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근본교리 (3)

2) 집성제(集聖諦)

집(集)이란 초집생기(招集生起)의 뜻을 줄여서 하는 말로 불러모아 생기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범어 사무다야(samudaya)를 번역한 말인데 어떤 결과를 발생케 하는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현실이 결과적으로 괴로움이라고 정의된다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집성제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번뇌(煩惱)라 하며 이 번뇌는 곧 인간의 욕망과 함께 혼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번뇌가 일어나면 이것이 욕망화(慾望化) 됩니다. 번뇌가 욕망으로 되어 이것이 인간을 지배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욕망은 인생을 이끌어 가는 동력이며, 또한 산다는 것은 욕망을 구체화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욕망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다는 것도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번뇌 가운데서도 가장 세력이 강한 것이 삼독(三毒)이라 일컫는 탐(貪:욕심)·진(瞋: 성냄)·치(痴: 어리석음)입니다. 일반 범부들의 마음속에는 이 삼독이 들어 있다 합니다. 생각으로 짓는 세 가지 나쁜 행위라 하여 의삼업(意三業)이라 하기도 합니다. 생각도 행위로 간주하는 것이 불교의 업(業:karma)의 이론입니다. 이 삼독에 만(慢:아만)· 의(疑:의심)의 두 가지가 더해져 다섯 가지 둔한 성질을 가진 번뇌라 하여 오둔사(五鈍使)라는 용어를 씁니다. 이 오둔사는 성질이 둔하여 끊기가 어려운 번뇌입니다. 이와는 달리 예리한 성질을 가진 번뇌도 있습니다. 오리사(五利使)라 부르는 이 번뇌는 신견(身見)·변견(邊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인데 지적인 소견을 잘못 가진 경우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통칭 악견(惡見)이라고도 합니다. 신견이란 무아(無我)의 이치를 모르고 나와 나의 것이 있다고 고집하여 집착을 가지는 견해를 말합니다.

변견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어느 한쪽에 치우친 소견으로 실상의 이치를 미혹한 탓에 무조건 긍정하거나 무조건 부정해 버리는 소견입니다. 사견은 올바르지 못한 부정한 소견이며, 견취견은 옳지 못한 것을 옳다고 고집하는 소견입니다. 그리고 계금취견은 수행자들이 계행을 닦으면서 옳지 못한 계행을 닦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비윤리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이라 잘못 아는 소견입니다. 이 오리사는 지적인 번뇌이므로 바른 정견을 얻으면 쉽게 끊을 수 있으나 앞에서 설명한 오둔사는 정적인 번뇌라 끊기가 힘든 번뇌라 합니다. 이 오둔사와 오리사를 합하면 열 가지가 되는데 이를 근본번뇌라 합니다 번뇌가 중생들의 마음을 마음대로 부린다 사(使)라고 합니다.

번뇌는 그 어원이 범어 klesa인데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정신작용을 뜻하는 말입니다. 마음이 맑고 깨끗하지 못한 상태를 번뇌라 한다는 것입니다. 구름이 끼이면 하늘이 흐리듯이 번뇌가 일어나면 마음이 본래의 청정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마음은 번뇌에 물들어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번뇌의 존재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번뇌를 소멸시켜 가는 것이 불교 수행의 요체입니다. 그러면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는가? 108번뇌설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생활의 보고 듣는 환경 속에서 일으키는 생각이 모두 번뇌라고 설명합니다. 육근(六根: 眼·耳·鼻·舌·身·意)이 육진(六塵: 色·聲·香·味·觸·法)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이 여섯 갈래로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우선 보고 듣는 객관 경계에 대하여 호(好:좋다)·오(惡:나쁘다)·평등(平等: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의 분별을 하며 다시 고(苦:괴롭다)·낙(樂:즐겁다.)·사(捨: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의 감정을 일으켜 6×6의 36가지가 되며 이에 다시 일념이 지니는 과거·현재·미래 삼세(三世)의 시간이 곱해져 108가지의 번뇌가 산출된다 합니다. 이러한 번뇌가 괴로움을 유발하는 원인이므로 번뇌를 없애면 괴로움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3) 멸성제(滅聖諦)

멸성제의 멸은 번뇌가 소멸되어 없어진 상태로 곧 열반을 뜻하는 말입니다. 번뇌가 소멸되면 물론 괴로움도 소멸됩니다. 괴로움이 없어지면 즐거움이 나타나게 됩니다. 어둠이 없어지면 밝게 되듯이 진정한 즐거움은 번뇌가 없어진 경지에서 누려진다는 것입니다. <열반경>에 “모든 현상은 덧없는 것이어서 생겼다 없어지는 법, 생겼다 없어지는 생멸(生滅)현상이 없어지면 열반의 즐거움이 있다”(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하였습니다. 이 열반의 즐거움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절대 행복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낙(離苦得樂)이라는 말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은 생사의 고통을 떠나 해탈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인데 깨달음의 진리를 체험할 때 얻어지는 대자유의 경지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괴로움이 소멸되고 욕망이 사라졌을 때 고요한 평화의 즐거움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멸성제는 불교의 이상(理想)으로 영원한 평화와 안락이 충만한 유토피아(utopia)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이것이 곧 불국토인데 부처님의 세계는 괴로움이 없는 곳으로 영원하고 무한한 시공을 초월한 절대의 세계입니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1년 4월 (제5호)

