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의 소망

나는 내가 스스로 못나고 무능하여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도, 가정환경도, 신체적인 조건도, 정신적인 지능도 보통의 범주를 넘어선 조건이라곤 어느 하나도 없다고 믿었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항상 보통정도의 사람이라도 되어 보려고 애써왔다. 그런데 나이 오십 고개를 넘어서야 겨우 이 보통 사람이 되기도 무척이나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 우둔함을 또 어떻게 탓하랴. 옛 성인께서는 천명을 아셨다고 할 나이에 겨우 보통사람이 되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 정도니.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바라던 바의 보통사람이란 어쩌면 특별한 사람보다 더 되기 힘드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것은 더욱 아니다.

늘상 공부를 하면서도 진리를 추구하여 학문의 대가가 된다든지, 전공분야에서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위자가 된다든지 하는 따위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한 대학자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깊은 진리와 사상이 담긴 책을 읽으면서 사는 여유와 보람을 맛보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스스로의 인격 속에 용해된 참뜻을 후배들에게 사랑과 정열을 다해 전해준다면 그에 더 바랄게 없다고 믿었다.

도덕적으로도 보통사람은 성인, 군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종교적으로 지고의 선을 추구하여 이름 높은 고승이 된다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독실한 교역자가 된다든지 하는 꿈은 꾸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도덕적으로 인격의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애쓰는, 스스로에 대한 성실을 바탕으로 부단히 자아를 성찰하고 남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그런 사람을 꿈꾸어 왔다.

또한 보통사람은 평범한 생활 속에서 예술을 즐기고 싶어한다. 문학이나 회화나 음악의 대가가 되기보다는 전시장에서 공연장에서 또는 작품 속에서 그들이 연출해 낸 아름다움을 만끽하는가 하면 평범한 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즐기고 싶은 것이다. 아니면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어 그 인기를 세계에 떨치는 것보다는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과 더불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그런 아마츄어를 동경하면서 사는 것에 만족한다.

이런 보통사람이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을 향한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어떨까. 먼저 보통사람은 세상이 선진화한답시고 너무 빨리 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의식이, 생활이 따라갈 수가 없으니 말이다. 생활이 편리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바 아니다. 다만 분수에 맞는 성장과 변화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전기밥솥도 아직 쓸만하고, 선풍기도 괜찮고, 냉장고도 쓸만하다. 아직은 텔레비전과 세탁기도 버릴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너무 빠른 속도로 새로운 유형의 제품이 쏟아져 나온다. 보다 편리한, 보다 안전한, 보다 경제적인 조건으로 말이다.

보통사람들에겐 세상이 좀 천천히 변하고 선진화했으면 좋겠다. 모든 매스컴들이 온통 고도성장의 노예나 된 것처럼 요란스러웠다. 경제적인 급성장만이 우리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는데 결과는 의외였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가시적인 빠른 변화가 결국은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우린 알게 되었고, 빠른 선진화만큼 부작용이 도처에서 나타나는걸 확인했다.

다음으로 보통사람은 승부나 경쟁에서 케이오승이나 폴승, 한판승 등 완승이나 완봉승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판정승에 족할 따름이다. 인생에서 승부나 경쟁을 없앨 수 없는 것은 더불어 살지 않고 혼자 살수 없는 것과 같다. 더불어 살면서 경쟁에서의 승리와 인간적인 삶을 같이 누려야 함에 문제가 있다.

더불어 살고 다같이 살아야 그것도 잘살아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지배자와 피지배자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도 다같이 고용주와 피고용인도 잘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이들의 관계는 항시 대립적이거나 상대적인 관계로 인식되어 왔고 이따 금씩 갈등과 충돌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양자의 관계에서 보통사람은 어느 한쪽의 힘이 터무니없이 강하거나 약하지 않기를 바란다. 어쩌면 이기고 짐이 없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 힘이 조화를 이룸이 좋다. 그러나 이런 이상적인 요구가 이루어지기 힘들다면 51대49의 판정승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완승이란 승자에게야 더할 나위 없는 성취감과 희열감을 주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기 과신의 교만함이 그를 지배하여 패자를 업신여기거나 아예 두 번 다시 일어나지도 못하도록 더욱 짓밟아 버리는 태도를 갖기 쉽다. 패자 또한 자기 비하와 열등의식으로 삶에의 의욕을 잃고 좌절의 늪에 빠져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인간사회의 경쟁은 판정승과 판정패로 끝났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더불어 살 수 있을 테니까.

