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스님─ 당신의 성품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당신의 성품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월호스님-

일상생활에서 언제든지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 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수행 법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돌이켜 듣는 성품은 어떤 것일 까요? 여기에 한 물건이 있습니다.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지을 수도 없는 물건입 니다.

이 물건을 바로 보고 듣고 돌이켜 비추기도 하여 보지만, 무어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그 모양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육조 혜능스님의 제자인 하택 신회(670-762 당나라 스님)는 이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 이라고 대답하였다가 서자(庶子)가 됨을 면치 못하였 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악 회양 선사(677-744 당나라 스님)는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다 (設使一物卽不中)’고 대답함으로써 육조 혜능 스님의 적자(嫡子)가 되었다고 합니다.

닦고 증득함이 없지는 않으나 결코 오염될 수 없는 것, 이것은 무엇이겠습니 까? 그럼 달리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 하나의 경전이 있는데, 종이와 먹으로 이루 어진 것은 아니네.

그래서 펼치면 한 글자도 없건마는 항상 큰 광명을 내 뿜는다네.” 그렇다면 이것이 또 무엇인가요? 여기에 대해서 시비분별로 따져서 알려고 하지 말고 그리고 깨치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다만 ‘이 뭐꼬?” 하고 들어가면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면서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용을 쓰다 보면 머리 쪽으로 열이 오르는 상기병(上氣病)이 생기므로 너무 조급해서도 안 됩니다.

또한 너무 느슨해서도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 줄의 비유와 같이 너무 팽팽하게도 너무 느슨하게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너무 부지런하게 공부하려 하기 보다는 차라리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참선의 요령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마하반야바라밀(큰 지혜로 피안의 언덕을 건너간다는 뜻)‘을 외웁니다.

이때 소리를 내어도 좋고, 마음속으로 읊어도 상관없습니다.

둘째, 그 소리를 듣습니다.

스스로 내는 소리를 스스로 듣는 것입니다.

셋째, 소리를 듣는 이 성품은 어떤 걸까?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반문하소 생각해봅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누군가 나를 폄하하는 소리를 듣거나 심지어 상대방이 나를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욕됨에 성질내기 보다는 그 욕설을 듣고 있는 이 성품이 ‘도대체 무엇 인가?’ 하고 반문하여 보십시오.

그러면 생활 속의 참선이 실답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며, 당신은 지금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월호스님─ ‘묵은 나’와 ‘새로운 나’

‘묵은 나’와 ‘새로운 나’

-월호스님-

“일년 삼백 육십일이 오늘로써 끝나건만 / 열에 다섯 쌍은 참선하되 선을 알지 못하고(不知) / 도를 배우되 도를 알지 못하는구나.(不識) / 다만 이 부지불식(不知不識) 네 글자가 / 삼세제불의 골수이며, 팔만대장경의 근원이로다.” (선요) 달마대사는 양 무제를 만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不知)고 했다.

육조대사는 법달에게 자신은 문자를 모른다(不識)고 했다.

그런데 이 부지불식 네 글자야말로 삼세제불의 골수이며 팔만대장경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강조하고 다녔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노상 그런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침내 화를 내며 소크라테스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 나도 모르지.” “그렇다면 우리와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네.”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나는 나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네.

하지만 그대들은 그것조차 모르고 있단 말일세.” 스스로 모르고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이 진정한 앎의 출발점이다.

그것은 ‘묵은 나’를 보내고 ‘새로운 나’를 맞이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연말연시의 가장 좋은 덕목이다.

‘묵은 나’는 무엇인가.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몸과 마음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나’는 무엇인가.

스스로를 모른다고 정확히 아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몸과 마음이라고 확실히 아는 것이다.

월호스님─ ‘고마운 마음을 연습해야 고마운 일이 생깁니다’

‘고마운 마음을 연습해야 고마운 일이 생깁니다’ / 월호 스님

하루는 인근의 젊은 불자 부부가 찾아 왔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가운데, 맞벌이 부부의 애환을 듣게 되었습니다. 특히 아이를 키워주시는 어머니와 아이에게 항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데, 얼굴에도 그러한 마음이 나타나 보였습니다.그렇다고 해서, 당장 맞벌이를 그만둘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습니다.이러한 경우,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미안한 마음은 불편한 마음입니다.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우선 스스로가 불편하고, 또 그 상대방도 편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아이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당연한 마음을 갖는다면 그 또한 뻔뻔스러울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지 않습니다.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좋을지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미안한 마음보다는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마음은 방송국의 수신 안테나와 같아서 동일한 주파수를 끌어당기는 습관이 있습니다. 미안한 마음은 미안해 할 일을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은 고마워 할 일을 끌어당깁니다. 그러므로 미안한 마음을 연습하다보면 자꾸만 미안해할 일이 생겨나고, 고마운 마음을 연습하다 보면 자꾸 고마워할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이가 나에게 항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어렵게 대한다면, 내 마음인들 편하겠습니까?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미안해하는 느낌이 전달되니까, 아이도 불편해서 오히려 미안스러운 일을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짜증을 내거나 자꾸 아프거나 하는 식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래 엄마가 항상 옆에 붙어있지 않아도 이렇게 잘 커주어 정말 고맙구나.’ 하고 생각한다면, 아이에게도 그러한 마음이 전달되기 마련입니다. 고마워하는 상대에게는 자꾸 고맙게 생각 할 일을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상대방의 기대심리에 부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이나 직장 상사, 동료 등 모든 이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대하다 보면 고마워할 일이 생겨납니다.특별히 누군가가 나에게 고마운 일을 베풀었기 때문에 고마워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 그대로를 고맙게 생각함으로써, 실제로 고마워할 일이 생기도록 하는 것은 주인 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탄생도 당신의 삶도 당신의 죽음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삶은 감사할 일로 충만해 질 것입니다.-

월호스님

/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