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는 발전하는가

요즈음 서민들은 다들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경제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정부가 내놓은 처방이 잘 듣지 않는 모양이다. 며칠 전에 만난 외국 화장품 수입업을 하는 친구도 자기들의 주고객이 중 상류층인데도 상당히 영향이 있다고 한다. 이런 경제적 상황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나라 안은 온통 시위중이다. 쌀 개방을 반대하는 농민 단체들은 연일 과격한 모습을 보이고, 국가 보안법 폐지를 두고 여야의 연장선에서 불은 계속 번져간다. 과거 친일 행위자들을 가려내어 청산을 하겠다고 칼을 뽑아든 정부 여당에 야당 당수는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하겠다고 한다. 행정수도가 언제쯤 이전될지 모르지만 국론은 갈기갈기 찢어져 가고 있다. 어쩌면 집권층에서 국민을 이간질하고 싸움을 붙이는 것처럼 보인다. 조그만 반도국가가 남북으로 나뉜 것도 서러운데 그 안에서 또 분열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금 우리의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순환과 몰락을 향해 가고 있는가. 어떤 역사 학자들의 사상과 논리가 이 시대 우리 역사를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까. 19세기 전반을 살았던 독일의 철학자 헤겔(Hegel)은 변증법과 이성주의를 강조하였다. 세계를 현실과 이성의 일치라고 본 그는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인 변증법에 의하여 전개되는 세계를 이성적으로 추구하였다. 18세기 칸트(Kant)로 대표되는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중점을 두어 19세기 후반 이후 국가주의,역사주의의 길을 열었다고 생각된다. 현실이란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과정은 오히려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의 철학의 전체를 일관하는 방법이 모든 사물의 전개를 정(正), 반(反), 합(合)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이었으니 우리의 현대사도 그간의 ‘우향우(右向右)’ 편중에서, ‘좌향좌(左向左)’로 갔다가 언젠가 다시 ‘합(合)’의 단계인 ‘중도(中道)’로 돌아오면서 계속 발전할 것인가.

아니면 20세기를 살면서 역사의 발전에서 ‘순환과 몰락’을 강조한 영국의 토인비(Toynbee)의 주장을 따를 것인가. 그는 ‘역사의 연구’를 통해 문명의 발생에서 소멸까지의 과정을 5단계로 비교연구 하면서 문명의 발달과 몰락에는 규칙적인 주기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문명의 성장이란 문명을 선도하는 창조적 소수자가 그 문명이 직면한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역사를 경제적 영향력이 아닌 정신적 영향력에 의해 구체화된다고 하는 것을 믿는다면 지금의 우리 역사는 어려운 상황으로 가는 것인가.

과학을 비롯한 물질문명이 발전하여 생활이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편리해진 것과 인간의 행복을 향한 삶의 질이 향상된 것은 다르다. 물질보다는 정신문화에 바탕을 둔 종교나 철학, 예술의 바탕 위에 새로운 역사를 써야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국민이 불안하지 않게 이해와 설득이 이루어진 후에 모든 정책을 펴는 게 좋겠다. 우리의 역사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신념을 갖도록.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10월 제47호

올림픽유감

지금부터 102년 전 1896년 유서 깊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부활된 근대 올림픽의 이상은 ‘스포츠에 의한 인간의 완성과 교환을 통한 국제평화의 증진’이라 하겠다. 이 올림픽을 창시한 쿠베르탱은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이 세계 어느 곳에나 보급되어, 온 세계의 청년들이 진실로 평화를 사랑하며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육체의 기쁨, 미와 교양, 가정과 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근로’의 세 가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 걸었지만 인간의 완성은 물론 세계평화에의 기여 정신도 점차 퇴색하여 세계 제1.2차 대전으로 세 번이나 중단되기도 하였고, 최근에는 정치의 개입으로 테러가 일어나는가 하면 대회를 보이콧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지난 8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던 올림픽도 그 규모나 화려함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지만 곳곳에서 올림픽정신과는 거리가 먼 얼룩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작심하였다는 듯이 개최국 중국이 금메달 51개로 종합 1위를 하고 만년 1위를 하던 미국이 몰락(?)하고 말았다. 모두 204개 나라가 참가하였지만 동메달 하나라도 딴 나라는 87개국으로 절반 이상이 메달과는 인연이 멀었다. 매회 올림픽이 그랬듯이 어림잡아 상위 20~30개국의 잔치에 나머지 나라는 들러리를 서는 셈이다. 다행이 우리나라는 금 13, 은 10, 동 8개를 따서 종합 7위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잔칫집 분위기다. 말로는 가장 소중한 것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본래의 정신은 몰각한 채 다들 메달 따기에 총력전을 펼친다.

그러나 스포츠 특히 올림픽 경기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 같다. 그렇게 시끄럽던 국내정치도, 촛불집회도 TV뉴스에서 사라졌으니 말이다. 이러니까 위정자들이 스포츠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로비를 해서라도 좋은 성과를 올리려고 하는 건가. 사실 선진국을 여행하다 보면 가장 부러운 것이 마을 곳곳에 있는 잔디구장을 비롯한 생활체육 시설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시설 하나 변변히 없는 종목에서 메달이 나온다. 포상금 때문인지 병역면제 혜택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대단하다.

지난해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몬주익언덕에 서 있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황영조의 상을 보았고, 며칠 전 몬트리올에서 21회 올림픽에서 우리나라에 해방 후 첫 금메달을 안겨준 양정모 선수의 이름과 함께 태극기가 게양(금메달 획득 국가의 국기만 게양)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솔직히 반가웠던 게 사실이다. 올림픽 경기 결과가 그 나라의 국력을 평가하는 바로메터라고 생각하는지 나라마다 기를 쓰고 덤빈다. 하기야 1930년대 전후엔 노벨상이 그 나라의 국력과 문화의 척도인양 국가적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노벨상을 타기 위해 로비까지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제 문제는 금메달을 비롯한 메달 개수가 문제가 아니라 스포츠 인구의 저변확대와 생활체육의 활성화라 하겠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가장 스릴 있고 기억에 오래 남을 경기는 역시 야구일 것이다. 전승에 그것도 미국과 일본, 쿠바를 차례로 꺾고 우승하였으니 실로 대단한 일이요 엄청난 사건이라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니라고 본다. 가끔씩 TV로 스포츠 중계를 보면서 느낀 바다. 미국의 프로 야구ㆍ미식 축구ㆍNBA농구나 일본의 프로야구 경기 장면, 영국의 프리미어리그 등을 보면 경기장이나 선수들의 기량도 대단하지만 관중석이 빈곳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우리의 프로야구나 K리그 축구 경기장의 모습은 어떤가. 이런 여건에서 올림픽이나 각종 세계대회에서 상위성적이 나온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비록 세계적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할지라도 우리 국민들이 아름다운 스포츠정신 위에 건전한 정신, 건강한 육체를 갖추어 건강한 국가, 건전한 사회를 이루게 함이 옳지 않을까. 이제 우리의 국력도 어느 정도 세계 선진대열에 접어들었으니 선수 중심의 엘리트체육 정책을 지양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 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8년 9월 제9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