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꽃이 피고

춘유백화추유월 春有百花秋有月

하유량풍동유설 夏有凉風冬有雪

약무한사괘심두 若無閑事掛心頭

변시인간호시절 便是人間好時節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엔 달이 밝네

여름엔 시원한 바람 겨울엔 흰 눈

부질없는 일로 가슴 졸이지 않으면

인간의 좋은 시절 바로 그것이라네

무문선사(無門禪師)의 이 시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하는 시이다. 다분히 인생을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유 있는 멋이 이 시속에 있다. 사계절의 운치를 바라보며 자연과 동화된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는 유흥에 도취되어 읊는 턱없는 풍월이 아니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문제들이 사라진 고요하고 밝은 심경이 될 때 세상은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아름답게만 보이는 법이다. 욕망에 허덕이고 불안 초조에 시달리는 범부의 번뇌심 속에서는 때로는 꽃이나 달이 순수한 제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꽃을 보니 오히려 슬퍼지고 달을 보니 오히려 원망스러워 지는 때가 있다는 말이다. 항상 주관과 객관의 대립에서 생기는 마찰 그것 때문에 울고 사는 인생이 아닌가. 하지만 도를 깨친 도인의 경지는 다르다. 관조(觀照) 속에 음미하는 세상의 모든 경계는 실상 그대로의 참모습일 뿐이다. 망념에 의해 오인되는 객관경계에 이런 저런 탓을 하다보면 기실은 나 자신이 무능하고 허무할 뿐이다. 세상을 바로 보는 안목. 인생을 바로 보는 안목이 열리면 소아적인 자기 집착을 벗으나 큰 자기에로 돌아가게 된다. 큰 자기 곧 대아(大我)가 되었을 때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무문 선사는 중국 송나라 때의 스님으로 본 법명은 혜개(慧開)이다.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을 지었는데 보통 줄여서 <무문관>이라 한다. 선문(禪門)의 어록(語錄) 가운데서 공안(公案) 48칙(則)을 가려 뽑아 송(頌)을 붙였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1년 10월 (11호)

시간의 잔고

내 인생의 시간 잔고(殘高)는 얼마나 될까. 나는 앞으로 이승에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모르긴 해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의 잔고는 아무도 모른다. 시간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 요즈음 장년층이나 노년층에서 즐겨 부르는 유행가에 ‘고장난 벽시계’(?)를 들은 적이 있다. 벽시계는 고장이 나서 멈추기도 하는데 이놈의 세월은 고장도 나지 않는다고.

중생은 자기에게 주어진 나머지 시간은 모르면서 통장의 예금 잔고는 부지런히 챙기고, 투자한 주식의 가치를 시시각각으로 확인하고, 자기 소유의 부동산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하는 재미로 산다. 쌩 떽쥐베리가 어린왕자의 입을 빌어 현대인들은 ‘꽃향기를 맡아본 적도 없고, 밤하늘의 별을 쳐다본 적도 없으며, 누구를 사랑해 본 적도 없이 단지 더하기(?) 밖에 할 줄 모른다’고 통렬히 꼬집은 의미가 이해될 듯도 하다. 삶의 어떤 의미보다도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고 이를 통해 쾌락을 맛보면서 사는 게 중생이라고 말이다.

얼마 전 ‘반야불교학당’에선 10개월에 만에 ‘지안(志安)’ 큰스님의 ‘원각경(圓覺經)’를 마치고 책거리가 있었다. 천성이 게으르고 아둔한데다가 졸음마저 겹쳐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머릿속에 남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스님께 부끄러운 마음뿐이었다. 그동안 무얼 배웠느냐고 묻는 아내의 질문에 답도 못하고 다시 첫 시간에 읽은 ‘원각경 해제’를 읽으면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단무명 현불성(斷無明顯佛性)”이라 하여 ‘무명의 정체를 밝히면서 무명을 끊는 방법을 설해놓은 경’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자성 가운데 미진수와 같은 청정공덕을 본래 갖추고 있는 바, 모두 청정한 원각을 원만히 비춤에 의해 무명을 영원히 끊고 불도를 이룬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생의 삶은 모두 ‘환(幻)’이요, 무명(無明)은 ‘공화(空花)’를 보는 것과 같으니 허망하게 생사윤회(生死輪廻)를 거듭한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어리석은 사람이 낯선 곳에 가서 동서남북의 방향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사대(四大)를 잘못 알아 자기의 몸이라 하고, 육진(六塵)의 그림자를 잘못 알아 자기의 마음이라 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신영복’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늘날처럼 문화와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에 첩첩산중(疊疊山中)의 산골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노인에게 ‘해가 어디서 떠서 어디로 지느냐’고 물으면 그는 당연히 ‘해는 산에서 떠서 산으로 진다’고 할 것이다. 또한 태평양 같은 큰 바다 가운데 있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그는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진다’고 할 것이다. 만주 벌판이나 미국 서부의 대평원(大平原) 한가운데서 평생을 살아온 농부에게 ‘해가 어디서 떠서 어디로 지느냐’고 물으면 그 역시 ‘해는 지평선에서 떠서 지평선으로 진다’고 할 것이다.

세 사람 다 자기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事實)’이다. 그러나 이들의 답은 ‘진리(眞理)’는 아니다. 이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은 모두 ‘환幻’이요, 이들의 삶은 ‘무명(無明)’ 그대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시간의 잔고는 여유가 없다. 무명의 정체를 밝히고 무명을 끊는 노력이 시급하다. 깨어있는 삶을 찾아 깨어있는 시간을 갖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가 수행하지 않으면 생사 속에서 항상 환화(幻化)에 묻혀 살 것이니 이 허환(虛幻)을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생의 나머지 시간을 ‘환幻’에서 깨어나는데 써보자. ‘무명(無明)’을 끊는데 전력투구하자.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1년 7월 128호

봄비가 가늘어 방울도 되지 않고

春雨細不滴(춘우세부적) 봄비가 가늘어 방울도 되지 않고

夜中微有聲(야중미유성) 밤중에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온다.

雪盡南溪漲(설진남계창) 눈 녹은 남쪽 시내 물이 불어났으니

草芽多少生(초아다소생) 새싹들도 많이 돋아났겠지.

봄밤에 가늘게 내리는 가랑비 소리를 희미하게 듣고 눈 녹은 시냇가에 돋아날 새싹들을 생각하는 시상이 무척 자연스럽다. 대지를 적셔주는 봄날의 밤비가 만물을 소생시키는 영양임을 이 시는 은연중 일깨워 준다.

이 시는 고려 말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지은 시이다.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고 불리기도 한 그는 대학자로서의 이름을 남겼지만, 여말의 어지러운 정치 현실 속에 임 향한 일편단심의 지조를 읊은 시조 단심가를 남겨 만고의 충신으로 이름을 남겼지만 선죽교에서 피살을 당하는 한을 남기고 생애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