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의 변화

세월이 가고 사회가 바뀌면 교양도 바뀌는가. 요즈음 대학에서 교양과정을 운영하는 담당자나 교양과목을 강의하는 교수들은 고민이 많다. 대학에서 언어나 역사, 철학, 윤리 등의 인문학이 설 자리를 잃어 학과가 폐과되거나 유사학과와 통폐합되는 구조조정이 이루어진지는 이미 십년이 지났다. 이에 뒤질세라 교양과정의 개설 강좌도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에서의 교양은 국어, 영어, 윤리, 역사 등의 딱딱한 고전적인 강좌가 주류를 이루었고 그것도 꼭 이수해야 하는 필수과목들이었는데, 이제는 성, 건강, 스포츠, 리더십, 재테크 등이 인기 교양과목 대열에 들어 있다. 구체적인 강좌명을 보면, ‘대중문화와 패션, CEO강좌, 사교무용, 교양골프, 영화의 이해, 풍수지리, 교양 레크레이션, 대인관계와 심리, 비즈니스매너 및 에티켓, 사진촬영과 감상, 식생활과 건강, 생활경제, 포도주 개론, 성의 과학, 현대사회와 스포츠’ 등 참으로 이색적인 이름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런 강좌들이 교양으로 개설되고 인기를 얻는 것은 비교적 쉽고 흥미를 끌 수 있으며, 실용적이라는 점이다. 학교에서도 어떤 과목이 인기가 있는지는 수강인원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강좌들이 인기가 있어 수강생이 몰리고 있는 반면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나 창의적이고 통합적인 학문을 탐구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교양강좌들은 찬밥 신세다. 고전 읽기, 영미문화의 이해, 과학기술과 사회윤리, 지성과 윤리, 문화와 사회, 중국사회와 문화, 사회과학으로의 초대, 대학영어 등은 거의 폐강되거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진정 인간사회에서 세월이 가고 사회가 바뀌면 삶에 필요한 교양도 바뀌어 지는가. 누가 뭐래도 삶에 임하는 인간의 본질적 태도는 바뀔 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교양은 지극히 지엽적이고 단편적인, 그러면서도 시류에 이끌린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교양교육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대학마다 이러한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영역별 필수 이수학점을 정해놓기도 하지만 같은 영역 안에서는 좀 더 쉽고 실용적이고 흥미위주의 강의를 듣는 경향은 어쩔 수 없다.

교양은 현실생활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효율적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실리관념을 떠나지 않고서는 교양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 고전을 읽고, 철학을 공부하고, 과학과 사회현상을 이해하고, 지성과 윤리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비록 현실적으로 좋은 학점을 받고, 취업준비에 직접적 실리적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교양은 문화를 수단으로서가 아닌 목적 그 자체로서 추구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처럼 사회전체가 진리에 대한 사랑이나 정신적 가치를 돌보지 않고 다만 물질적 이익만을 위하여 급급한 상황이 되면 교양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합리보다는 관습과 선례에 의하여 처리하려 하고, 이상보다는 편의주의적 임기응변에 의하여 처세하려 하고, 참됨과 착함과 아름다움보다는 세속적 성공과 물질적 이득을 취하려는, 어쩌면 ‘필리스티니즘(Philistinism : 속물주의)’으로 흘러갈까 두렵다는 것이다.

실리관념이나 쉽고 흥미 위주의 교양은 인간성의 자유롭고 조화로운 발달을 저해하기 마련이다. 전체를 개관할 수 있고 전반적인 상황에 대하여 편협되지 않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교양이 필요하고, 이 교양의 바탕 위에 전문적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현실적인 실리와 효율과 원론적인 본질이 조화를 이루어야 인류의 역사는 멋지게 미래로 비상할 것이다. 비록 우리의 몸이 사바세계에 있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본인 바른 인간됨의 바탕 즉 교양을 갖춘 연후에 바르고 깊고 오묘한 정법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김형춘 (반야거시회회장/창원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11월 제84호

고우스님─`내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닦는 복이 진짜 복

`내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닦는 복이 진짜 복

-고우스님-

요즘 기복을 많이 하잖아요.

이 말씀을 들어보면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어리석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요?

복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닦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도는 내가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무아라고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복을 닦으면 그건 괜찮아요.

진짜 복을 닦는 겁니다.

[서장]에서는 이것을 청복, 깨끗한 복이라 해요.

이 복은 남도 살리고 나도 살리고, 나도 이익되고 남도 이익되는 복이기 때문에 그 복은 괜찮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복혜양족존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복과 혜, 둘 다 갖춘 분입니다.

이건 ‘내가 있다’고 닦는 복은 아닙니다.

‘실체가 없다’라고 알고 닦는 복은 괜찮습니다.

우리가 그 복에 대해서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진짜 복이 있고 가짜 복이 있는 거예요.

‘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보시하고 공양하고 복 짓는 그것이 헤아릴 수 없더라도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하면, 내가 있으니까 삼업도 있다는 말입니다.

신구의의 삼업이 그대로 있어요.

그러니까 실체가 없고, 공이고, 무아라는 걸 알면 삼업도 같이 없어집니다.

없다는 것을 알고 복을 닦으면 그 자체가 업도 녹이고 죄도 멸하는 게 됩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해서 복을 아무리 짓더라도 욕심과 화, 그리고 어리석음은 없어지지 않으니 진정한 복이 못된다는 말입니다. 복 짓는 것으로 죄를 없애고자 하더라도 후세에 아무리 복을 많이 얻더라도 죄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그 복은 소용이 없습니다.

무아로 닦는 복이라야 진짜 복입니다.

뒤에 나오지만 양무제가 ‘절 짓고 보시했는데 복이 되느냐?’ 하니까 달마 스님이 ‘공덕도 없고 복도 없다’ 하지요.

양무제는 유아로 복을 닦았기 때문에 복이 없는 거예요.

만약 양무제가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무아라는 걸 안 후에 복을 닦았다면 그건 한량없는 복이 되지요.

우리가 복을 어떻게 닦는냐에 따라서 향방이 갈리는 겁니다.

마음 속에서 죄의 모든 인연을 없앨 줄 알면, 무아로서 죄를 없앤다는 것이죠? 이런 사람은 ‘나다-너다’를 여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없는데 무슨 죄가 있어요?

이것이 진짜 참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