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탑스님─소원성취의 참뜻

소원성취의 참뜻

-한탑스님-

법장비구의 48대원 중 앞부분을 보면 아미타부처님이 소원을 세우시기를 ‘내가 세우는 세계는 원래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으니 거기에는 삼악도가 없어지리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삼악도는 남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고, 우리들 마음에 있는 탐·진·치가 만드는 것이므로, ‘내가 있는 세계에는 삼악도가 없도록 하겠다.’ 는 말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바로 욕심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법문은 『너는 본래 부처님 생명을 살고 있어서 네 생명이나 내 생명이나 본래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 그만 ‘나는 중생이요.’ 라는 착각을 일으켰을 뿐이다.

그 마음과 그 착각하는 생각, 그리고 세상을 잘못 보고 있는 그 눈을 바꿔라.』라고 하십니다.

그러기 전에는 삼악도가 우리 앞에서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삼악도가 없어진다는 말은 바로 내 마음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내가 욕심을 내고 성을 내고 남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살더라도, 나는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착각입니다.

욕심을 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은 어두움인데, 그 어두움은 광명세계에 가면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이 없어지는 것이지 광명세계에 갔는데 그 어두움에서 비롯된 소원이 성취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옛날 조사님들은 극락세계에 간다는 것을 ‘대혹왕생(帶惑往生)’ 이라고 했습니다.

‘대(帶)’ 라는 것은 휴대한다는 뜻이고, ‘혹(惑)’ 이라는 것은 번뇌 망상이니까, 번뇌 망상을 가진 채로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번뇌 망상을 버리지 못해도 나무아미타불 부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 고 이렇게 해석들을 하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극락세계는 광명의 세계입니다.

온 천지가 진리일원인 광명뿐인 세계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가는 번뇌는 바로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을 가지고 극락을 갑니다.

부처님의 원력으로 극락까지 갑니다.

하지만 가기가 무섭게 그 어두움은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 너 여기까지 오느라고 애썼으니까, 네가 가지고 있는 소원이 뭐지? 아! 좋은 자동차를 사고 싶었구나! 그래 그 소원을 성취시켜주마!”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믿는 많은 분들이 ‘불교를 믿으면 소원 성취한다.’ 는 그 참뜻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문사수법회는 내용이 참 좋은데, 왜 세상 살면서 좀 편하게 복을 받고 모든 소원을 성취하면서 사는 그런 기도는 안 해주십니까?” 라고 하시는 분이 간혹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법장비구 48대원은 부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 내용의 총망라입니다.

말 그대로 본원(本願)인 것입니다.

이 본원이 바로 부처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해주고 계신 기도입니다.

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항상 하고 계신 기도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입니다.

『나와 남이 함께 부처되어지리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세우신 발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런 원을 세워서 기도를 하시고 성불하셨습니다.

성불하셨다는 말은 그 소원이 모두 성취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분께서 항상 기도하셨던 게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과 더불어 부처되겠습니다.』라는 원을 가지고 수행 하신 결과로 부처가 되셨는데, 그러면 그분이 부처 됐을 적에 당신 혼자만 부처되셨다는 이야기입니까? 요새 정치하는 사람들이 선거 때 하듯이, 공약을 걸었다가 나중에 당선되고 나서는 ‘공약이라는 건 그때 표 얻으려고 그런 거지, 나하고 관계없어! 당선 됐으면 그만이다.’ 식으로 그렇게 하시는 부처님은 아니시겠지요? 그 분의 기도 원력으로 우리 모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부처되실 때, 모두 이미 부처가 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제자들은 ‘나의 참생명은 부처님생명!’ 이라고 용기 있게 내세우고 사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를 향해 하고 계신 기도는 새삼스럽게 추구해야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나를 위해서 일체 모든 소원을 성취시켜 주시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 성취된 기도를 그냥 우리가 받아들이는 게 바로 ‘나무아미타불’ 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을 부르는 것은 내가 먼저 부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나를 불러주고 계시는 소리를 듣는 것’ 이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부르는 그 명호 속에 부처님의 광명이 끊임없이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하늘에 달이 떴는데 달이 보기 싫어서 한 십리쯤 뛰어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랬더니 달이 ‘아이고, 내 여태 쫓아왔지만 십리 까지는 멀어서 못 쫓아가겠다.’ 하는 달을 봤어요? 십리 아니라 백리를 가도 달은 날 쫓아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쫓아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어디를 가더라도 아미타 부처님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시겠다는 그 원력으로부터 도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광명이 미친다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나한테 들어와서 ‘아, 나도 나무아미타불 해야 되겠다.