불교의 근본교리 (2)

사성제(四聖諦)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뜻입니다. 불교의 교리는 이 사성제가 중심이 된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사성제로써 풀어 설명합니다. 제(諦)는 범어 ‘satya’를 번역한 말인데 진실하여 헛되지 않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정각(正覺)을 이룬 후 250km 떨어진 바라나시 근교(近郊)의 녹야원으로 찾아가 한때 고행을 같이 했던 5비구를 위하여 최초의 설법을 해준 내용이 바로 사성제입니다. 이 설법을 들은 다섯 비구는 교진여, 알비, 마하남, 바제, 바부였다 합니다.

(1) 고성제(苦聖諦)

고성제란 인간의 모든 것은 괴로운 것이라는 현실 정의를 내린 말로 이 괴로움의 인식으로부터 불교의 수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것을 설명하자면 괴로운 운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원래 괴로움을 뜻하는 고(苦)라는 글자는 범어 ‘duhkha’를 번역한 말인데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하면 아픔, 슬픔, 불만, 불안, 초조, 갈등 등의 뜻이 모두 내포된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태를 모두 두카(duhkha)라 합니다. 불교는 이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종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다만 괴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그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가르칠 뿐이다.”

괴로움을 해결하자면 자신의 괴로움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마치 환자가 병을 고치려면 자신의 몸에 병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은 괴롭다. (一切皆苦)”라는 경전 속의 말도 있습니다.

이 괴로움을 하나 하나 나열하여 구체적으로 밝혀 놓은 것에 팔고설(八苦說)이 있습니다. 인간에 있어서 근본적인 괴로움이 8가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태어남(生)·늙음(老)·병듦(病)·죽음(死)·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愛別離苦)·미워하는 사람과 만남(怨憎會苦)·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苦)·오음의 신체에서 오는 괴로움(五陰盛苦)입니다. 이 중 태어남·늙음·병듦·죽음의 네 가지를 사고(四苦)라 하기도 합니다. 오음(五陰)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하는데 오온(五蘊)이라고도 합니다.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인데 색이란 육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물질적인 요소를 말합니다. 이에 4가지 요소 곧 4대설(四大說)이 있습니다.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가지 원소인데 곧 질소(N)·수소(H)·탄소(C)·산소(O)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의 신체를 가지고 말하면 머리털과 피부에 난 털 그리고 살갗 ,힘살, 손톱, 발톱, 뼈, 치아 골수 등은 지대(地大)로 이루어진 것이며, 피, 고름, 땀, 침, 가래, 눈물 등 수분으로 된 것은 수대(水大)입니다. 화대(火大)는 체온이며, 풍대(風大)는 맥박이 뛰고 혈액이 순환하는 등 움직이는 것과 몸 속의 가스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대로 이루어진 몸을 색(rupa)이라 합니다.

수(受, vedana)는 바깥의 경계를 받아들이는 감수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눈이 보거나 귀가 들을 때 시각과 청각이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인상(印象)이 느껴지는 첫 순간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세 가지의 감수가 있습니다.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그리고 사수(捨受)입니다.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고수이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낙수이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것을 사수라 합니다.

상(想, samjna)은 감각을 통한 인식(認識)이 일어나면서 개념(槪念)이 형성되고 표상화(表象化)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한 송이 꽃을 보았을 때, 시각적으로 꽃이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그 꽃의 색깔이나 이름 등을 아는 것은 상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행(行, samskara)은 형성된 개념 등의 생각이 힘을 가져 움직이면서 의지를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물이 흐르면 물줄기의 힘이 생기는 것처럼 마음에 생각이 일어나면 의지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다시 다른 생각과 연결되어 사고력이 형성됩니다. 이리하여 기억, 상상, 추리를 하게 되는데 이것을 행이라 합니다.

식(識, vijnana)은 일반적인 분별 인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식이 가지는 의미는 무척 다양합니다. 때로는 생명의 요소로 설명되기도 하며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인간은 결국 이 오온의 화합물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생리적인 고통을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추워도 괴롭고 더워도 괴로우며 배가 고파도 괴로우며 불러도 불편한 등 육체 때문에 겪는 고통을 오음성고라 합니다.

