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는 말을 해야

최근 우리사회는 신자유주의의 발호로 전 세계적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면서 사회생태계의 파괴가 심해지고 있다. IMF관리체제 이후 우리경제는 도산과 부도,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의 격랑 속에 빠져들어 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생태계 파괴의 희생자가 되었고, 상당수가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보다 앞선 산업화의 과정에서 이미 파괴될 대로 파괴된 자연생태계와 더불어 우리는 숱한 모순과 대립, 갈등과 어긋남, 착각과 혼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흔히들 지난 몇 해를 변화와 개혁의 해라고 부르지만 해가 바뀌어 새 세기에 들어선 올해도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얼마나 더한 어려움을 겪을지 우리 모두는 불안과 두려움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어느 한사람도 원하지 않는 이 어려움들이 자동 이월된 이 시점에서 우리의 화두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옛말에 “일언부중(一言不中)이면 천어무용(千語無用)”이라 했다. 한 마디 말이 맞지 아니하면 천 마디 말이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믿을 수 없는 말 한마디 때문에 뒤에 하는 숱한 말이 다 소용이 없다는 의미다.

사람(人)의 말(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信)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 문제는 비단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 오고 가는 말들을 서로가 얼마나 믿어주는가가 문제다.

이즈음의 우리 주변 이야기를 보자. 여당의 말을 야당이 믿는가. 야당의 말을 여당이 믿는가.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국민이 믿는가. 금년 하반기부터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적인 정부 발표를 누가 믿는가. 낙동강의 수질이 좋아졌다는 발표를 누가 믿는가. 공적자금 134조가 제대로 집행되었다는 발표를 믿는 백성이 있는가. 달마다 발표하는 실업자 수의 정부통계를 그대로 믿는가. 믿는 사람보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적어도 이 말들이 진실이라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說得力〕이 있을 것이고, 이 힘은 믿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아무리 어눌한 말이라도 진실을 표현하고자 할 때에는 호소력을 갖지만, 위선이 포장된 달변은 결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가끔씩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내용 중에 기업의 부도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언뜻 들으면 이제 기업들의 자금사정이 나아지고 경기의 회복조짐이 있는가보다 생각하다가도 정말 실소를 금치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IMF이후 3년여 동안에 넘어지고 쓰러지고 부도날 기업은 다 정리되었는데 지금 와서 부도율이 높아질 까닭이 있는가. 정말 믿을 수 있는 말이 아쉽다.

다시 밑바닥으로, 처음으로, 기본으로 돌아가서 서로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자. 아내와 남편이 서로 믿어야 해체되어가는 가정이 복원되고, 이웃과 사회가 믿음으로 이어져야 밝고 정의로운 사회가 형성된다. 근로자와 고용주가 서로를 신뢰해야 산업평화가 오고, 인간의 양심에 바탕을 두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착취를 불식시킨 연후에야 생태계가 평화를 누릴 것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정치인들에게 우리의 고귀한 생명과 재산을 맡길 수 있겠는가

믿음을 줄 수 있는 말을 하자.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를 회복하자. 옛 성인의 말씀에도 믿음은 보시(布施)되어 나타나 마음에 인색함이 없게 하며, 믿음은 능히 지혜의 공덕을 증장(增長)시키며, 믿음은 힘이 견고하여 파괴하지 못하며, 믿음은 능히 번뇌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버린다고 했다. 조그만 이익에 얽매여 자신을 속이게 된다. 자신에게 좀더 철저히 솔직해 보자. 거짓말을 하지말고 믿을 수 있는 말을 하자.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1년 5월 (제6호)

물은 덕(德)을 지녔는가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며, 아무리 더러운 곳에라도 있기를 꺼려하지 않고, 누구와도 다투려하지 않으니 [利物, 處惡, 不爭], 이 덕(德)으로서 성인덕성聖人德性의 묘한 뜻을 비유하여 취한 것이라고 ‘탄허’ 스님께서는 노자(老子) 도덕경의 ‘약수장(若水章)’에 주를 다셨다.

