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15) – 보개회향원 1

<경문>

선남자여, 널리 모두 회향한다는 것은, 처음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으로부터 중생을 따르는 것까지의 모든 공덕을 온 법계, 허공계, 일체중생에게 남김없이 회향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항상 안락하고 모든 질병의 고통은 없게 하며, 악법을 행하려 할 적에는 이루어지지 않게 하고, 선업을 닦고자 하면 모두 속히 이루어지게 하며, 일체 악취의 문은 닫아버리고 인간과 천상에 열반의 바른 길을 열어 보이며, 만약 모든 중생이 악업을 쌓아 모은 것 때문에 받아야 할 일체 지극히 무서운 고통의 과보를 내가 모두 대신 받아서 저 중생들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여 마침내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게 하리라 하는 것이니라.

보살이 이처럼 닦은 바를 회향하기를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며,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이 회향은 다함이 없어 생각마다 계속하여 끊임없이 하여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느니라.

<풀이>

‘회향’이란 내가 쌓은 선근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준다는 뜻이다. 범어 ‘파리나마나’(parinamana)를 어원으로 가지고 있는 말로 대승의 정신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로 쓰인ㅈ다. ‘회’는 회전(回轉)의 준말이고, ‘향’은 취향(趣向)의 뜻이다. 어디로 갈지 방향을 잡아서 나아간다는 뜻이다. 사실 불교의 모든 수행은 회향에서 참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화폐가 쓰여져야 상행위가 이루어져 돈으로의 역할이 살아나듯이, 내가 닦은 선근과 공덕이 어디엔가 회향되어져야 제 역할이 이루어진다.

《화엄경 십회향품》에 서는 열 가지 회향을 설해 놓았고 보통 상단 축원시 ‘삼처회 향’을 고하기도 한다. 자기의 공덕을 깨달음을 구하는 데 돌리는 것을 ‘보리회향’이라 하고, 또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진리 그 자체에 돌려져 맞아지도록 하는 것을 ‘실제회향’이라 하며, 그리고 자신의 공덕을 중생들에게 돌려주는 것을 ‘중생회향’이라 한다. 보현행원에서의 회향은 중생회향이다. 내가 아무리 선근과 공덕을 많이 성취하여도 그것이 중생에게 회향되어지지 않으면 상대적 한계성을 가지는 한정된 공덕이 되고 말지만, 회향을 하게 되면 이 유한한 공덕이 무한한 공덕으로 전환되어진다. “보살이 지은 바 모든 공덕을 온 법계 허공계의 일체중생에게 남김없이 회향한다”는 것은 내가 성취한 공덕을 내 것이라는 소유 관념 속에 묶어 두지 않고 중생의 것이라고 내놓는 것이다.

내가 성취한 공덕을 나 홀로 소유하지 않고, 중생 모두에게로 나누어 공유하겠다는 정신이 바로 회향정신이다. 따라서 회향은 단순히 주고받는 수수 관계가 아니다. 인간 행위의 본질적 의미를 밝힌 것이 회향이다. 회향하는 행동이라야 그 행동에 진정한 공덕이 따른다는 뜻이다. 또한 인간 행위의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바로 회향이며, 회향을 통하여 하나의 완전한 행업이 이루어진다. 이 회향에서 인간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극복된다. 더불어 사는 중생의 삶의 현장을 떠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사회를 의지하지 않고는 내가 살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의 은혜 속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사회의 은혜 속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은혜를 바로 알 때 자연히 나의 모든 것을 회향하여 나의 선근, 나의 공덕이 바로 은혜 그 자체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향의 정신은 현대 사회에서 볼 때 인간의 의식을 개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강자의 독점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현대의 기업생리나 강권을 가진 자의 고압적인 인간 압박은 ‘회향 정신’의 부재에서 비롯되고 있다. 회향의 현대적 의미는 바로 이러한 강권주의와 독점주의를 우리 사회에서 추방하는 것이다. 이기주의가 사라질 때 회향 정신은 발휘된다. 악업은 지은 중생이 그 과보로 무서운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을 내가 대신 받겠다는, 저 숭고한 뜻을 어찌 거룩하다 하지 않겠는가? ‘나’라는 자기는 결국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다. 개체적으로 독립한 개인은 없다. 불교의 연기의 이법이 이미 그것을 가르쳐 왔다. 우리는 모두 일체 세계 일체중생과 더불어 한 몸이며 대립적으로 상쟁할 수 없는 불가분리 관계의 화합적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행원을 실천하는 보살의 마음에는 이기적 자기 우선주의가 있을 수 없다. 만약 어떤 수행을 아무리 많이 하여도 이기주의에 빠져버린다면 행원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순수한 자기의 진심, 청정한 본래의 마음, 그 속에는 무한한 회향의 덕이 충만해 있으니 그것을 운전해 살아가는 것이 회향의 인생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7월 제56호