또 괴로움을 자체의 성질로 분류하여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의 셋으로 나누어 말하기도 합니다. 고고란 외부의 조건에 의하여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하는 괴로움으로 추위나 더위나 사고로 인하여 당한 부상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행고는 무상으로 인해 변해버리는 조건으로 해서 생기는 괴로움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 속에서 늙고 병든 신세가 되는 것 등이 행고입니다. 괴고는 애지중지 소중히 여기던 것을 파괴당했을 때 느끼는 고통입니다. 부귀와 권력을 누리던 사람이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애착하던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괴로움 등입니다.

괴로움이란 인간의 현실을 분석하여 결과론적으로 인간을 해석한 말입니다. “인생이란 괴로운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1년 3월 (제4호)

불교의 근본교리 (14)업과 과보

윤회설에서는 업에 의해서 그 과보를 받는 상태가 윤회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업이 윤회의 주체라고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얼핏 생각하면 업이 바로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법무아설(諸法無我說)을 내세우는 근본 교리의 입장에서, 윤회의 주체가 있다고 한다면 서로 상충되는 이론이 되고 만다. 결론은 윤회를 거듭하되 윤회하는 주체는 없다는 것이다. 업 이론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인과(因果)의 법칙을 밝히는 이야기다. 동시에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윤리적 측면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과성과 윤리성의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업 이론이다. 여기서 인과의 성질은 자연법칙과 같은 것으로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논리와 같은 것이다. 다만 선악의 도덕적 기준은 인간의 윤리적 의식에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사고다. 업 자체는 선악이 없는 것이지만 인간의 윤리의식에서 볼 때 선악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다.

업이 행해지는 하나의 행위가 끝나면 행위자체는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행한 존재 안에 어떤 흔적이나 세력을 남겨 놓는다. 마치 향을 태우면 향 자체는 타서 없어지지만 향의 냄새가 옷이나 천 같은데 배여 남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업이 남긴 세력을 업력(業力)이라 하는데, 이것이 잠재적인 에너지로 남아서 때를 기다려 업력의 성질과 일치성이 있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존재들은 업력을 싣고 다니는 활동체다. 모든 존재가 살아가는 동력이 모두 업력이다. 이것이 죽은 뒤에는 미래를 만드는 에너지가 된다.

업은 존재하는 자의 현재 운명이나 미래의 운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뿐만 아니라 업으로 인해 모든 존재가 만들어진다. 가령 사람으로 태어날 업을 지었으면 사람으로 태어나고 짐승으로 태어날 업을 지었으면 짐승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업이 지어지고 나서 그 과보가 나타날 때까지 경과되는 시간은 일정하지가 않다. 마치 식물의 종자가 발아하여 뿌리를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종자마다 다르듯, 업이 결과를 초래하는 과보를 받는 때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3가지로 구분하여 삼시업(三時業)이라 하는데 금생에 지어서 금생에 과보를 받는 업은 순현업(順現業)이라 하고 내생에 받는 것은 순생업(順生業), 그 다음 생에 가서 받는 업은 순후업(順後業)이라 한다. 또 과보를 받게 되는 때가 정해져 있는 업을 정업(定業)이라 하는 반면 정해지지 않는 업은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업은 지으면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되지만 그 결과가 항상 똑같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업을 지으면 어떤 과보를 받느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대체로 선업은 선도에 태어나고 악업은 악도에 태어난다고 말한다. 천상세계나 인간은 선도이고, 지옥, 아귀, 축생은 악도이다. 또 지극히 상식적인 견해로서 도덕율에 입각하여 과보를 예측해서 말하기도 한다. 가령 살생(殺生)업을 많이 지으면 병에 잘 걸리거나 수명이 짧아지며 투도(偸盜)업을 많이 지으면 가난하게 태어난다. 그리고 사음(邪淫)을 일삼으면 올바른 가정을 이루지 못한다는 등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윤회를 한다면 바로 이 영혼의 존재가 다시 다른 몸을 받아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도의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는 어떤 존재가 죽어 육체가 없어지면 영혼과 같은 존재인 아뜨만(atman)이라는 자아(自我)나 지바(jiva)라는 생명원리가 있어 윤회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무아(anatman)를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윤회를 한다해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영혼과 같은 어떤 것이 일정하게 옮겨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옮아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통해서 계속하는 것이므로 고정된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난다 할 때 죽은 자와 태어난 자 사이에 불가분리의 관계는 있으나, 죽은 자가 바로 태어난 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천년 전에 땅에 심어졌던 밀 알이 천년 후의 밀 알로 이어질 수는 있지만, 천년 전에 밀밭에 심어졌던 밀 알이 천년 후의 밀밭에서 수확한 밀 알과 동일하지는 않으며, 없어지고 생겨나는 현상의 반복이 있다 하더라도 고정 불변의 실체가 이어지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없어지고 생겨나는 것은 변화의 과정이며 이 변화의 과정을 이어주는 것이 업력이다. <밀린다 팡하>에서 나가세나 존자가 이런 말을 하였다. “다시 태어나는 자와 죽은 자는 다르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는 자는 죽은 자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난 자는 죽은 자가 지은 업의 과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3월 ((제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