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섭불(迦葉佛)

카쉬야파 붓다의 음역. 부처의 이름. 현겁(賢劫) 천불(千佛) 중 제3불. 과거 7불 중 제6불. 석가모 니가 출세하기 전, 인간의 수명이 2만 세였을 때, 바라내성의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성은 가 섭, 아버지는 범덕(梵德), 어머니는 재주(財主)였다. 출가하여 니구루다수(尼拘樓陀樹) 아래서 깨 달음을 얻었으며, 제자의 수는 2만 명이었다. 음광불(飮光佛).

더없는 행복

교단 생활 자체가 항상 보람과 아쉬움으로 점철되는 일상이지만 요즈음 들어 새로운 안타까움이 있다면 학생들의 생활기록부에 기재된 아버지와 자녀의 성(姓)이 다른 학생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이혼을 하고 자녀 양육은 어머니가 맡아서 하다가 다시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한 경우와,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자녀를 키우며 살다가 재혼한 경우다. 이런 경우 자녀는 새 아버지(계부)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기 친아버지의 성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현행법으로는 성을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아니 내 좁은 소견으로는 앞으로도 영원히 성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은 ‘피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죽어 이별하는 경우야 그만두고라도, 부부가 혼인예식을 치를 때 서약한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중도에 파경에 이르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한 가정의 파괴는 인생의 실패로 연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직은 전통적 관념이 크게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어쩌면 사회적 성공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도 있다. 그만큼 가정의 평화와 행복은 소중한 것이며,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은 이 더 없는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리라.

나의 지인 중 한 남자는 세칭 명문대학 인기학과를 졸업하고 언론사에 입사하여 중견간부를 지내고 지금은 쉬고 있고, 그의 부인은 지역 문화예술계의 유명 인사다. 내외가 금슬도 좋고 자녀들도 잘 키워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이 친구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를 소개하는 사람이 ‘OOO씨의 남편’이라면 버럭 화를 낸다. ‘내 아내가 OOO이지 내가 왜 OOO의 남편이냐’하는 것이다. 또 한 친구는 지역에서 문단활동과 함께 자타가 공인하는 페미니스트다. 한때는 이름을 쓸 때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같이 쓰고 자기 이름을 쓰곤 했다. 이 친구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OOO의 아내다’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곁에서 듣기가 민망할 정도다. 소개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남편이나 아내 등 가까운 사람을 매개로 하는데 왜 꼭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따지는지 모를 일이다. 누구의 남편이면 어떻고 누구의 아내면 어떤가.

부처님께서도 인생에서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 더 없는 행복’이라고 설하지 않으셨던가. ‘육방예경(六方禮經)’에 따르면 ‘남편은 아내를 존중해야 하고 예의로써 대해야 한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에게 충실해야 하며, 아내로서의 위치와 안락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또한 아내에게 의복과 보석을 선사하여 즐겁게 해 주어야 한다. 반대로 아내는 가사를 감독하고 돌보며, 손님ㆍ내방객ㆍ친구ㆍ친척 및 고용원 등을 잘 접대하여야 하며,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충실하여야 하며, 남편의 수입을 보호해야 하고, 모든 활동에서 현명하고 활기차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시대와 사회 상황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부부는 다같이 호혜적이고 평등하여야 하며, 서로를 위해 상호보완의 내조와 외조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위하고 가정을 위하고 나아가 사회와 인류를 위하는 ‘더 없는 행복의 길’이 아닐까.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2년 9월 (제22호)

대학이 뭐길래

연일 뉴스의 첫머리는 대입수능 부정 사건이 장식한다. 자고 나면 가담자가 늘고, 제2․제3의 사건이 드러난다. 도대체 이 사건의 파장이 언제까지 어느 규모까지 확산될지 모르겠다. 오늘도 교육일선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내신은 물론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단 한 문제, 단 1점이라도 더 맞추고 성적을 올리려고 선생님들을 독려하고 학생들을 닦달하고 있는 교장의 입장에서는 그 자괴감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11월 17일. 수능 고사장으로 되어 있는 우리학교에서도 25개 고사실에서 685명의 여자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는데 시험관리에 종사하는 사람은 우리 교직원과 다른 학교에서 온 선생님들과 경찰관을 포함해서 모두 109명이었다. 종사자들은 40페이지 분량의 ‘감독관 유의사항’만 받았지 전파차단기나 금속탐지기 등은 지급 받지 못했고, 수험생의 몸수색을 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지 못했다. 다행이(?) 우리 고사장에서는 부정행위자가 아직은 적발되지 않았다.

요즈음 신세대들이 기성세대를 압도하는 것들이 많겠지만 그 대표적인 것이 정보통신기술일 것이다. 이번 수능 부정행위에서도 신세대들은 기성세대 감독교사들을 업신여기고 비웃기라도 하듯이 읍소하고 각서를 쓰고서도 자기들의 계획대로 하고야 말았다. 정보통신의 강국답게, 그 강대국의 신세대다운 면모를 ‘디지탈 부정행위’를, 그것도 ‘007작전이 무색할 정도의 작전’으로 해 내었다. 물론 ‘아날로그식 감독관 유의사항’으로는 부정행위를 적발하지 못했다. 아니 제자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유의사항’보다 좀 느슨하게 감독을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후면 학생, 학부모는 물론 교육청 관계자, 고사장 관계자, 감독관들이 줄줄이 문책을 받을 것이다. 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모교에서도 책임 공방은 이어질 것이고, 수능을 총괄하는 교육부와 평가원 관계자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는 내년을 대비해서 관리대책과 철저한 감독 방법이 강구될 것이다. 전파를 차단하고 금속탐지기도 등장할지 모른다. 부정행위자는 아마 영원히 대학에 가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게 아니다. 수능시험 관리상의 문제로 축소․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단순히 수능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 그 자체의 문제로 접근하고 해결법을 찾아야 한다. 왜 교육부는 이 ‘수능’이란 제도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대학들이 학생 선발권을 돌려 달라고 그렇게 아우성인데 무엇 때문에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가.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들이 교육시킬 학생을 선발하게 해 주어야 한다. 물론 부정이나 잘못이 있을 때는 제재하면 되지 않는가.

보다 근본적인 것은 교육에서 양심과 원칙을 소중히 여기고 실천하는 환경을 학교나 가정, 사회에서 만들어 주고 기성세대가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번 사건에 “나는 책임이 없다”고 할 사람이 있는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통렬한 자성이 필요하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겠지만 지식이나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도덕성이 그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요체다. 교육의 우선순위를 어디에다 두어야 할 것인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12월 제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