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링가의 음역. 고대 남인도에 있었던 나라 이름. ⇒ 갈릉가국( 陵伽國).
[월:] 2016년 01월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지 않는 새해가 되길
경인(庚寅)년의 해가 저물고 신묘(辛卯)년의 해가 밝았다. 어수선한 연말의 분위기는 대부분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새해로 이월되어 황사 탓인지 스모그 탓인지 우울한 정가의 분위기 탓인지 날씨마저 시무룩하다. 올해 예산도 관례(?)대로 법정 시한을 넘기고 난투극(활극)을 거쳐 확정되었지만 템플스테이 예산 등 약속된 예산을 빠뜨리고 누더기가 되어 나왔다.
애써 지난해 나라 안의 밝은 모습을 찾아보지만 ‘G20정상회의’와 ‘광저우 아시안 게임’ 정도라고나 할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몇 가지만 들어본다면 ‘4대강 사업, 천안함 사건, 총리실 민간인 불법 사찰, 권력형 비리, 세종시 사건, 한미 FTA, 연평도 사건’ 등이 생각난다. 대개가 폐쇄적인 국정 운영이나 절차를 무시하고 밀어붙이기식으로 처리했거나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 사건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정치의 모습이 연말에 ‘교수신문’이 선정한 사자성어에서 ‘장두노미(藏頭露尾)’로 나타난 것 같다. 여러 사건과 의혹들이 있었지만 제기된 의혹의 어느 하나도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았다. 문제와 의혹을 감추고 진실을 규명하지 않은 정부의 태도를 비유한 글귀다. ‘장두노미(藏頭露尾)’의 뜻인즉 ‘머리는 숨겼지만 꼬리는 숨기지 못하고 드러낸 모습’을 가리킨다.
머리가 썩 좋지 않은 타조는 쫓기면 머리를 덤불 속에 처박고서 꼬리는 미처 다 숨기지 못한 채 쩔쩔맨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행여 드러난 꼬리를 붙들고서 몸통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이 있으면 곧 국가가 나서서 의혹을 차단하고 무마하는 데만 급급할 뿐 사태의 진실을 밝히는 데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모체는 구성원들의 의사를 수렴하고 처리하는 절차와 과정을 중시하는데 있다. 물론 진실과 정의를 바탕으로 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처럼 예산안의 처리나 의혹만 증폭시킨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정치인들이 무엇보다 앞서 ‘법’을 지켜주길 바랄 뿐이다. 법이나 제도가 만들어지기 전에 무엇을 근거로 사업이 시행되고 예산이 집행될 수 있는가. 특히 국회의원의 경우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차라리 만들지 않는 것이 낫지 않는가. 법을 만드는 사람은 법을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법을 지킬 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다음으로 정치인에 대한 걱정은 폭력문제다. 정치인들이 국회 안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죄가 성립되지 않고, 일반 국민들의 사소한 폭력은 엄격히 처벌받아야 한다면 누가 법을 신뢰하고 정치인을 믿겠는가. 이유인즉 ‘날치기를 하려고’ 폭력을 행사하고, ‘날치기를 막으려고’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상대 쪽에서 원인 제공을 하여 어쩔 수 없이 폭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거기다가 더 안타까운 것은 국회의원 보좌관들의 동원이다. 폭력사태의 조연으로 동원되는 이들이 딱해 보이지 않던가. 이들이 국회의원들로부터 무엇을 배우겠는가. 제발 새해엔 폭력 없는 민의의 전당이 되어주길 바란다.
다음으로 국회와 정치인들은 국내외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를 통해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갈등과 충돌의 난맥상만 보여 왔다. 민주 사회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갖고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면서 국가와 국민의 이익이 무엇인지 따져서 합의를 찾으려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바꾸어 말하면 합의를 도출해내는 정치력을 말한다. 현재의 정치구도로 본다면 국민이 여당에게 절대 다수의석을 할애하여 주었고, 거기다 제3당이라 할 수 있는 정당이 보수 성향을 띠고 있으니 웬만큼 정치력만 발휘한다면 국회 내에서 합의 도출은 어렵지 않으리라 본다.
