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근본교리 (6)연기법

불교의 본질은 인생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세계는 미혹으로 인한 그릇된 행위가 일어나서 결국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 악순환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표현할 때 혹(惑)→업(業)→고(苦)의 순환이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이루었을 때 중생의 고통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며 어떻게 사라질 수 있는가를 관찰하고 그 이법을 이론적으로 전개해 놓은 것이 12인연설입니다. 생멸변화하는 인생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교리로 12연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12가지의 지(支)가 연결된다 하여 12지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이 설은 모든 존재의 기본적 구조를 12가지 항목의 계열을 세워 설명함으로서 생존의 조건이 연결되는 과정과 이 조건이 소멸되었을 때의 경지를 밝혀 놓은 것입니다.

① 무명(無明 avidya)

우리들 존재의 맨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무명이라 합니다. 글자 그대로 밝음이 없는 어둠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무지(無知) 혹은 무지(無智)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모른다’, ‘지혜가 없다’는 뜻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생·노·병·사의 고통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무명에서부터 중생의 업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여실히 진여(眞如)의 법이 하나임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무명이라 한다고 정의를 내려놓았습니다. 우주 만유에 가득한 상주불변하는 본체를 진여라 하는데 이는 우리들의 사상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의 진실한 진리 그 자체를 두고 부르는 말입니다. 이 진여를 모르는 상태 곧 깨닫지 못한 상태를 무명이라 합니다. 중생의 경우에 이 무명이 과거세로부터 무한히 이어져 온 것으로 그 시작이 인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그래서 흔히 시작을 모른다는 뜻을 붙여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합니다. 또한 이 무명 때문에 번뇌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마치 땅이 있기 때문에 잡초가 자라듯이 번뇌의 땅이 되는 것이 이 무명입니다. 비유하여 말하자면 캄캄한 어두운 밤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동·서·남·북의 방향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무명을 미혹(迷惑)이라 하고 줄여서 한자로 혹(惑)이라고도 합니다.

② 행(行 samskara)

행이란 곧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형성되는 힘 혹은 만들어지는 힘을 뜻하는 말인데 어떤 원인에서 결과가 나타나기까지의 진행될 힘이 잠재해 있는 것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업(業 karma)이 지어지는 상태, 일어나는 상태가 행으로 몸으로 하는 신행(身行)과 말로 하는 구행(口行)과 생각으로 하는 의행(意行)이 있습니다. 이 삼행(三行)을 삼업(三業)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무명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구·의에 따른 행위가 축적되어 사람의 인격의 내용이 결정되고 삼행의 행위에 의해서 형성된 습관력(習慣力) 또한 행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업을 짓는 자체가 행인데 업을 지으면 그것을 지은 존재의 내부에 반드시 어떤 행을 유발할 잠재적인 힘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업력(業力)이며 업력이 있으면 행은 따라 일어나며 이 업력이 바로 앞에서 설명한 무명이 조건이 되어 생기는 것이며 업력이 형성되는 상태 또한 행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③ 식(識 vijnana)

인식작용 또는 분별작용을 식이라 합니다. 여기에 안식(眼識)·이식(耳識)· 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들 주관을 이루는 인식작용의 갈래를 나누어 말하는 것인데 눈·귀·코·혀·몸의 오관에 의해 일어나는 인식과 마음(意根)에서 일어나는 인식까지를 육식(六識)이라 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유식설(唯識說)에서는 7식·8식을 추가하여 말나(末那 manas)식과 아뢰야(阿賴耶 alaya)을 말하지만 근본불교의 교리인 12인연설에서는 아직 7·8식이 설해지지 않았습니다.

이 식은 반드시 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납니다. 그리고 표면적인 의식 다시 말하면 우리들 머리에 떠오른 의식뿐만 아니라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상태에서도 식은 내재해 있습니다. 가령 꽃을 보고 꽃을 인식할 때에 꽃을 보는 행이 먼저 일어나 경험하는 과정이 있고 난 후 잠재의식이나 직접적인 의식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식은 시간적으로 과거의 것이나 미래의 것을 생각하는 중추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럴 때 의식의 영역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무한히 확대되는 것입니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1년 7월 (제8호)

불교의 근본교리 (5)

(5) 연기법(緣起法)

연기법이란 불교교리의 주축을 이루는 근본 이론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을 이론적으로 명시(明示)한 것이 바로 연기법이라 할 수 있다. 연기란 말은 범어(梵語sanskrit) 쁘라띠따사무뜨빠다(pratityasamutpada)를 번역한 말인데 이는 쁘라띠따(pratitya)와 사무뜨빠다(samutpada)의 합성어로 쁘라띠따는 ‘…때문에’, ‘…말미암아서’, ‘…의해서’라는 뜻이고 사무뜨빠다는 ‘태어나다’, ‘형성되다’, ‘생기다’는 뜻이다. 따라서 연기란 ‘…을 말미암아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하는 현상은 그것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하여 생겨진다는 의미이다.

