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아이콘

황금돼지띠의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는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지난 2천년에 태어난 ‘밀레니엄 베이비’들이 올해 사립 명문 초등학교에 들어가기가 꽤나 힘들다는 보도를 보았다. 이를 지켜본 황금돼지띠의 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벌써부터 아이의 대학입시와 취업 걱정을 한다는 웃지 못할 소문 또한 사실이다.

지난 20세기에는 과도한 커뮤니케이션과 유명인이 넘쳐났고 보도와 홍보활동, 그리고 조작된 루머가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로 자리잡으면서 야기된 혼란도 부지기수였다. 과도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정한 지식을 가리기가 어려웠고, 전례 없는 쾌락에 빠져 통제가 불가능한 대중문화의 영향도 무서웠다.

이러한 20세기에 지울 수 없는 발자국을 남긴 2백명의 인물을 가려 엮어놓은 ‘아이콘’이라는 책(원 제목은 Icons of the 20th century 임)이 작년 여름에 출간되었다. 국적ㆍ인종ㆍ성별ㆍ활동분야를 막론하고 지난 세기의 역사에 위인 또는 악인으로 남은 이들을 가려 놓은 것이니 결코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아이콘’이란 ‘이미지’ 또는 ‘표상’을 뜻하는 말이지만 좋든 나쁘든 이름과 얼굴이 널리 알려져 있고 현대사의 흐름을 형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상징한 뜻이다.

이들 2백 명의 인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20세기 전체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통해 현재를 사는 삶의 지혜와 미래를 내다보는 새로운 시각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에는 몽상가ㆍ폭군ㆍ혁명가ㆍ숭배의 대상ㆍ유행의 창시자는 물론 여론 형성자로 우리의 집단적 시대정신을 형성했던 이들도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 지그문트 프로이트, 월트 디즈니, 베니토 무쏠리니, 다이애나 황태자비, 달라이 라마 등이 그들이다. 또한 어디서나 청중의 관심을 끌고 주위의 자기장에 영향을 끼친 문화적 시금석 같은 존재로 시대의 변화를 선도한 사람들도 있다. 예컨대 윈스턴 처칠, 마하트마 간디, 샤를 드골, 프랭크린 D. 루스벨트 등과 여성으로서 마거릿 미드, 테레사 수녀, 골다 메이어, 마리 퀴리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2백인의 면면에는 영화배우, 정치가, 운동선수, 연주자를 포함한 가수, 영화감독, 인권운동가 등이 60%(120명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수치로 봐도 지난 세기를 격동의 세기, 야만의 세기, 대중문화와 쾌락의 세기라고 불러도 괜찮을 듯하다.

극소수지만 종교계의 인물들도 있었다. 달라이 라마, 교황 요한 23세, 테레사 수녀, 빌리 그레이엄 목사 정도다. 내가 기대했던 한국인, 나아가 아시아 사람은 7명(3.5%)에 불과하고, 그 면면도 거대 중국을 공산화로 통일시킨 모택동 부부, 2차 대전을 통해 미국인의 자존심의 제물이 된 일본의 전 히로히토 국왕, 미국인의 자존심을 짓밟은 호치민,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세계인의 숭배를 받고있는 달라이 라마, 인도의 간디와 인디라 간디 뿐이다. 우리로서는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바라건대 21세기에는 보다 인간적인 면에서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고민하고, 인간애와 인간구제에 헌신한 종교인, 사상가, 학자, 예술가들이 세계사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 인물로 많이 선정되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 불교계에서도 지금보다 더 훌륭하신 고승대덕들이 나시어 전 세계의 중생제도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 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2월

非讀書之節(비독서지절)

추석을 지나면서 요즘의 날씨는 낮과 밤을 가릴 것 없이 전형적인 가을이다. 이토록 맑고 쾌적한 하늘 아래서 사람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무 아래서 그저 서성거리기만 해도, 누렇게 익어 가는 들녘만 내다보아도 내 핏줄에는 맑디맑은 수액(樹液)이 도는 것을.

장미 가시에 손등을 찔려 꼬박 한 달을 고생했다. 내 뜻대로 움직여 주던 손에 탈이 나니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독일의 그 릴케를 생각하고 때로는 겁도 났었지만, 모든 병이 그러듯이 때가 되면 낫는다. 밀린 옷가지를 이제는 내 손으로 뺄 수 있게 됐으니 무엇보다 홀가분하다. 오늘처럼 갠 날은 우물가에 가서 빨래라도 할 일이다. 우리처럼 간단명료하게 사는 단수(單數)에게는 이런 일은 일거양득이 된다.

이 쾌청의 날씨에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벽을 바라보고 좌선(坐禪)을 할 것인가, 먼지 묻어 퀴퀴한 경전을 펼칠 것인가, 그런 짓은 아무래도 궁상스럽다. 그리고 그것은 이토록 맑고 푸르른 가을 날씨에 대한 결례가 될 것이다. 그저 서성거리기만 하여도 내 안에서 살이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 밖에 무엇을 더 받아들인단 말인가.

가을 하면 독서의 계절을 연상한다는 친구를 만나 어제는 즐겁게 입씨름을 했다. 내 반론인즉 가을은 독서하기에 가장 부적당한 비독서지절(非讀書之節)이라는 것. 물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추야장(秋夜長)에 책장을 넘기는 그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디 그 길이 종이와 활자로 된 책에만 있을 것인가. 이 좋은 날에 그게 그것인 정보와 지식에서 좀 해방될 수는 없단 말인가. 이런 계절에는 외부의 소리보다 자기 안에서 들리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제격일 것 같다.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부터 이상하다. 얼마나 책하고 인연이 멀면 강조 주간 같은 것을 따로 설정해야 한단 말인가. 독서가 취미라는 학생, 그건 정말 우습다. 노동자나 정치인이나 군인들의 취미가 독서라면 모르지만, 책을 읽고 거기에서 배우는 것이 본업인 학생이 그 독서를 취미쯤으로 여기고 있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닌가. 하기야 단행본을 내 봐도 기껏해야 1, 2천 부 밖에 나가지 않는데, 어느 외국 백과사전은 3만 부도 넘게 팔렸다는 게 우리네 독서풍토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술술 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만 덮어지는 그런 책을 골라 읽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물론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한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서란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 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 준다. 그와 같은 책은 지식이나 문자로 쓰여진 게 아니라 우주의 입김 같은 것에 의해 씌여졌을 것 같다. 그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 즐거울 때처럼 시간 밖에서 온전히 쉴 수 있다.

법정, [무소유]. 월간 반야 2011년 11월 132호

가니색가(迦 色迦)

고대 인도의 쿠샤나(Ku ana) 왕조의 제3세 왕인 카니슈카의 음역. 서기 1∼2세기경에 생존. 약 23 년간 재위했으며, 사방을 정복하여 방대한 영토의 *건타라국을 건설하고, 수도를 현재 파키스탄 의 페샤와르에 해당하는 푸루샤푸라(Puru apura)로 옮겼다. 불교사에서 *아쇼카 왕에 비견될 만 큼 불교의 외호자로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迦尼色迦라고도 적는다. 가니색가왕(迦 色迦 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