이제 우리나라도 민주주의 정치 제도를 시행한지 60년이 지났다. 지난 10년간의 각종 선거 결과를 종합해 보면 우리 국민들의 정치의식은 우리의 국격에 걸맞게 향상되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 정치는 아직도 아쉬움이 많다. 정말 새해엔 우리 국민들이 정치를 걱정하지 않게 되길 바란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1월 122호
마음의 벽을 허물어라
며칠 전 나는 어느 신도님의 자제분 결혼식에 참석해 주례를 서 준 일이 있다. 신랑 되는 사람의 어머니가 두어 달 전부터 주례부탁을 해와 약속을 해 놓고 날 잡히기를 기다렸다가 축하를 하는 뜻에서 주례를 섰다. 작년에 신랑의 아버지가 작고하여 심심한 애도를 표한 바 있는 집안인데 고인이 된 아버지와는 불교를 통해 깊은 인연이 있는 사이였다.
내가 예식장에서 신랑 신부를 앞에 세워 놓고 간단한 주례사를 했는데 그 요지는 결혼을 하여 부부인연을 맺은 이상 서로의 마음에 벽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과 마음을 통하게 하여 평생토록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말이었다. 부부일심동체라는 말은 예로부터 자주해 온 말이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각자의 개성이 강한 탓인지 부부사이에도 일심동체는 이루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 예로 우리나라에서 부부가 결혼을 했다가 헤어지는 이혼율이 미국 다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대수로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뜻이 안 맞는 사람 사이에는 가슴에 벽이 가로 막혀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람의 행복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 사이에 있다. 다시 말해 마음과 마음이 통해지는 정신적 소통공간이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상대가 없는 내 혼자만의 마음에는 행복이 들어오지 않는다. 사실 인간은 혼자일 때 항상 고독하고 외로움의 슬픔이 그림자처럼 따른다. 다만 고도의 명상세계에서 자기의 정체를 찾는 공부에 있어서는 주객을 초월해 버리므로 행과 불행을 다 함께 뛰어넘는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의 일상적 생활감정은 마음이 통하지 않을 때 답답해지며 불우해지기 시작한다.
이 세상의 모든 불화는 마음과 마음의 사이가 좋지 않은 데서 조성된다. 또 불화란 개개인의 비위가 서로 상하는 데서 시작되는데 비위가 상하는 원인은 나와 상대의 감정적 충돌 때문이긴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자신의 마음 조절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감정을 나쁘게 가지는 것은 내 마음의 조절문제이지 결코 남의 탓이라고만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기분을 나쁘게 하는 상대방의 그릇된 처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하는 내 마음의 여유 있는 너그러움이 있다면 감정의 상처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겨울철에 감기에 걸린 사람이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부주의로 감기가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감기의 병원체인 바이러스 등에 증오를 품지 않는 것처럼 사람 사이의 감정마찰도 남에게 탓을 하지 않고 내 자신의 부주의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모든 일에 주의를 요한다. 그것은 차를 모는 사람이 운전주의를 해야 하는 것과 같이 때로는 세상을 살면서 주의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생활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사이가 나쁜 사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가정에서 같이 사는 가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잘못 말해진 실언이 될 때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이가 나빠지고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믿음이 무너지면 서로를 가로막는 벽이 생기게 된다. 말 한마디에도 독화살에 묻은 독과 같은 것이 있다. 남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말 한마디의 독이 평생토록 상처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히 있다. 육신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잘 낫지 않는다. 누구나 겪는 생존의 상처가 있지만 남으로부터 침해당하는 상처는 견디기 어려운 분노와 원망을 유발하여 자타의 인격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기준이 있다. 그른가 옳은가 하는 시비의 기준과 이익이냐 손해냐 하는 손익의 기준이다. 사람들은 곧잘 남의 그름을 지적하고 흉보기는 잘해도 자신의 그름은 잘 보지 못한다. 시비의 기준을 남에게만 적용하고 자신에게는 잘 적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면에 남에게 이익이 되건 손해가 되건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의 손익만 따지는 이기적 편견을 가지고 산다. 이러한 불공정한 마음 때문에 사람사이에 금이 가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협동되는 인간유대가 좋은 사회를 이루는 근본인 것이 분명함에도 우리 사회는 계층 간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해 골이 파이고 벽이 쌓이는 불행한 면들이 노출되고 있다. 나와 남을 같이 보는 공동의 입장에 서서 자리이타를 똑같이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2월 제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