보통사람은 많이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 물질의 풍요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조건은 되지만 충분한 조건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소유하면 이제 그만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의 소유욕은 무한하다. 아흔 아홉 섬을 추수한 사람이 이웃의 단 한 섬을 추수한 사람더러 백 섬을 채우기 위해 그 한 섬을 달라고 하지 않는가. 보통사람은 적게 소유해도 좋으니 얼마나 많이 갖느냐 보다는 어떤 과정을 거쳐 모으느냐에 더 관심을 둔다. 축재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보통사람은 더불어 살기를 바란다. 독불장군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기도 바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남에게 뒤쳐지는 것도 결코 바라지 않는다.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데 어울려서 우리라는 말을 더 즐겨 쓴다. 그러기에 우리들 중에 누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소리 없이 자비심으로 도우며 산다.

보통사람은 스스로의 몸과 입과 뜻이 깨끗하길 바란다. 몸이 깨끗하여 나쁜 짓을 삼가며 입이 깨끗하여 남을 속이는 말이나 이간질하고, 폭언하고, 식언하지 않는다. 뜻이 깨끗하여 망상과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보통사람은 낙슨 일을 당하든지 고요히 하며 요란스럽지 않고 태연자약해 지는 것을 원한다.

또한 보통사람은 성인의 말씀을 믿고 따른다. 분명한 것은 여래의 지혜는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고 보통사람(중생)도 여래의 지혜를 갖추지 아니함이 없다는 말씀을 믿고 따를 뿐이다.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0년 1 2월 (창간호)

김형춘님은 창원전문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지금은 창원문성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다. 반야거사회 회장이다.

쓰레기더미 속에서도 꽃은 핀다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꽃이 피듯이 버려진 쓰레기처럼 눈먼 중생들 속에 있으면서도 깨달음의 길을 가는 사람은 지혜의 꽃을 찬란하게 피운다.

어두운 밤에 등불을 들고 세상을 비추는 자 그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지혜로써 살고 지혜로써 죽는다. 삶과 죽음의 덧없는 세계에서 범부들은 이리저리 방황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나고 죽음을 벗어나 꽃의 향기처럼 지혜를 풍기며 깨달음의 길을 묵묵히 간다.

『법구경』에 나오는 이 말은 수행자의 정신을 꽃에 비유하고 등불에 비유하여 읊어 놓은 말이다. 세상의 혼탁이 쓰레기 더미 같다하여도 그 더미 속에서 꽃이 핀다는 말은 상징성이 매우 높게 들린다. 꽃처럼 향기롭게 살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는 이 법문이 새삼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해 주는 청량제처럼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점점 오염된 분위기가 가중돼 청정에 대한 향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이 지구촌의 환경이 매우 불우하다. 평화롭게 사는 온화한 모습보다는 사람들의 패싸움이 너무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국제적인 세계 전체의 사정이나 나라 안의 사정이나 정말 안녕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사바세계를 고해라고 하는 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세상의 속성이 으레 그런 것이라고 보고 말면 그뿐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있어야 하고 우리들 마음을 맑게 해 주는 희망적인 이상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푸른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한다. 먼지 낀 땅이 비록 우리들 삶의 현장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보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그런데도 요즈음 “당신은 하루에 한번이라도 하늘을 쳐다보고 사느냐?”하고 물어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 말은 정신적으로 맑은 심성의 공간을 폐쇄해 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사는 것이 무엇인가? 이 원초적 물음을 때로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던져 보아야 한다.

서양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생이란 결국 무덤으로 가는 행진’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범속한 세속경계에서 너무 숨막히는 생활에 빠져 마음의 여유와 지혜를 상실해 가는 것이 현대인의 비극이다. 찾아야 할 돌파구는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어 지혜로운 용심을 하는데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방안에 날아 들어온 벌이 열려 있는 문을 찾지 못하고 닫힌 창에 몸을 부딪치는 어리석음과 같은 신세가 되어 버린다.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로에 지친 자에게 갈 길이 멀 듯이 어리석은 자에게는 나고 죽는 생사의 길이 멀다. 바른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법에 대한 향수, 진리에 대한 동경을 가진다. 타향살이하는 사람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처럼 영혼의 눈을 뜨는 사람에겐 영혼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을 발심하여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시그널이다. 이 길을 가서 생사의 강물을 건넌다.

끝없이 윤회하는 업보의 무게를 벗어버리고 한 줄기 빛이 되고 향기가 되어 물이 끓어 수증기가 되듯 승화해 가는 곳이 부처님의 세계다. 아우렐리우스도 이렇게 말했다. “하루하루를 자신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여 흔들림없이 최선을 다해 살라. 그것이 바로 그대의 인격에 어울리는 것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 오히려 삶의 의미가 더 깊어지는 법이다.

지안스님 글 / 월간반야 2003년11월 (제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