나도 본래 생명인 부처님생명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런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누구든지 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근심걱정도 없게 됩니다.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신 게 나무아미타불인데 그것 말고 다른 무슨 기도를 또 합니까? 다른 기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미타 부처님의 마흔여덟 가지 원, 그곳에 부처님이 모든 중생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 원력이 다 들어 있습니다.

모든 공덕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한탑스님─소원성취를 위한 기도___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

한탑스님

문)기도를 하면 모든 일이 잘 성취된다는

말을 듣고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열심히 하느라고 하는데 소망한

일이 성취되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답)기도는 부처님께 대한 구걸이 아닌 것부터

아셔야 하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부처님은 무량의 공덕주이시면서

동시에 크신 자비이십니다.

크신 자비이신 까닭에 죄업 속에서 헤매이는 중생들이 괴로움을 당신 자신의 문제로 삼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는 괴로워서 울부짖는

중생들의 애절한 구걸이 있을 때,

그때에 비로소 당신의 공덕을 그 울부짖는 중생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중생 쪽에서 바라기도 전에 이미 그 중생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마련해서 퍼부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 조건없이, 아끼시는 바 없이 당신의 무량 공덕을 그대로 중생에게 끊임없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생으로서는 다만 받아 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부처님께서 주고 계신 공덕을 남김없이 받아 쓰는

방법이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구걸하는 것이라 생각하시면서

해보셨다면 이제 그 마음가짐을 바꾸셔야 합니다.

비유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물 받으려고 약수터를 찾아 갑니다.

요새 약수터를 가보면 수도 꼭지가 장치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그 꼭지에 그릇을 갖다댑니다.

그러면 물이 받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큰 양동이에 가득 물을

받아가는데 다른 사람은 조그만 사이다 병만큼밖에

받아 가지 못한다고 합시다.

사이다 병만큼밖에 물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약수 꼭지를 보고 호소를 합니다.

“물좀 많이 주십시오.”하는 그 호소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물을 많이 못 받고 있는 것은 병이 작아서 그런 것이지

주는 쪽에서 적게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을 많이 받고 싶으면 그릇 큰 것을 마련하여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의 공덕 입는 것도 꼭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공덕을 받고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공덕밖에 못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처님께서 차별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받는 쪽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으로부터 공덕을 받는 그릇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의 그릇을 크게 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조그만 울타리에 가두어 놓고 거기에 부처님의 은혜가 채워지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부처님 앞에 활짝 열어 놓습니다.

해가 떠 있는데도 방안이 어두운 것은 창문이 닫혀 있기 때문인 것 아니겠습니까? 이 때 창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광명이 쏟아져 들어오듯이 우리가 마음을 부처님 앞에 활짝 열어 놓으면 부처님의 무량공덕은

한량없이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렇게 마음의 문을 여는 데에는 금강경

독송과 염불이 필요한 것입니다.

독경과 염불로 큰 공덕을 입도록 하십시오.

다음에는 바라고 계신 일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부처님을 내 욕심 채워주시는 심부름꾼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처님께 기도해서 우리가 소원을 성취하려는 그 소원의 내용은 사리 사욕 채우는 것이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몸에 병이 있어 건강을 위해 기도하더라도 세상에 있는 모든 형제 동포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사업의 번영을 원하더라도 세상 사람 모두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무사고 운전을 바라더라도 모든 동포들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체 중생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부처님의 원력인

까닭에 이와 같이 기도하는 것이 부처님께

내 마음을 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내 욕심 앞 세우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업장의 소멸을 기원합니다.

우리가 살아 가는 데서 겪는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내가 전생에 지은 업(業)이 익어서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 밖에 있는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러서

내가 괴로움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은 것을 내가 받는 것입니다.

일이 원만하게 추진되지 못하는 것도,

몸에 병이 붙어 있는 것도, 인덕이 부족한 것도,

가난 속에 허덕이는 것도, 모두 다 내 업장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업장의 덩어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일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업장을 그대로 놓아둔 채로 무엇인가 좋은 일이 별안간에 나타나지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큰 욕심 아닙니까? 욕심 채우는 일 도와주시는 분이

부처님이신 줄 기대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허하게 업장을 참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회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에

부딪치더라도 부처님의 은혜속에 살고 있음을

감사하면서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업장의 소멸이 실현됩니다.

