 계속 돈다는 의미입니다.

천상,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세계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태어나고 죽습니다.

그런데 6가지 세계를 순서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업의 성질에 따라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에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러한 인연 속에 부부가 탄생합니다.

흔히 부부는 천생연분이라고 하는데 천생동안 맺을 인연이라는 뜻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서로 격려해주는 것이 부부의 인연인데 악연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싸울 정도로 세상은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또한 부부간에 이해를 잘 하지 않으려 하는데 끝까지 용서하고 격려해줘야 합니다.

수많은 인연 속에 부부가 되는데 사람이 몸을 바꿔서 천당과 지옥에 가면 인연을 지을 수 없습니다.

무상은 무소유입니다.

항상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은 가지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변한다고 했는데 우리 자신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몸이 제일 소중합니다.

하지만 몸은 언젠가는 한 줌의 재로 변한다는 것을 깨닫고 순간순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상의 뜻은 ‘이 세상은 모두 변한다’입니다.

권력도, 재산도 모두 변합니다.

하지만 영원불멸한 것이 있습니다.

마음은 영원합니다.

불성(佛性)만큼은 영원한 것입니다.

재물은 벌기도 하고, 쓰기도 해야 합니다.

중도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굴삭기가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듯 여러분들은 굴신(屈伸)을 잘해야 합니다.

채우다 보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풀면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대원각을 보시한 보살을 보십시오.

그 보시로 인해 많은 이들이 법정 스님의 향기로운 법문을 통해 마음까지 밝아지듯이 진정 그 마음이 무상입니다.

법정 스님 또한 보시를 받았지만 길상사에서 하룻밤도 지내지 않았습니다.

무소유 정신은 보시의 정신과도 같습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있는 것은 없다’, 즉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은 ‘윤회’와 같은 말입니다.

윤회는 ‘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고정돼 있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윤회하는 것입니다.

윤회는 우리가 지은 업에 의해 변합니다.

법정 스님도 금생에 말빚을 내생에 가지고 가지 않겠다고 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무소유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것이라 하더라도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단지 업만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업을 잘 닦으려면 육바라밀을 실천해야 합니다.

육바라밀 가운데 첫째가 바로 보시입니다.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는 여성불자를 보살이라 칭하는데 보살의 진정한 뜻은 ‘남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남’은 다른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배우자를 시작으로 자식, 친척, 이웃, 사회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개인주의로 복을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사는 삶, 법정 스님을 ‘나의 거울’ 삼아 사회를 위해 비추십시오.

나를 넓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정 스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은 실질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특히 불교계는 더욱 심한데 큰스님들이 법문을 할 때는 늘 중국의 선조사들의 법문을 인용하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다르셨습니다.

우리 대중 곁에서 우리 식으로 법문을 하셨습니다.

법정 스님이 가장 좋아하신 책은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으로 신라 원효대사가 지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과 고려 지눌대사가 지은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고려 후기 야운대사가 지은 《자경문(自警文)》을 합본한 책입니다.

강원에서 배운 것이 대부분 중국 선조사들의 가르침입니다.

중국식 불교에서 탈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국의 조주 선사의 유명한 ‘뜰 앞에 잣나무’라는 오도송이 있는데 이 잣나무는 우리나라의 측백나무입니다.

격조 있는 불교만 생각하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불교를 해야 하겠습니다.

불자들은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무소유의 뜻을 바로 알고 자비를 베풀어 무량대복을 짓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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