보현행원품 (14) – 항순중생원2

<경문>

보살이 이와 같이 평등하게 일체중생들을 이롭게 하나니, 왜냐하면 보살이 만약 중생들을 따르면 곧 부처님을 따라 공양하는 것이 되며, 중생을 존중하여 받들면 곧 여래를 존중하여 받드는 것이 되며, 만약 중생들을 기쁘게 하면 일체 여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은 모든 부처님께서는 대비심으로써 바탕을 삼기 때문에 중생으로 인하여 대비를 일으키고 대비로 인하여 보리심을 내며 보리심으로 인하여 등정각을 이루시나니라. 비유하자면 넓은 벌판 모래밭 가운데 있는 큰 나무의 뿌리가 물을 얻으면 가지와 잎, 꽃과 열매가 모두 번창하고 무성한 것처럼 생사벌판의 보리수도 그와 같아 일체중생은 나무의 뿌리며 모든 부처님은 꽃과 열매이니 대비의 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면 곧 능히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지혜의 꽃과 열매를 이루게 되니, 그것은 만약 보살이 대비의 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면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까닭이니라. 이렇기 때문에 보리는 중생에게 속하는 것이다. 만약 중생이 없으면 일체 보살이 마침내 위없는 정각을 이루지 못하니라. 이 뜻을 잘 알아야 하느니라. 중생들에게 마음이 평등하므로 곧 능히 원만한 대비를 성취하며, 대비심으로써 중생을 따르는 까닭에 곧 능히 여래에게 공양하는 결과를 성취하느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중생을 따르기를 허공계가 다하며 중생계가 다하며 중생의 업이 다하며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이 따름은 다함이 없이 하리라 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하여 중간에 끊어짐이 없이 하여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에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느니라.

<풀이>

‘중생을 따르는 것이 여래를 공양하는 것이고, 중생을 받드는 것이 여래를 받드는 것’이란 이 말은 중생 때문에 부처님이 있으며, 나아가 불교는 중생 때문에 존재한다는 취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밝히고 있다. 보살들의 모든 행원이 중생본위에서 실천되어지고 있음을 천명하여, 행여 중생과 부처를 분리하여 중생을 버리고 부처를 찾는 어리석음을 범할까봐 경계한 것이다. 삶을 도와주는 일이 수행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 바로 삶을 도와주는 일이다. 따라서 삶을 누리는 자에게 그 삶의 안락이 보장되도록 힘써 주는 것이야말로 ꡐ진선진미ꡑ한 일이다.

‘중생’이란 범어 ‘사뜨바(sattva)’를 번역한 말로 정식(情識)이 있는 생명체를 가리킨다. 진나라 때 구마라습 등은 ‘중생’이라 번역하였고, 당나라 때 현장 등은 유정(有情)이라 번역하였다. 아직도 구역이 많이 통용되어 중생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한역에서 ‘중생’의 의미를 3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많은 인연에 의해서 태어난다는 뜻이며, 둘째는 생이 거듭거듭 이어지므로 많은 생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셋째는 뭇 삶이라는 뜻으로 여럿이 함께 산다는 뜻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생이 누리는 삶, 그 속에 부처님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부처는 중생 속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근본에 있어서 부처와 중생은 하나다. 『화엄경』에 서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은 차별이 없다고 한다. 다만 스스로가 쓰고 있는 마음의 상태가 다를 뿐이다. 깨달아서 지혜로운 상태는 부처의 마음 상태요, 깨닫지 못하여 미혹한 상태는 중생의 마음 상태다. 미오의 상태가 다르지만 마음 그 자체는 같다는 것이다. 땅에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난다는 말처럼 마음이 미혹한 중생이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

바로 이점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중생이 중생이라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중생이 부처의 위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불성 때문에 중생이 위대한 것이다. 한 마리 벌레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벌레에 내재되어 있는 불성의 공덕과 그 작용은 부처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이 부여된 모든 존재 자체는 그 속에 부처의 탁월성이 갖추어져 있으며 그 생명의 현발 자체가 부처의 공덕이므로 중생을 따르라는 것이다. 중생을 통하여 부처의 공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ꡐ나무가 뿌리에서 수분을 흡수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중생의 뿌리에 대비의 물이 뿌려져야 부처의 꽃과 열매가 맺힌다ꡑ는 비유는 중생과 부처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설명한 좋은 경우이다. 중생이 없으면 정각을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중생을 부처보다 더 근본적인 위치에 두고 한 말이다. 즉, 모든 현상적 사실에 있어서 중생의 실태를 여법하게 파악하지 않고는 부처의 세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대비심으로써 중생을 보살펴주므로 여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눈물겨운 말이다. 불교는 중생에 대한 대비의 윤리를 종교적 생명으로 삼는다. 중생에 대한 연민이 없는 깨달음이란 무용지물이며, 대비의 실천이 없는 사변적 이론은 한낱 메마른 철학적 사고에 불과하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6월 제55호