기도는 이렇게 우리의 소원을 성취케 합니다.

굳은 신심으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은 틀림없이 나와 함께 계시면서 무량 공덕을 퍼부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한탑스님─내 이웃은 중생 아닌 미래의 부처님

내 이웃은 중생 아닌 미래의 부처님!

-한탑스님-

한탑 스님은 ‘올바른 불자의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법문했다.

“단 한 번의 나무아미타 염이라도 간절하게 해야 자신을 정화할 수 있다”며 “무아와 공의 도리도 바로 알아야 집착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일갈했다.

여러분 우리는 ‘나무아미타불’ 염송을 자주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의미를 잘 알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저 입으로만 하는 ‘나무아미타불’은 효험(?)이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면서 우리 자신을 정화해 가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단박에 자신을 정화할 수 없으니 마음을 조금씩이나마 정화하겠다는 의지의 발로로 이 ‘나무아미타불’을 염해야 합니다.

아미타부처님이 서방정토에 있다는 말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 떠서 서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이생의 삶을 다한 우리도 서쪽으로 가서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자는 의미가 내포된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시지 마십시오.

이 생의 삶에서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불법에 따른 삶을 산다면 이곳이 곧 극락정토입니다.

극락정토에 산 사람이 지옥에 떨어질리 만무하니 죽음 이후의 삶에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 자신을 정화하는 첫걸음은 바로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 정화하며 염불 – 기도해야 집착을 버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는 이생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우리 불가의 실천덕목 중 하나인 ‘보시’도 어떤 마음으로 행하는지에 따라 그 삶도 달라집니다.

그저 내 것을 베푼다는 정도로 보시를 해서는 안됩니다.

나누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 내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개념을 떠나 서로 나누는 것이 진정한 보시 정신입니다.

그래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실천하라 하지 않습니까? 집착을 버리려면 ‘나’를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에게 ‘나’를 버려라 해도 버리지 않습니다.

‘무아’와 ‘공’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아’와 ‘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않고는 평생 ‘나’라는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아’라고 하니 ‘내가 없는 나는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공’이라 하니 ‘아무것도 없으면 지금 보이는 것은 무엇’이냐고 합니다.

이런 이분법적 서구 인식으로는 ‘무아’와 ‘공’은 제쳐두고라도 ‘무아’의 그림자도 볼 수 없습니다.

여러 경전이 있지만 『금강경』을 꼭 공부하세요.

그러면 ‘무아’와 ‘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사구게를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만약 색신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일체의 함이 없는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하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무아의 가슴에 풍요를 심어라 바다 위의 파도와 물거품을 보세요.

파도를 바다라 하지 않고 물거품을 파도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거품은 곧 파도이며 파도는 곧 바다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나’를 버린다고 해서 한탑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탑은 이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아’와 ‘공’을 조금 이해했다고 해서 바로 체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번뇌에 의한 업장이 그만큼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편으로 아미타불을 염하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나무아미타불’만 염하고 자신을 바로 알아 집착을 버리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불자다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여러분 개인 한 분 한 분이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받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그 마음을 뒤집어서 주는 마음으로 살아가라”하셨습니다.

역대 조사 스님들도 “받을 생각말고 주는 마음을 가져라”했습니다.

달마대사는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고, 구하는 마음이 없을 때 거기가 바로 극락”이라 하셨습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은 불국토 여러분 주변에 있는 분들을 한 번 보세요, 그리고 이웃을 보세요.

모두 ‘중생’이라 하지만 ‘미래의 부처님’입니다.

그러면 베푼다는 생각을 떠나 ‘공양을 올린다’는 마음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불교의 진정한 ‘신앙’일 것입니다.

우리는 구하려 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 공양 많이 올렸다고 해서 많은 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받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가난하다고 느끼는데 기인합니다.

자신의 가슴속에 ‘가난’이라는 씨앗을 자꾸 심으니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 풍요롭게 살고 싶다면 ‘풍요’의 씨앗을 가슴 속에 심어야 합니다.

‘집착’을 떠난 ‘무아’의 가슴 속에 ‘풍요’의 씨앗을 심어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내 가슴속에 핀 꽃 한 송이가 열매를 맺어 또 다시 씨앗을 퍼트리면 세상은 그만큼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곧 불국토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부터라도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만 염하지 말고 단 한번을 하더라도 간절하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간절함 만큼 자신이 변하고 세상이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