잡아함경에는 연기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此起故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도 사라진다.(此滅故彼滅)

이 말은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하는 상관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말로 고립 독존적인 존재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연기란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해 있는 관계성을 설명하는 말이다. 부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비구들이여, 연기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서로 의지하는 상의성(相依性)이다. 나는 이것을 깨닫고 이해하였다.”

또 아함경에는 연기의 이치를 갈대에 비유하여 설한 이야기가 있다. 맨땅에 갈대를 세울 때 세 개의 갈대를 서로 의지하게 하여야 세워지는 것이며 한 개나 두 개로는 바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이루는 요소가 있으며 이 요소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져야 하는 조건이 충족될 때 존재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어떤 존재를 이루고 있는 A, B, C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할 때 이들 세 요소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다. A가 원인이 될 때 B와 C는 A의 조건이 되고 B가 원인이 될 때는 A와 C는 B의 조건이 된다. 마찬가지로 C가 원인이 될 때 A와 B는 C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앞의 갈대의 이야기로 다시 말하면 A, B, C라는 세 개의 갈대 가운데 어느 한 갈대가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두 개의 갈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원리에서 볼 때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생겨나 존재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으로 의존하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연기법은 곧 존재의 이법(理法)이다. 이것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우주만유(宇宙萬有) 실상의 진리로 동서고금의 차별이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것을 깨닫고 부처가 되어 이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가지가지의 설법을 한 것이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1년 6월 (제7호)

불교의 근본교리 (4)

4) 도성제

도는 열반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면 괴롭지 않는 열반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이치를 밝혀 놓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 도성제이다. 이는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하는 올바른 생활방법과 수행의 본질적인 바탕이 되는 특별방법을 아울러 제시하였다. 이 도성제의 내용은 팔정도(八正道)로 설명된다.

①정견(正見): 바르게 보는 견해이다. 인생과 세상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져야 바른 삶을 살 수 있다. 불교의 인생관을 바르게 세우는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4성제의 이치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눈이 볼 수 있어야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정견이 바로 서야 바른 수행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다.

②정사(正思): 바른 생각이다. 가슴속에 삿된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을 말한다. 뜻으로 짓는 의업을 바르게 하여 욕심·성냄·어리석음을 여의고 자비롭고 지혜로운 생각을 갖는 일이다.

③정어(正語): 바른 말이다. 언어생활을 올바르게 하여 나쁜 구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거짓말(妄語)을 하지 않으며 이간질하는 말(兩舌)을 하지 않으며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으며 욕하는 말(惡口)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을 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이다.

④정업(正業): 바른 행위이다. 몸으로 하는 행동을 삼가 살생(殺生)하지 않고 도둑질(偸盜)하지 않으며 음란한 짓(邪淫)을 하지 않고 목숨을 구해 주고 보시를 하며 청정한 마음으로 올바른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는 것이다.

⑤정명(正命): 바른 생활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의(衣)·식(食)·주(住)를 해결하고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을 선업(善業)이 되도록 해 가는 것이다.

⑥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을 말한다. 부지런히 자기의 생활을 충실히 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것이다. 선근(善根)을 키우고 악근(惡根)을 뽑아 자신을 발전시키고자 더욱 노력하는 것이다.

⑦정념(正念): 바른 기억이다. 정념의 념은 잊지 않고 바르게 기억하여 항상 염두에 두고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⑧정정(正定): 바른 선정(禪定)이다. 정(定)이란 마음이 한 곳에 집중 통일되어 고요해진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범어 samadhi를 정(定이)라 번역하며 선(禪의)의 어원은 dhyana이다. 사유수(思惟修) 또는 정려(靜慮)라고도 번역되는데 정을 얻는 실천적 방법을 뜻하는 말이다. 이 선정이 팔정도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특별한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팔정도는 괴로움을 소멸하여 멸성제 곧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예시한 것으로 불교 수행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불교의 생활지침이요 근본윤리를 밝혀 놓은 것이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1년 5월 (재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