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
선남자여,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운다고 하는 것은 이 사바세계의 비로자나여래께서 처음 발심하고부터 정진하여 물러나지 아니하고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몸과 목숨을 보시하시되,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먹물을 삼아 경전을 써, 수미산처럼 쌓더라도 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거늘, 어찌 하물며 왕위나 성읍이나 촌락, 궁전, 정원, 산림의 일체 소유와 가지가지 난행고행일 것이며, 나아가 보리수 아래에 큰 깨달음을 이루시고 가지가지 신통을 보이여 온갖 변화를 일으키시던 일이나, 가지가지 부처님 몸을 나타내시고 여러 모임에 처하시되, 혹은 여러 대보살의 모인 도량에 처하시고 혹은 성문과 벽지불 등이 모인 도량에 처하시며 혹은 전륜성왕, 소왕권속들이 모인 도량에 처하시고 혹은 찰제리나 바라문, 장자, 거사가 모인 도량에 처하시며 나아가 천룡팔부와 사람인 듯 하나 아닌 이 등이 모인 도량에 처하시면서 온갖 모임에서 원만하신 음성을 마치 큰 우레 소리와 같게 하여, 그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중생을 성숙시키던 일이나, 열반에 드시는 것을 나타내는 이와 같은 일체를 모두 내가 다 따라 배우기를 지금의 세존이신 비로자나불께 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일체 부처님 국토의 작은 티끌 속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서도 다 이렇게 하시거든 생각마다 내가 모두 따라 배우리라 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이 따라 배우는 것은 다함이 없어,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느니라
<풀이>
부처님을 따라 배운다는 것은 부처님의 수행과 원력이 내 자신의 수행과 원력이 되도록 함이다. 다시 말하면 내 삶의 방식을 부처님 방식대로 하여 부처님이 중생에게 보인 모범처럼 나도 남에게 그러한 모범을 보이면서 살겠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의 모델을 부처님에서 찾는다. 부처, 그 탁월한 인격과 최고의 격조 높은 삶의 모습이 모든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영원한 푯대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걸 수 있는 최대의 희망은 부처를 지향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를 제도하고 남을 제도하는 인간 최고의 정신이다.
‘살갗을 벗겨 종이를 만들고 뼈를 쪼개 붓을 만들며 피를 뽑아 먹물을 만들어 경전을 써서 수미산같이 쌓는다’고 한 말은 구도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용맹과 정진의 근면을 상징적으로 서술한 말이다. 이러한 용맹 정진하는 마음에는 오로지 부처를 본받으려는 것 외엔 다른 일이 없다. 이미 목숨마저 돌보지 않거늘 명예나 지위 재산, 게다가 소소한 고행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부처의 행을 따를 뿐이다.
불교에서 수행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깨달음이 ‘행’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행’이 없이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깨달음이 지식에서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도는 아는 것에 속하지 아니하고, 모르는 것에 속하지 아니한다”는 말이 선가의 유명한 격언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진리를 직접 체험하는 데는 유식이나 무식이나 모두 상관없다. 그렇기 때문에 행을 선도하여 깨달음으로 가게 하는 것이 보현행원이다. 또한 인간이 배움에 있어서 사표(師表)를 가져야 함은 당연한 일이며 바로 부처님이 만 인류의 영원한 사표이다. 맹물에 설탕을 타면 단맛이 나고 소금을 타면 짠맛이 나듯 부처님을 마음속에서 생각하고 따라 배우려 할 때 우리는 어느 사이 부처님 마음을 감응하여 자신의 수행을 성취하게 된다. 또한 인생을 배우려는 자세로 산다는 것은 그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배움 그 자체가 인생의 참된 가치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구도의 정열로 사는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비본질적인 세상잡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고 죽는 생사의 미망은 헛된 것이다. 본질적 의미를 회복한 열반의 삶, 해탈의 삶이라야 참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발심을 가로막는 업장 속에서 질곡의 삶을 살기가 일쑤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사바세계가 수행하고 정진하는 최적의 환경을 가진 세상이라고 한다. 제불 가운데서도 사바교주 석가모니불이 가장 용맹정진 하는 제일의 부처님이라 고 한다. 세상의 부귀영예가 수도에는 마장이라 하여 옛날부터 인간이면 누구나 누리기를 원하는 복을 삼생의 원수라고 했다. 첫 생에 복을 짓느라고 수행을 못하고, 두 번째 생에 복을 누리느라고 수행을 못 하고, 세 번째 생에 다시 복이 감해져 빈궁에 시달리느라고 수행을 못하니, 결국 복이 삼생 동안 수행을 방해하는 결과가 되어 이 복이 원수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4월 제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