보현행원품 (13) – 항순중생원1

<경문>

선남자여, 또 항상 중생을 따른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 세계에 있는 중생들이 가지가지로 차별되니 이른바 알에서 태어나고, 태에서 태어나며, 습기에서 태어나며, 변화해서 태어나는 것들이다. 혹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을 의지해서 사는 것들이 있으며, 혹은 허공이나 초목을 의지해 사는 것도 있거든 이런 저런 사는 종류, 이런 저런 몸, 이런 저런 형상, 이런 저런 모양, 이런 저런 수명, 이런 저런 종족, 이런 저런 이름, 이런 저런 심성, 이런 저런 지견, 이런 저런 욕망, 이런 저런 행동, 이런 저런 거동, 이런 저런 의복, 이런 저런 음식으로 이런 저런 마을과 성읍과 궁전에 살며, 나아가 일체 천룡팔부와 사람인 듯 하면서도 사람 아닌 것들, 발이 없는 것과 두 발 있는 것, 네 발 있는 것, 많은 발을 가진 것, 색깔이 있는 것, 색깔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과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의 이러한 가지가지 종류들을 내가 모두 저들에게 따라다녀 갖가지로 받들어 섬기며, 갖가지로 공양하기를 부모와 같이 공경하며, 스승이나 아라한 내지 여래처럼 받들어 조금도 다름이 없이 하고, 병들어 고생하는 이에게는 훌륭한 의사가 되어 주며, 길 잃은 자에게는 바른 길을 보여주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광명이 되어 주며, 가난한 자에게는 보배를 얻게 해 주리라 하는 것이니라.

<풀이>

일체중생이 이 세상에 생명을 부여받았다는 것 자체가 지극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생명이 적자생존의 경쟁에 의해 은혜의 배반이 일어나는 것은 중생세계의 비극이다. 약육강식이라는 업보의 본능이 서로의 생명 발전을 장애하여 생명 위협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불안과 공포가 더욱 가중된다. 여기에 중생을 보호해 주려는 보현의 원력이 동체대비를 띠고 나와 모든 중생을 따라 보살펴 준다는 것이다. 어떤 중생도 멀리하지 않고 가까이 친해져서 도우며 섬기겠다는 것은 생명의 참 가치를 보장하여 절대 평등한 본래의 공덕을 누구나 소유하고 누리도록 하자는 취지에서다. 생명체 하나하나가 개체적으로 처해 있는 조건이나 환경을 가리지 않고, 이런 저런 모든 상황 속에서 오로지 위해 주는 마음으로 부모처럼 공경하고 여래처럼 받들겠다는 정신은 대승의 본질이 발휘되는 극치이다. 나와 남의 생존을 대립적으로 보고 나를 위해 상대를 배타시하려는 소아적인 생각에서는 중생을 따를 수 없다. 사실 이 세상은 모든 중생들의 생명이 통분되어 있는 것이다. 시방법계 곧 대우주가 하나의 전일적인 생명 체계를 구축해 있는 것이므로 중생의 종류가 아무리 다르다고 하더라도 공생의 원리에 입각하여 생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아함경》에 양두사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의 몸체에 머리가 두개 달린 뱀이 있었다. 먹이를 만났을 때 두 머리의 입이 서로 먹으려고 경쟁을 하였다. 그런데 번번이 오른쪽 머리의 입이 선수를 쳐서 먹어버리므로 왼쪽 머리의 입이 항상 불만스러워 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오른쪽 머리의 입이 먹이를 보고 냉큼 먹지를 않아, 왼쪽 머리의 입은 이때다 하고 집어 삼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것은 독이 든 먹이로, 오른쪽 머리의 입은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항상 먹이를 뺏기는 불만에 쌓여 있던 왼쪽 머리의 입은 재빨리 먹는 것에만 급급하여 그만 독이든 먹이를 먹고 말았다. 이리하여 결국 양두사는 죽었다. 생명에 뿌리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다. ‘만물동근’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 뿌리를 의지해 이런 저런 생명의 갈래가 나뭇가지처럼 나누어져 뻗어진 것이다. 또 세세생생 생사를 이어가는 윤회 속에서 볼 때 모든 개체적 생명 하나하나가 서로 상관 관계 있다. 때문에 남을 돌보는 것은 내 몸에 생긴 상처를 치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체의 어느 한 부위에 상처가 생긴다면 치료를 해야 하는 것처럼 중생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알라는 최상의 가르침을 보현의 행원에서 배우게 된다. 중생이 있으므로 부처가 있고 보살이 존재한다. 중생 구제를 서원하는 자는 병든 이에게 의사가 되어 주고, 캄캄한 밤에 불빛이 되어 주고, 길 잃은 이에게 바른 길을 안내하며, 가난한 자에게는 재물을 얻게 해 준다는 말은 한 편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사는 인류사회를 복지사회가 되게 하는 근본이념을 구체적 제시한 현실의 실태를 지적한 말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5월 제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