진실로 물의 덕이 다른 사물과 다투지 않는 것은 천지자연의 도를 얻은 것이요, 주야에 그치지 않는 것은 대도불식(大道不息)의 틀을 운용함이니, 크게 하늘과 땅, 삼라만상을 윤택하게 하여 생명이 길이길이 이어지게 한다고 하였다. 물같이 남을 위하고, 물같이 낮은 곳에 위치하여 자기를 낮추어 겸손하고, 물같이 무리하지 아니하여 순리를 따라 산다면 이게 바로 성인의 삶이고 성인의 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올해 여름을 지나면서 이렇게 물의 덕을 노래하고 믿는 사람은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 것 같다. 기상청에서 밝힌 자료로는 지난 6월부터 근 3개월간 우리나라에는 하루걸러 비가 왔고, 일조량도 예년의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디자인 서울’의 자랑스러운 얼굴인 광화문 광장은 지난해에 이어 또 물바다가 되었고, 대한민국의 최대 번화가이자 부(富)와 멋의 상징인 서울 강남의 중심가가 수도(首都)가 아닌 수도(水道)가 되었으니 가히 ‘물먹은 서울’이 되었다. 우리 서울의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힌 여름이었다. 서울이 이 정도니 변두리 지역이나 시골은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 여름의 폭우 사태를 두고 또 책임 공방이 한동안 있을 것 같다. 두말할 것 없이 인재(人災)라고 큰소리치는 사람과, 예기치 못할 정도의 기상이변이라 어쩔 수 없는 천재(天災)라고 우기기도 한다. 별수 없이 또 판사가 법정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어야 끝이 날 것이다. 이 공방의 내용은 뻔하다.

자연을 몸살 나게 하고 개발과 돈벌이에 눈이 먼 인간의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물꼬를 막고, 물길을 돌리고, 비용을 아끼려고 직강공사를 하여 물 흐름의 속도를 붙여주는 등 자연을 지배 정복하려는 무지한 인간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오만을 보다 못한 자연이 경고를 한 것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무지를 무조건 탓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아무리 애써도 인간이 채 발견하지 못한 자연계의 법칙이 얼마나 많겠는가. 현재의 자연과학 수준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이변(異變)’이라 한다. 그러나 이변이 계속되면 이 현상은 ‘이변’이 아닌 ‘뉴 노멀(New Normal)’이 되고, ‘새로운 법칙(Rule)’이 될 것이다.

얼마 전 다녀온 ‘노르웨이’에서의 일이다. 여름에 비가 오지 않는데도 강물이 불어나고 있었다. 쌓였던 눈이 여름이 되어 기온이 오르니 녹아내리는 것이다. 해발 2천m 고지에서는 만년설이 그대로 있고, 1천m 전후의 고원에서는 눈이 녹아 내려 호수가 되고, 강을 이루고, 폭포가 되어 장관을 이룬다. 오래 머무르지 않았지만 내 기억에 남아있는 노르웨이는 ‘산과 물과 호수, 만년설과 피요르드’ 뿐이다. 이 나라는 인위적 개발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 여름엔 폭우가 내려 도로가 끊어져서 임시 우회도로를 이용한 적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선인들의 가르침대로 물의 ‘덕(德)’만을 되뇌이고 있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간 물에게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이런 피해를 자초하였다고만 말할 수 있는가. 가난하지만 하늘만 바라보고 착하게 살아온 농사꾼들, 어쩔 수 없이 큰 바다에 가랑잎 같은 작은 배로 연명해가는 어부들, 산기슭이나 계곡 가에서 그나마 한 계절 장사로 1년을 먹고 살아야 하는 장사꾼들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날벼락을 맞아야 하는가. 그것도 매년 연중행사처럼 말이다. 어쩌면 가난과 무지가 화를 부른 장본인이 아닐까.

인간을 두고 선량하게 태어났다느니, 악하게 태어났다느니 하지만 물 또한 선善과 악(惡)의 양면성을 가진 게 분명한 것 같다. 노자(老子)의 표현대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것을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건마는 능히 행하질 못하는구나(弱之勝强,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라고 한 물의 본성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현실의 너무 큰 희생은 얼른 수긍이 가질 않는다. 물의 무서움, 자연의 위대함 앞에 인간이 좀 더 겸허해져야함을 일깨워준 여름이기도 하였지만, 더 이상 가난하고 약한 양민들에게 힘자랑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1년 9월 1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